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는 대통령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입니다. 임명된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뵐 기회가 없었고, 앞으로도 뵐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서면으로 사직서를 제출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속한 위원회는 국민의 생명 보호와 안전 관련 윤리문제를 최종적으로 심의하는 위원회입니다. 지난 1차 정기회의에서 비의료기관 유전자 검사항목 확대안을 부결처리했고, 최근 2차 정기회의에서는 관련기관의 인증제 시범사업은 허용하되 검사항목은 다시 심의하기로 의결했습니다.

영리 유전자 검사, 영리병원... 하나둘 열리는 빗장
 
영리 유전자 검사가 시행될 경우, 오용으로 인해 차별, 낙태, 고용이나 보험 가입 거절, 불필요한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 부정확한 유전자 검사 결과로 인한 우울증과 자살 등이 야기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반면 이에 대한 국민 이해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제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영리 유전자 검사가 시행될 경우, 오용으로 인해 차별, 낙태, 고용이나 보험 가입 거절, 불필요한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 부정확한 유전자 검사 결과로 인한 우울증과 자살 등이 야기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반면 이에 대한 국민 이해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제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얼마 전 산업통상자원부는 유전자 검사항목 확대와 함께 영리 유전자 검사 연구사업을 승인했습니다. 이어 보건복지부는 검사항목을 확대한 유전자 인증제 시범사업을 발표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임상사용평가가 완료되지 않은 의료기기를 원격의료에 활용하는 사업을 허가해주었습니다.

이는 우리 위원회의 결정과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는 조처입니다.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영리 유전자 검사의 오용으로 인해 차별, 낙태, 고용이나 보험 가입 거절, 불필요한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 부정확한 유전자 검사 결과로 인한 우울증과 자살 등이 야기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반면 이에 대한 여성계, 종교계, 장애계를 비롯한 국민 이해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제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는 대통령의 책임도 있습니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규제샌드박스법'이 이 모든 일의 발단입니다. 경제활성화에 대한 대통령의 고민을 모르지 않으며, 저 역시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이 빨리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무리한 속도전'은 그 폐해가 막심합니다.

"총알의 파괴력은 속도에서 나옵니다."

너무 빨리 바뀌는 횡단보도 신호등은 노인이나 장애인에게는 폭력무기나 다름없습니다. 제 전공분야에는 '슈말하우젠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취약계층은 빠른 변화에 더 취약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책은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추진되어야 합니다.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구동력이 아니라 제어력"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빠르게 달리고 싶으면 좋은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브레이크가 없는 스포츠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가 속했던 위원회와 같은 조직입니다. 빨리 달리려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에 늘 고민하면서도, 우리가 시간을 들여 신중히 검토하는 이유는 그 '속도'가 '흉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궁극적으로 더 잘 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통령님, 지금 문재인 정부가 시행하는 '규제샌드박스법'은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려던 '규제프리존법'과 똑같습니다. 영리 유전사 검사, 손목시계를 이용한 원격의료, 이 모두가 과거 더불어민주당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저지했던 제도입니다.

그런 정책들이 앞으로도 매일 몇 개씩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 정책들은 사실상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국민 유전자 정보, 질병 정보가 영리기업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합법화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감히 못 했던 무모한 정책입니다. "안전장치가 있다"는, "이것은 그저 연구사업"이라는 관료들의 보고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속도가 흉기가 되지 않으려면...
 
더욱이 이 정책들은 사실상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국민 유전자 정보, 질병 정보가 영리기업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합법화해주는 것입니다. "안전장치가 있다"는, "이것은 그저 연구사업"이라는 관료들의 보고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이 정책들은 사실상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국민 유전자 정보, 질병 정보가 영리기업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합법화해주는 것입니다. "안전장치가 있다"는, "이것은 그저 연구사업"이라는 관료들의 보고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대통령님, 브레이크 없이 속도만을 추구했던 폭주의 결과가 세월호, 청년 김용균의 죽음이 아니었던지요. 생산속도를 높이려 컨베이어벨트의 안전장치를 꺼서 잘린 노동자들의 수많은 손가락을 과거 대통령님도 보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규제샌드박스법'이라니요. 지금이라도 이들 정책의 전면 중단을 선언해 주십시오. 시행 전에 이들 사업이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민에게 설명하고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위원회와 같은 안전장치가 무시되지 않고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사직서를 낸 마당에 말을 보태는 것이 구차하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드립니다. 제 말이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와 같은 조직은 정부를 귀찮게 하는 쇠파리입니다. 하지만 그 쇠파리를 죽이면 당신은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규제샌드박스법, #영리 유전자 검사, #원격의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건정책을 전공했고 한양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부교수입니다.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우리의 적이 어디 있냐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