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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야기 '산청군 금서면 특리'

은둔한 선비가 머물렀던 山高水?
19.02.19 16:43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예전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사람들이 '함양산청안의거창'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제일의 두메산골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아마 이 말은 2001년말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맞는 표현으로 지리산 산청은 '오지'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山高水清(산 높고 물 맑은)의 자연환경은 자연스럽게 은둔한 선비들이 자리 잡아 지금도 경치 좋은 물가에서는 선인들의 숨결과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로부터 인간은 강을 따라 주거지를 형성해 왔다. 따라서 풍수지리에 있어 주거지의 기본은 바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된다. 지리산 뱀사골, 백무동 등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엄천이란 이름으로 흘러내리다, 생초 강정마을 앞에서 수동을 거쳐 내려오는 남계천과 합류하며 비로소 경호강(鏡湖江)이 된다. 경호강 유역은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굴되고 있다. 특히 특리 291번지 일대의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제163호)은 총 37기로 그 기원은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특리마을의 역사는 이렇게 그 기원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대부분의 마을 이름에는 자연적 특성이나 예언적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마을에 특(特)이라는 글자가 쓰인 곳은 여기 특리가 유일하다고 한다. 뭔가 특별한 곳이라는 의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풍수상 특리(特里)는 소가 엎드려있는 와우(臥牛)형이라 특리라고 부른다. 동의보감촌이 생기면서 특리마을을 소개하는데 있어 특별한 마을이라 특리라고 했다는데, 여기서 특(特)은 '특별할 특'보다는 '소(수컷) 특'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지명과 부합된다. 특리마을에서 소와 관련된 지명으로는 마을 서쪽 동의보감촌이 있는 고개를 '틉치재'라 부른다. 이는 '특치(特峙)'로 송아지가 마을을 돌아보는 형국이다. 또한 마을 옆에는 독막(犢幕, 송아지를 가두어 둔 곳)골과 지금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거의 사라졌지만 경호강을 따라 있던 들판을 독실(犢實)이라 하여 모두 송아지와 관련 있는 지명이다. (犢 송아지 독)

고려말 민문(閔門) 10세손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선생은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시다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고려 충신 72현의 한 분이시다.
이후 조선 태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 부르자 현재 특리마을 바로 옆 대포(大浦)로 내려와 매월 삭망(초하루와 보름)에는 왕산 북사면 중턱에 있는 바위(이후 후손들이 망경대望京臺라 칭함)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예를 올리고 충절을 다졌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 1차 건립 비석은 崇禎紀元五周己酉로 서기 1909년이고, 2차는 단기 4294년으로 서기 1961년에 해당된다. 장구(杖屦)는 지팡이와 신발(가북신 또는 메투리)로 오르신 족적을 지칭하는 의미이다.
 
이 분이 바로 산청 민문의 중시조로 현재 산청의 금서, 생초, 오부 등에는 집성촌의 형태로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다. 1993년 12월 27일자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호로 지정된 생초면 대포리에 농은 선생을 배향한 대포서원은 조선 숙종 19년(1693년)에 후손과 유림에 의해 창건 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화를 입었다. 그 후 고종 11년(1874년) 722평의 대지에 농은선생신도비각(農隐閔先生神道碑閣)과 숭의재(崇義齊), 동재(東齊1994년 개축), 서재(西齊), 여운루(如雲樓 : 内大門), 경앙문(京仰門 : 外大門)의 건물로 재건되었다.
 
마을 위쪽 끄트머리에는 청금정(廳琴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진주 강씨(姜氏)로 휘(諱)가 한(漢)인 분이 계셨는데, 부친 강이경(姜利敬)이 군위현감으로 재위하다 남이(南怡)장군과 더불어 화를 입어 강보에 싸인 아들 강한을 데리고 함양(咸陽)으로 유배를 왔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강한은 1496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나,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 동쪽 산음현(山陰縣) 필봉 아래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서재를 금재(琴齋)라 이름 짓고 거문고와 글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청금정(廳琴亭)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명옥탄(鳴玉灘)이라 불렀는데, 거문고 소리와 옥구슬의 울림! 이름만 들어도 옛 선비의 풍류와 멋을 느낄 수 있지 아니한가?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농폭(聾瀑), 세진(洗塵, 먼지와 피로를 씻어내다), 고강동천(高岡洞天, 높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등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으나, 홍수와 세월의 흐름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한선생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많은 시인 묵객들과 어울렸으며, 이 분이 고산현감을 지냈다 하여 지금도 필봉산을 '강고산'이라고 마을사람들은 부른다.
 
頭流山色吟窓裏(두류산색음창리) 두류산 풍경이 창가에서 읊고
鳴玉灘聲醉枕間(명옥탄성취침간) 명옥탄 물소리는 베개사이로 스며든다.
自有林皋娛歲月(자유임고오세월) 숲 우거진 물가에서 세월을 즐기니
更無魂夢到塵寰(경무혼몽도진환) 속세에 대한 마음은 꿈에도 다시없다.
세상을 등지고 이곳 청금정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이 글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귀향한 나의 농장 끝에 이 청금정이 있다는 것은 600년을 뛰어넘어 강한선생과 이심전심이려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후손들이 떠나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지만 몇 채의 고택이 있다. 어릴 적 우리는 그냥 의관댁(議官宅) 또는 이층집이라 불렀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국가등록문화재 제148호, 민재호가옥이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수를 지낸 민재호가 건립한 2층 한옥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방을 두 줄로 배열한 겹집구조로 고급 춘양목을 민흘림 기법으로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아랫방에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으며, 2층은 주로 여름철에 사용하는 공간으로 마룻바닥에 평상을 놓고 사용했다. 2층 마루가 그대로 1층의 지붕이 되는 구조다. 2층의 외벽 사방에는 채광과 환기를 위해 가로로 긴 들창을 달아놓았는데, 창살 짜임이 일본식에 가깝다. 늦가을에는 어릴 적 멀리서 보아도 2층 난간에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퍽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민재호(再鎬)는 산청 민문(閔門) 농은공의 후손인 졸수공파(拙叟公派)로 부친은 치관(致寬)이며, 백부(伯父)가 산청의 노사학파인 치완(致完), 치량(致亮)이다. 치완, 치량의 종숙(從叔)은 민재남(閔在南)으로 장성의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과 왕래하며 노사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그는 1858년에 자신의 제자인 김현옥(金顯玉)과 종질(從姪)인 민치완. 민치량을 기정진에게 보내 수학하게 했다. 이후 1863년 봄 민치완은 상경하여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雲峴)의 송정(松亭)에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또한 대원군을 보필하며 글씨 쓰는 직책을 맡았는데, 대원군을 온종일 모시면서 발등에 종기가 나고 버선이 찢어져도 물러가라고 말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정도로 근신하여 대원군이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1865년 문효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1866년에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의영봉사(義盈奉事)를 역임했으며, 동생인 민치량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민치완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기정진에게 외세 침략의 방비책을 제시한 병인소(丙寅疏)를 올리도록 권유하였으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여 유림들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1871년 서원철폐령에 항의하며 친분 있는 유림들에게 편지를 보내 서원철폐를 막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을 아래쪽에는 강원도 삼척지역에서 활동한 관동창의대장 복재(復齋) 민용호(閔龍鎬) 의병장의 생가가 있다. 민용호는 현와공(弦窩公) 민치겸(閔致謙)의 장남으로 민치우(閔致禹)에게 입양되어 명성황후와는 14촌 남매간이 된다. 민용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노사 기정진의 문인인 민치량에게 수학하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인 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를 사사하였기 때문에 위정척사의 양맥인 노사학파와 화서학파에 모두 접맥되어 있다.
 
한 때 100호가 넘고 마을 하나에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산골마을치고는 꽤 규모가 있었으나 지금은 나룻배와 물레방아도 사라지고,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이 옛 영화를 뒤로 하고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최근 들어 고향을 떠났던 분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고 귀농귀촌으로 전입하는 분들도 있어 다시 한 번 양반고을이라는 자존심을 살려보려는 움직임이 있어 마을의 전통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참고자료>
麗興閔氏農隐公派譜, 高山追慕錄,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손성모), 김봉곤,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성장과 문인 정재규의 역할」, 『남명학연구』 제29집, 2010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된다'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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