메뉴 건너뛰기

close

고통을 참듯이 삶도 참으며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비밀>, 홍명진, 삶창, 2017
19.02.21 00:57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책 <당신의 비밀>을 읽고 홍명진, <당신의 비밀>, 삶창. 문학나눔 선정도서 ⓒ 윤정인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견디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외롭더라도 웬만하면 혼자 지내는 쪽을 택하고, 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이지 않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처를 감내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외로운 것이 삶의 본질일 거라는 체념이 오래 전에 뿌리내렸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딱히 죽고 싶다,라기보다는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건 아닐까, 라는 질문.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바로 그 질문을 끊임없이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쓸쓸하지만, 섬세하게 써내려간 문장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삶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보였다.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독하게 외롭다.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아주 잠시나마 그들의 곁에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삶은 고통을 참듯, 그렇게 참아내는 것이라는 한 부분에 다다르자 나는 꽤 아팠고, 책을 다 읽고 난 뒤 정말로 하루쯤은 앓아누웠다.



어느새 묽어진 아픔들, 그러나 지속되는 어둠의 밤들

 「사소한 밤들 」의 '그녀'는 사랑의 전화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깊은 밤에 전화를 걸어 오는 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잠깐의 위로를 받기를 원한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단순하면서도 전폭적인 추임새야말로" 가장 적절한 위로가 된다. '그녀' 역시 외로운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쉬이 마음을 보이지 않으며,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극도로 피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백가지라면, 죽어야 할 이유도 백가지이지 않느냐는 상담자의 질문에 "이유 없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 아니냐고" 대답하지 않은 것을 자책한다.(29) 사람들이 상담 전화를 걸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언저리에 널려 있는 자잘한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것에 불과하고, 그저 동조해주는 반응을 원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녀는 '죽음'을 직면하면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날이 그날 같아도 분명히 다른 날이겠죠. 이 어둠이 저것과는 다른 어둠이듯이, 이 밤이 지난 것들과는 다른 밤이듯이(31쪽)

  그녀는 자신와 가족들을 희생해가며 봉사에 집착하던 한 '봉사왕'의 말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남의 아픔을 들어주는 일은 자기의 아픔도 함께 덜어내는 일"이며, "아픔은 비비면 엷게 풀물이 배어 나오는 꽃 이파리처럼 묽어지기도"한다는 것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었을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일에 매달린다. 처음에는 어떤 간절함이 필요해 일을 시작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자신의 아픔이 묽어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어둠과 밤의 시간들이 지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매일 어제와는 '다른 날'이 이어지고 있다는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이 피어난다.  


 
포인세티아 단편 「사소한 밤들」에 나오는 포인세티아 ⓒ 윤정인
 


아픔의 경중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의 재섭은 이 소설 속에서 죽음과 밀착되어 있는 인물이다. '나'는 재섭의 오랜 친구로 어린 시절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차에 부딪쳐 죽을 뻔한 사고장면을 목격했다. 재섭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와 다른 친구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제 재섭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은 차를 타고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재섭을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외모와 성격을 지녔고, 평생을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살았다. 재섭이 황미라와 짧은 연애를 마치고 헤어졌을 때 친구들은 그저 괘씸한 여자에게 이용당한 가십거리정도로만 치부해버렸다. 재섭이 한참 힘들어하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무렵, 다들 그의 술주정을 무시한다. 누군가는 그의 얘기를 들어줄 것이고, 어차피 고통을 견디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일 테니.
 
우리에게 황미라는 스쳐 지나가는 가십거리일지 몰라도 재섭에겐 전 생애를 관통해간 전부이지 않았을까(84)

 친구의 장례식장을 향하는 어둠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나'는 이 칼날 같은 진실이 자신을 관통해감을 아프게 깨닫는다.  "여자는 많다, 잊어버려"라고 그의 아픔을 쉽게 위로할 동안 재섭은 쉽지 않은 고통을 견뎌야했을 지도 모르는 일. 아픔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 경중을 타인이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재섭이 기대한 것은 이미 희미하고 약해져버린 '추억'만 남아있을 지라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들 사이에 속해있다는 느슨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었다.   



스쳐가는 위로와 공감일지라도

 「해피크리닝 」, 「마순희 」의 경우에는 잠시나마 외로움과 아픔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어떤 깊은 밀도를 지닌 공감과 사랑은 아니다. 기옥은 유사한 아픔을 털어놓은 마순희 덕분에 남편에게 당했던 폭력의 고통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되지만, 여전히 마순희의 문자메시지에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마순희 」)
 세탁소에서 일하는 '그'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닌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도 잠시 지니지만 그녀를 안는 순간조차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해피크리닝 」)

 고통을 참으며 견뎌내듯, 삶도 그렇게 참으며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무게가 너무 무겁고 버겁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위로와 구원에 다다르지 않아서 안도했다. 각자의 아픔은 다르기에 완벽하게 포개질 수 있는 공감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각자의 것으로 혼자 감당하게 놓아두기보다는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아주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아픔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아픔을 덜어낼 수 있는 힘을 잠시나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