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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되었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열일곱 살 독서가 노은수씨. 3월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열일곱 살 독서가 노은수씨. 3월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 노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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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기다리면서도 막 책을 읽었어요. 아, 생각해 보니까 쪽팔려요."

노은수씨는 열일곱 살, 3년 전에 처음으로 한길문고에서 산 책 얘기를 하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은수씨의 표정을 봉쇄하고 있는 긴 손가락들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중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은 어떻게 웃어도 해사해 보였다.

은수씨의 집에는 책이 많았다. 어린 은수는 심심하면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점심시간에 밥 먹고 나서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빌려 읽었다. 또래들처럼 '인소(인터넷소설)'에도 빠졌다. 로맨스 장면에서는 "꺄아!" 환호하는 아이였다.

직장맘인 은수씨의 어머니 윤은경씨는 일요일 낮이 되면 선언하듯 식구들에게 말했다. "엄마의 '엄'자도 꺼내지 마!" 오전에 집안일을 모두 마친 은경씨는 오후에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대개는 경영이나 자기개발 책을 읽고, 고개를 숙이고는 뭔가를 쓰기도 했다.

"저는 엄마가 읽는 책에 흥미를 못 느꼈어요. 권해주는 책들을 거의 안 보고 소설을 읽었어요. 용돈 모아서 처음으로 책을 산 때가 중학교 1학년이었거든요. 은희경 작가가 쓴 <소년을 위로해줘>를 너무 읽어보고 싶었어요. 내 책을 샀다는 게 진짜 신났어요."

은수씨가 책을 선택했던 기준은 인터넷. 출판사에서 제공한 정보나 독자들이 쓴 서평을 참고했다.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서점으로 달려갔다. 처음에 산 책은 은수씨의 마음에 확 와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해 본 건 아니었다. 서점에서 '내 책' 사는 기쁨을 알게 되었으니까.

좋아하면 때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용돈은 빤하고, 읽고 싶은 책이 많은 은수씨는 동네 도서관으로 진출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 시리즈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서가에 빽빽하게 꽂힌 시집을 다 빌려 읽고 나서는 결심했다. 시집만은 사서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독서는 은수씨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도 같았다. 철학이 궁금해서 니체를 읽고, 남궁인 의사가 쓴 <만약은 없다>를 접하고는 응급의학서를 찾아 읽었다. 엑소 펜이라는 본분에도 충실했으므로 아이돌 팬픽도 어지간히 읽었다. "쟤랑 얘랑 엮으면 더 재밌을 것 같네" 라면서 직접 글을 쓰는 자신의 모습도 그려 보았다.

"나는 서점집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
 
은수씨가 읽은 <소년이 온다>. 학교에 내는 역사 수행 평가의 주제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잡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1980년 광주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썼다.
 은수씨가 읽은 <소년이 온다>. 학교에 내는 역사 수행 평가의 주제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잡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1980년 광주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썼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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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어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너무 슬퍼서 많이 울었어요. 5.18 광주 얘기잖아요. 때마침 역사 수행이 '한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거든요. 영화 <화려한 휴가>도 보고, 5.18 광주 민주항쟁이 정리된 자료도 쭉 찾아보고 정리해서 글을 썼어요. 좋아한다고 해도, <소년이 온다>는 자주 읽기 힘든 책이에요."

은수씨는 학원에 많이 다니지 않고 공부한다. 시간이 많은 편이니까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내며 갔다.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은 적도 있다.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의 경기를 분석하듯이 해봤다. 은수씨만의 기준을 정해서 노트를 정리하고 학교 공부를 진행했다.

사람들은 학교 성적까지 잘 나오는 은수씨의 공부 방법을 궁금하게 여겼다. 은수씨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노트를 보여달라고도 했다. 딸의 필기 노트를 지인들에게 찍어 보낸 은경씨는 우스갯소리로 "이거 갖다가 팔자. 장사해도 되겠어"라며 웃었다. 
 
혼자 학교 공부를 하면서 은수씨가 정리한 노트.
 혼자 학교 공부를 하면서 은수씨가 정리한 노트.
ⓒ 노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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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전생에 내가 진 빚을 받으러 온 존재'. 은경씨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진지하게 터놓고도 싶었지만 공감받지 못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들이 "지금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라고 핀잔을 줄 게 분명했다.

한 달에 용돈 12만 원을 받는 은수씨는 4만 원짜리 적금을 넣고, 나머지로 친구들이랑 떡볶이를 사 먹고 책을 사서 읽는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 인생, 어느 달에는 읽고 싶은 책이 쏟아지듯 출간된다. 은수씨는 부모님에게 따로 손을 벌려서 책을 사야 했다. 은경씨는 딸에게 말했다.

"은수야. 너, 너무 부담된다."
"책값?"
"참고서랑 문제집도 있지, 한 번 사면 5~6만 원 금방이야. 소설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안 될까?"
"알았어. 근데 엄마, 나는 서점집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


은수씨는 은경씨에게 순간적으로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제목이나 디자인, 유명세에 끌려서 산 책들은 은수씨 취향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말장난 같은 시나 '흔글'도 안 좋아했다. 은수씨는 도서관으로 답사를 다녔다. 마음에 꼭 드는 책을 발견하면 그대로 서점에 가서 샀다.

책을 사면서 수십 번 실패를 겪은 은수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장르를 선명하게 알아갔다. 어떤 책은 책장을 덮으면 그대로 끝이었고, 어떤 책은 은수씨의 일상까지 스며들었다. 은수씨는 책 속의 사람들을 자꾸 생각나게 하는 책이 좋았다.

자기를 존중하며 밀고 나가는 힘
 
은수씨의 책꽂이.
 은수씨의 책꽂이.
ⓒ 노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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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는 책이 노래질 정도로 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좋아해요. 해피 엔딩이면 거기서 끝나는 거고, 안 좋게 끝나면 엄청 마음이 쓰일 거잖아요. 열린 결말이라서 좋았어요. 제 맘대로 생각할 수가 있거든요. 얘네 어디서 잘살고 있겠지. 그래서 더 애틋한 거 같아요."

은수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자신과 같은 독서가 친구를 만났다. 두 사람이 좋아하는 책은 전혀 겹치지 않았다. 그래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좋았다. 그 친구는 온라인에서도 친구, 은수씨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재깍재깍 읽는 독자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블로그 이웃들은 은수씨의 글을 읽고 "진짜 잘 읽혀요", "글이 정말 좋아요"같은 댓글을 달아준다. 은수씨는 자신이 쓰는 글의 분위기가 밝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우울한 감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글을 써야 할까. 은수씨는 친구에게 말했다.

"글은 계속 쓰고 싶은데, 내 우울을 팔면서 쓴 글로 사랑받고 싶지는 않아."
"은수야, 나는 네 글이 너무 좋아. 근데 글이 너를 힘들게 한다면, 그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글이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글 쓰는 일은 너한테 좋은 직업이 될 거야."
 

은수씨는 '글 쓰는 사람 노은수'를 상상해본 적 있다. 꽃길은 아니었다. 긴 시간을 들여서 쓴 글을 출판사에 보내고, 거절당하는 장면부터 떠올랐다. 성공률이 희박해 보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직장에 들어간 다음에 취미처럼 글을 쓰는 게 맞는 걸까.
 
시집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않고 사려고 노력하는 은수씨. 한길문고에 자주 온다. 그래서 나는 은수씨를 알게 되었다.
 시집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않고 사려고 노력하는 은수씨. 한길문고에 자주 온다. 그래서 나는 은수씨를 알게 되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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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스스로 싹을 틔운다. 깊이 파묻어놔도 언 땅을 뚫고 나온다. 은수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학교 공부를 해왔다. 자기 생각을 존중하고 밀고 나가는 힘을 가졌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은 사람들 마음을 파고든다. 언젠가 나는 은수씨가 쓴 책을 사서 읽는 독자가 될 것만 같다.

새 학기를 앞둔 한길문고에는 문제집을 사려는 학생 손님들로 북적인다. 마스크를 쓰고, 패딩을 입은 은수씨는 또래 학생들과 비슷해 보였다. 한길문고에서 은수씨를 세 번째 만난 날, 나는 바짝 다가가 봤다. 은수씨는 박준 시인과 안미옥 시인의 시집을 골라 들고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은수씨가 읽은 책을 따라 읽었다.

때마침 스물한 살 청년 백준혁씨가 한길문고에 찾아왔다. "속으로만 좋아하는 후배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요." 나는 홍희정 작가가 쓴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를 권했다. 자기 마음하고 똑같은 제목의 책. 청년의 얼굴은 환해지면서 빨개졌다. 귀까지 달아올랐다. 그 순간, 한길문고 상주작가인 내 상담력은 +10 상승했다. 은수씨 덕분이었다.

태그:#열일곱 살 독서가, #노은수,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군산 한길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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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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