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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소설 '설탕 두 스푼'을 쓴 지질학자 최범영 박사
 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소설 "설탕 두 스푼"을 쓴 지질학자 최범영 박사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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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 더 힘들어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조심스러워요."

지난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소 물 주입 때문에 발생했다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한 지질학자가 소설로 반론을 펼치고 나섰다. 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다룬 재난 소설 <설탕 두 스푼>(종려나무)을 쓴 최범영(61)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20년 가까이 지진 발생 위험이 있는 활성단층을 파헤쳐온 지질학자 최범영 박사는 이미 시집과 장편소설을 3권씩 펴낸 시인이자 소설가다. 최 박사는 2015년 조선시대 역사지진을 다룬 <바람에도 흔들리는 땅>을 시작으로, 한국전쟁기 양민학살을 그린 <빨간 의자>(2017년)와 우리나라 지질학의 흐름을 짚은 <게스트하우스 아마릴리스>(2018년)에 이은 이번 작품에서 아직 생채기가 가시지 않은 경주·포항 지진 생존자 문제를 다뤘다.

<설탕 두 스푼>은 가까운 미래, 포항과 경주 일대에서 대형 지진과 쓰나미(지진해일), 태풍이 연거푸 발생한 직후 경북 안강에 있는 제8병동에 모여든 재난 피해자들이 의료인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야기 뼈대는 프랑스 입양아 출신이면서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재난 현장에 파견된 정신과 의사를 둘러싼 휴먼 드라마지만, 중간중간 포항·경주 지진을 둘러싼 여러 과학적 논쟁들을 일반 독자들 눈높이에서 전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뿐 아니라 국제 학계에서도 뜨거운 관심거리인 '포항지진 지열발전 유발론'이 대표적이다.

소설이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최 박사 스스로 과학 이론과 실증적 연구에 바탕을 둔 '팩션'(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소설을 뜻하는 '픽션'을 결합한 말로, 사실에 근거한 소설을 뜻함)을 지향하는 탓에 이 작품도 과학·정치사회적 논쟁을 비껴가기 어렵다. 

더구나 최 박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정부출연 연구소도 문제가 된 지열발전소 건설에 참여한 여러 기관들 가운데 하나여서, 이해상충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 박사가 논문이 아닌 '소설'이란 형태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에 공개한 건, 특정 연구소에 속한 연구원이기 이전에 지질학자로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소신 때문이었다.

체육관서 두 번째 겨울 보내는 포항 지진 피해자들
 
지난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진으로 대피한 이재민들이 흥해실내체육관에 가득 모여 있다. 이들은 여진과 조그만 땅흔들림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진으로 대피한 이재민들이 흥해실내체육관에 가득 모여 있다. 이들은 여진과 조그만 땅흔들림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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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난 최범영 박사는 여전히 '학자로서의 소신'과 포항 지진 피해자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칫 지진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포항 지진이 지열 발전과 관련됐을 수 있다는 보도로 자연재해를 인재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에 대한 공포가 사람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올 지진에 대비해 건물을 새로 짓든가 보강해서 끄떡없이 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오히려 낮추고, 아직도 체육관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내는 포항 지진 피해자들을 국가와 국민이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생각마저 지우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2017년 포항 지진 직후와 다르지 않다. 다만 5.4 규모 지진으로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던 실제 포항 지진과 달리, 소설 속에서는 쓰나미를 동반한 규모 6.6 강진으로 200여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1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소설에서는 영일만에 건설하려던 한 시설이 지진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금 포항 주민 상당수가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소 물 주입 때문에 발생했다고 믿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앞서 이진한·김광희·김영희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4월 포항 지진이 자연 지진이 아니고 지열발전소 물 주입 때문에 발생한 '유발 지진'이라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 진원이 지열발전소 주입정 위치와 물 주입 뒤에 발생했다는 점 등을 근거를 내세웠다. 포항 지진 피해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정부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 지열발전 과정에서 물 주입 직후 규모 3.5 이하의 '미소 지진'이 일어난 사례는 있지만, 포항 지진의 경우 물 주입 시점에서 한 달 이상 지난 데다, 포항지진과 같은 규모 5.4나 규모 4.3 정도 큰 지진이 지열 발전 때문에 발생한 전례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도 지난해 '포항 지진과 지열발전의 연관성 분석 연구단'을 출범시켜 지진 원인 조사에 나섰고, 오는 3월쯤 조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

"지열발전 물 주입만으로 큰 지진 발생하기 어려워"
 
지난 2017년 11월 15일 JTBC의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지열 발전소'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급됐다. 11월 21일 JTBC는 지열발전소와 포항 지진의 연관성에 대한 데이터를 공개하며 후속 보도를 내놓았다.
 지난 2017년 11월 15일 JTBC의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지열 발전소"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급됐다. 11월 21일 JTBC는 지열발전소와 포항 지진의 연관성에 대한 데이터를 공개하며 후속 보도를 내놓았다.
ⓒ jtbc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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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흥해읍에 건설 중이던 지열발전소는 지하 4~5km 지점에 물을 주입해 인공적인 저류조를 만든 뒤 지열을 이용해 고온고압 상태의 수증기를 뽑아내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하는 심부지열발전 방식을 이용했다. 2018년 완공을 앞두고 시험 가동 과정에서 대량의 물을 주입한 직후 규모 3.0 이하의 '미소 지진'이 발생한 사례가 관측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17년 포항 지진 역시 지열발전 때문이라는 추론이 나왔다.
 
"포항 지진 기간 발생한 3.5 이하의 미소 지진은 물 주입 직후에 일어났지만 포항 지진 본진은 물 주입 후 한 달 뒤에 일어나 물 주입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물론 물 주입으로 공압(암석의 입자 사이로 물이 들어가서 암석이 쉽게 파괴되게 하는 역할)은 증가했겠지만 수평으로 미는 힘이 워낙 컸기 때문에, 지열발전 물 주입만이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최범영 박사 역시 지열발전소 물 주입이 작은 규모의 지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 박사는 포항 지진(규모 5.4)과 당시 이어진 여진(규모 4.3) 정도의 큰 지진 발생 원인을 지열발전 물 주입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포항지진 가운데 규모 4.0 이상 큰 지진은 모두 3건이었어요.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 30분쯤 포항 흥해읍 남성리 일대에서 발생한 진원 심도(깊이) 4km 규모 5.4 본진, 2시간 뒤 발생한 심도 5.5km 규모 4.3 여진, 그리고 2018년 2월 11일 발생한 심도 4.3km에서 발생한 규모 4.6 여진인데, 그때 지각의 응력(지각이 받는 압력) 상태는 '역단층(수평 응력을 받아 상반이 하반 위로 밀려 올라가는 단층)형' 응력이었어요.

그런 응력이 발생하려면 수평으로 (수직 응력보다) 더 크게 미는 힘들이 작용해야 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할까 계산했더니 어림잡아 500MPa(메가 파스칼) 이상일 때 역단층형 응력장이 가능해요. 200MPa만으로도 웬만한 화강암은 깨질 정도니 500MPa이면 엄청난 힘이거든요."
 
최범영 박사가 추산한 포항 지진 기간 수평증액응력 추이.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본진 당시 수평증액응력은 500MPa(메가 파스칼)로 추정했다.
 최범영 박사가 추산한 포항 지진 기간 수평증액응력 추이.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본진 당시 수평증액응력은 500MPa(메가 파스칼)로 추정했다.
ⓒ 최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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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스트레스(응력)는 서로 수직인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지각의 내리누르는 압력인 수직응력은 1km 깊어질 때마다 27MPa씩 늘어난다고 한다. 최 박사는 포항 지진 본진 당시 깊이 4km에서의 수직응력은 108MPa, 여진 때는 5.5km에서 150MPa 정도 작용했다고 봤다. 이때 수평으로 밀어붙이는 힘인 수평응력이 (수직 응력 등 기본 응력보다) 더 크게 작용해야 지진이 발생하기 때문에, 최 박사는 수평 응력이 적어도 500MPa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각 응력(스트레스) 모델을 적용해 보니 규모 3.5 이하 지진은 물의 역할(공압)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지만, 규모 5.4 본진과 규모 4.3이나 규모 4.6 여진은 물(공압)만으로는 안 되고 수평으로 미는 큰 응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최 박사의 반론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 박사는 포항지진 기간 발생한 지진 7개 가운데 3개는 다른 단층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모든 지진이 지열발전과 관련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규모 5.4 지진이 일어났던 지진 단층면을 복원해 보니 진원이 확인된 7개 지진 가운데 2개는 그 단층면에 찍히지 않았고 하나는 지진단층면의 방향이 달랐어요. 즉, 1개 단층면이 아니라 적어도 3개 이상의 지진 단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어요. 지진이 하나의 단층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면 어느 한 요소, 이를테면 지열발전소의 물 주입이 모든 지역의 지진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 재난은 국가 책임, 재난 트라우마 센터 필요"
   
지난 2018년 2월 11일 경북 포항에서 규모 4.6 지진이 나자 진앙과 가까운 흥해실내체육관에 있던 이재민들이 지진 상황을 설명하는 이강덕 포항시장에게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18년 2월 11일 경북 포항에서 규모 4.6 지진이 나자 진앙과 가까운 흥해실내체육관에 있던 이재민들이 지진 상황을 설명하는 이강덕 포항시장에게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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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소 물 주입 때문이라고 100%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최석영 박사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령 있다 해도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설탕 두 스푼' 243쪽)
 
소설 속에서는 '최석영' 박사가 최범영 박사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정작 어느 연구소 소속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현실의 최범영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최 박사는 "지질학자이자 소설가인 최범영의 개인 의견이지 내가 속한 기관과는 무관하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아무리 개인 의견이라고 해도 자신이 어느 기관에 속하는지 거론되는 것만으로 포항 지진 생존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3월에 (포항지진과 지열발전 연관성 조사) 결과가 찬성으로 나오든 반대로 나오든, 재난 생존자들 편에서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봐요. 조사 결과에 상관없이 국가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지진으로 생활 기반이 무너진 분들, 집이 무너질까봐 못 들어가는 분들이 안심하고 집으로,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게 첫 번째 할 일이죠. 지열발전 관련 여부로 국가와 주민이 소송을 벌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피해 정도를 따지는 과정에서 오랜 시간이 걸려 생존자들 상처만 더 커질 수 있어요."
 
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소설 '설탕 두 스푼'을 쓴 지질학자 최범영 박사가 18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지진 관련 자료를 찾고 있다.
 경주·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소설 "설탕 두 스푼"을 쓴 지질학자 최범영 박사가 18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지진 관련 자료를 찾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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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지진 발생 원인을 둘러싼 논란을 떠나, 최 박사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발생한,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지진 피해자들의 재난 트라우마를 해소하는데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속 배경인 '제8병동'은 암울한 곳이라기보다는 정부의 역할이 잘 이뤄지는 이상적인 곳에 가깝다. 소설 제목인 '설탕 두 스푼'도 지진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여러 도움의 손길을 상징하고 있다.

"저는 지진을 공포로 만드는 재난 영화들에 동의하지는 않아요. 지진이나 자연 재난은 국가에서 보상비가 얼마인지 따지지 말고 무조건 책임져야 돼요. 국가 존립 이유 가운데 하나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건데 재난으로 생활 기반이 없어진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해줘야죠. 지금도 집이 무너질까봐 겁이 나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 마음을 달래주고 치료해 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우리는 아직 낯설거든요. 이 소설을 통해 ('제8병동' 같은) 트라우마센터가 필요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태그:#최범영, #포항지진, #지열발전, #설탕두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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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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