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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든 기록들이 있다.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기록자는 독자가 상상하기 힘든 용기를 냈을 것이다. 독자야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체적 글 읽기'란 그렇게 쉽게 고통을 밀어내지 못한다. 고통의 기록이 그렇듯이,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역시 읽는 동안 숨을 잘 골라야만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저자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는(이하 알렉) 변호사다. 10여 년 전 사건인 '리키 랭글리'(이하 리키)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알렉은 뿌리째 흔들린다. '소아성애 아동 살인'이라는 극악함 때문일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소아성애자, 리키 랭글리

리키는 어려서부터 이미 깊이 병들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리키는 6살 때 교통사고로 참혹하게 숨진 형 오스카와 계속 같이 살고 있다. 오스카의 죽음의 현장이 현상될 때, 리키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커가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6살에 멈춘 채 등장하는 오스카를 대면하며 함께 지낸다. 리키는 이미 어릴 때부터 소아성애를 저질러 왔고 그로 인해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왜 소아성애자가 되었는지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큰-형법상으로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루이지애나에서 6살짜리 동네 아이 '제레미'를 살해했다.

형 오스카의 망상에 시달리던 리키는 자신의 조현 증상을 알아채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묵살당한다. 스스로를 가두어주기를 바랐지만 국가는 그를 방치했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으로 타인을 해치고서야 비로소 그를 가두었다. 6살 제레미를 죽인 후 제레미가 오스카로 보였다는 둥 살인을 즐겼다는 둥 일관성 없는 진술을 해 1994년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다 2009년 종신형을 언도받게 되는데, 사형을 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레미의 엄마였다.

제레미의 엄마는 리키에게 제레미를 죽이기 전에 성추행했는지 묻는다. 추행하지 않았다는 리키의 고백을 듣고서 그녀는 결심한다. "당신을 위해 싸울게요."(p370) 이미 리키의 손에 죽은 제레미가 그나마 추행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자식이 죽는 모습을 어떤 엄마도 다시는 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그녀의 신념은 어머니로서의 연대감이었을까? 제레미 엄마의 노력은 마침내 리키의 목숨을 구했다. 종신형에 처해진 후 리키는 죽고 싶다는 말을 그쳤다. 제레미의 엄마는 리키를 용서한 걸까? '리키 랭글리 사건' 기록 어디에도 제레미의 엄마가 리키를 용서한다는 말을 없었다.

이 과정을 추적하며 알렉은 몹시 앓는다. 알렉은, "내가 법대로 진학하게 된 원동력은 사형을 반대하는 마음이었다... 내 일이 되자 감정이 변해버린다." 왜 그랬을까? 리키 사건이 그녀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복기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족 성폭행 피해자였다.

성폭행 피해자, 알렉산드리아

알렉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잘 다루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알렉과 알렉의 동생 니콜라이에게 체스를 가르쳐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 그림 그리기도 가르쳐주고 책도 재미있게 읽어주는 그야말로 다정한 할아버지였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거두었다. 교활한 노인은 손주를 사랑하고 보상을 취했다. 그의 범죄는 완벽히 은폐되었다. 알렉이 할아버지의 비행을 비로소 범죄로 구성하기 전까지.

어린 알렉과 니콜라이의 침실로 기어든 할아버지는 성폭행에 앞서 "틀니를 뱉어 손바닥에 올려 놓"으며 이렇게 주문을 걸었다. "나는 마녀다. 잊지 말거라. 남한테 이 일을 말하면 언제든 널 잡으러 올 거다. 언제든. 내가 죽은 다음에도 말이다."(p103) 소녀들은 지독한 저주에 걸려들었다.

이후 알렉은, 어린 나이로서는 이상하고 기분 나쁜 경험이었을 할아버지의 비행을 부모에게 어렵게 말하지만, 부모는 묵살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취한 조치는 할아버지를 집에 묵게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전과 전혀 다름없이 할아버지를 대면하고 식사를 함께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게 한다.

알렉은 헷갈린다. 부모의 침묵은 알렉에게 할아버지의 비행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비행이 무화되면서 알렉은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혼란을 겪는다. 소녀는 수렁에 빠진다.

깊이 타격당한 알렉은 병약해진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또래 남자들을 만나도 "누가 안전한 상대인지 알 수 없었다."(p221) "남들 눈에 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p262) 분열하는 자아를 붙들고 삶을 추슬러야 하는 알렉은 '섭식장애'를 앓는다. 먹을 수가 없다. 먹지 않아 형편없는 몸이 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테니 안전한 몸이 되는 것 같았다.

<나쁜 페미니스트> 저자 록산 게이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폭식을 하며 몸을 불려 나갔다. 그녀는 몸이 불어날 때마다 남들이 싫어하는 몸을 가지게 된다고 믿자 비로소 안전함을 느꼈다고 <헝거>에서 고백했다. 타인에게 침탈당한 몸의 기억은 자신의 몸을 학대하게 한다. 알렉은 먹지 못하면서 록산은 너무 많이 먹으면서 몸을 괴롭혔다.

리키의 '소아성애 아동 살해' 범죄를 돌아보는 일은 알렉에게 우연이었지만, 반드시 치러내야 할 시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처를 드러내 치료할 것인가, 더 깊이 감출 것인가? 위중한 상처는 이미 그녀의 몸과 마음을 조각내고 있었고, 더 이상 감추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부모에게 물었다. 왜 할아버지의 죄를 묻지 않았느냐고. 어쩔 수 없었다는 싱겁기까지 한 부모의 무심한 변론은 어린 딸의 쓰라렸을 아픔을 어루만질 뜻이 없어 보인다. 할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동생 니콜라이가, "난 나를 할아버지에게 학대받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어"라며 자신의 상처를 덮으려 하듯이, 그들의 부모 또한 같은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알렉은 부모도 그들 삶의 무게로 지쳐 있었을 거라고 회고하며, 부정의했던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 이 지점에서 알렉은 그토록 짓눌러왔던 고통에 직면하지 못하고, 착한 딸로 회귀해 버리고 만다. 피니시 라인을 목전에 둔 러너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듯이.

친족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뒤늦은 #미투를 했다. 죄의 엄중함을 따지기엔 이미 긴 시간을 훌쩍 넘어섰긴 했지만, 빛바랜 위로쯤은 있을 줄 알았다. 그녀가 위로 대신 늙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은 야멸찬 대꾸였다. 지금껏 묻어 두었으면 죽을 때까지 가져갈 일이지, 왜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는.

부모인들, 자식의 고통에 다가가지 못하면 타인의 고통일 뿐이다. 딸에게 이런 대못을 박는 비정함 말고는 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알렉의 부모는 딸의 아픔을 모른 채 하는 방법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었던 걸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알렉의 부모가 할아버지의 잘못을 은폐하지 않고도 알렉의 고통을 치유할 다른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들은 편리한 길을 택했을 뿐이다. 딸의 고통을 없는 일로 만들면 나는 그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용서'는 이렇게 허약하다.

피해, 용서해야 하는가?

피해를 지운다고 피해가 없어질까? 인간은 나약하기에 고통 앞에 무릎 꿇는다.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피해를 전면으로 드러낼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피해를 "공동체의 기억으로 공유"(권김현영)하며, 고통이 만들어진 억압을 해석하지 않는 한, 피해는 반복된다. '손상된 물건 신드롬'으로 병리화된 개인의 고통은 손쉽게 타자화된다. 내 일이 될 수 없는 고통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고통과 피해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책의 말미에 알렉은 할아버지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주문으로 그를 용서하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이해한다. 하지만 꼭 용서해야만 하는지는 묻고 싶다. 죄 혹은 깊은 상흔은 반드시 용서해야만 극복하는 것일까? "내가 천국에 가려면 너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용서마저 추궁하는 파렴치한 할아버지를 꼭 용서해야만 견딜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용서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고 상처는 아물 수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평생을 증오 속에 불행하게 사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를 적당한 거리에 두고 자칫 기만과 허위로 빠질지도 모를 삶을 견제하는 일은, 용서로 고통을 퉁치는 손쉬운 관용보다 고도의 일이다.

알렉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에도 그를 사랑했다고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얼마나 슬픈 일일지 생각해본다. 그런데 알렉이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도달한 그 결론이 해방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나는 할아버지의 주술과도 같은 '그루밍'에서 알렉이 헤어나지 못했다는 의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녀가 할아버지를 사랑했을지언정, 할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은 없다. 거짓 사랑을 속삭이며 착취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용서보다 서글프다. 나는 알렉이 차악의 고통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책세상(2018)


태그:#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리키 랭글리, #친족성폭행, #성폭행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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