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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중경, 1947.9.17.) 광복군은 임정 산하의 정규군이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중경, 1947.9.17.) 광복군은 임정 산하의 정규군이었다.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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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아무리 일제의 침략을 당하고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내전을 치루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처지라 하더라도 자국 내에 남의 나라 군대를 양성하는 일을 허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중국군 당국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을 요구하였지만, 임시정부는 1940년 10월 9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조직조례」를 제정하고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 직할하에 설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의 통수권이 김구 주석에 주어졌다. 하지만 상당 기간 이른바 '9개준승'에 묶여 자유로운 활동이 제약되었다.

우리나라는 1907년 7월 31일 이른바 한일신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지 33년 만에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보고서」를 통해 국군의 역사와 사명, 책무를 정리하고, 광복군은 이를 교육훈련 과정에 자료로 활용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고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로 전환하는 등 전시체제를 마련하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40년 6월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9월에는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 3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6월에는 독일군이 소련을 기습한 데 이어 12월 6일 일본군이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미ㆍ일전쟁을 기대해왔다. 마침내 일본이 중국전장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동남아 일대의 자원을 손에 넣고자 미국을 선제공격하였다.

일본 전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 공군과 해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개전 반년 만에 욱일승천의 기세로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버마 등을 점령하였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미ㆍ일전쟁에서 결국 미국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ㆍ일전쟁의 발발이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공표하였다. 국치 31년 만에 일제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비록 망명지 충칭에서 한 선전포고이지만, 한민족의 한이 담긴 민족사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순한문으로 쓰여진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의정원의원에서 의결을 거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약헌」 제2장 10조는 "주외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ㆍ강화를 동의함에는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선전성명서'는 전문과 5개 항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번역한 것이 『소앙선생문집』에 실려 있다. 이 번역문은 약간 소략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고 어투도 고문체인 것을, 김희곤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한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 대원들의 모습
▲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 대원들의 모습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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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 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ㆍ영국ㆍ미국 캐나다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방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

4. 일본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 소 앙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는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외교활동의 영역을 나누었다.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해서는 김구와 조소앙이 나서서 활동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섭하도록 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는 충칭주재 판사처에 머물고 있는 대표들을 통해 접촉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임시정부는 먼저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해 장개석과 직접 담판하기로 하고 그 연결망으로 임시정부와 연고가 있는 오칠성ㆍ주가화 등 당간부를 선택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한 뒤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고자 노력하던 임시정부는 '9개 준승'이라는 족쇄를 푸는 데 온갖 시도를 다하였다. 

임시정부는 누구보다 먼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는 광복군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통수권을 장악한 뒤로부터 쉽게 그것을 돌려주지 않았고, 정부 승인에 대해서도 연합국과의 협의를 기다리면서 뒤로 미루고 있었다. 연합국의 눈치를 보느라 승인을 미루었고, 영국과 미국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승인을 미루는 형국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과 미국 OSS대원들 . 사진 위쪽에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과 미국 OSS대원들 . 사진 위쪽에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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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은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동작전을 추진하였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되어 정보수집ㆍ유격대활동ㆍ적 후방 교란 등을 임무로 하는 일종의 전략첩보기구였다. 웨드마이어 중장이 1944년 10월 중국 전구(戰區)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운남성 곤명(昆明)에 본부를 두고 중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OSS와 광복군의 합작을 이루게 된 것은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OSS에서는 전략상 한반도를 중시하였다. 한반도가 일본과 중국대륙간의 수송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또 한반도는 비밀첩보원들이 일본으로 침투하는 기지로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OSS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중요시하게 되면서, 이 지역에서의 첩보활동에 한국인들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OSS측은 미주교포와 미군에 포로가 된 한국인,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OSS훈련에 대한 모든 준비는 미국 측에서 담당하였고, 훈련책임자는 싸전트 대위였다. 싸전트는 5월 11일 미국인 교관들과 함께 제2지대 본부가 있는 두곡(杜曲)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독수리작전' 대장에 부임하였다.

장준하ㆍ김준엽 등 선발된 한국청년 50여 명은 1주일간 예비훈련을 받았다. 이 동안 미국 교관들은 훈련생 각자에 대한 자질과 적성을 조사하였고, 이를 기초로 훈련생 각자에 대한 임무와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임시정부는 이와 같이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창설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실제로 OSS 대원들을 국내로 진공시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이 중지되고 말았다.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국내로 투입되어 일본군과 교린중에 일제가 항복을 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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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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