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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는 신라를 이끌 젊은 인재의 발굴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두 여성 준정과 남모는 300여 명의 청년들을 지휘하는 원화의 리더였다.
 "원화"는 신라를 이끌 젊은 인재의 발굴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두 여성 준정과 남모는 300여 명의 청년들을 지휘하는 원화의 리더였다.
ⓒ 삽화 이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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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불문하고 '여성의 질투'가 가져온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한 문헌이 적지 않다. 프랑스의 왕비와 황제의 내연녀였던 백작의 부인, 남아메리카 예술가와 그가 사랑했던 몇 명의 여성들이 만들어낸 추문은 문학작품이나 음악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 중 하나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아내와 첩이었던 '여태후(呂太后)와 척부인(戚夫人)의 사연'이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 기록된 이 일화는 너무도 끔찍해 그대로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다.
 
"여태후는 유방의 조강지처다. 그와의 사이에서 혜제(惠帝·한나라의 2대 왕)와 노원공주를 낳았다. 유방이 초나라 항우와의 싸움에서 고전할 때 힘을 다해 도왔으나, 정작 한나라의 왕이 된 유방은 여태후가 아닌 척부인과 그녀에게서 낳은 아들을 더 아끼고 사랑했다.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유방이 죽자 여태후는 척부인의 아들을 독살하고 무딘 칼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그것으로는 화가 다 풀리지 않았던지 벌겋게 달아오른 숯을 억지로 먹였고, 눈과 귀를 멀게 한 후 오물 가득한 돼지우리에 척부인을 던져 넣어 굶겨 죽였다."

이처럼 호러 영화 수준의 두려움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질투가 부른 무시무시한 스캔들'은 신라에서도 발생했다.

화랑(花郞)이 생기기 전 신라 청년들을 이끌던 전위 조직 원화(源花)의 리더였던 준정(俊貞)과 남모(南毛)가 바로 그 스캔들의 주인공. 먼저 원화가 어떤 조직이었는지 살펴보자.

아름다운 여성 둘의 뒤를 따르던 수백 명의 신라 청년들

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원화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은 천성이 어질고 신선(神仙)을 숭상해 민가의 낭자 중 아름답고 예쁜 사람을 택해 원화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충성과 효도, 우애와 신의를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이에 준정과 남모, 두 원화가 선택됐는데 둘을 따르는 청년들이 무려 300~400명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의 김부식 역시 원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런 것이다.
 
"진흥왕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은 벼슬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걱정 끝에 젊은이들을 함께 모여 즐기게 하고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 발탁해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준정과 남모가 원화로 뽑혔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적힌 문장을 쉽게 해석하면 어린 나이에 왕좌에 앉은 진흥왕은 인재 발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향후 신라의 발전을 이끌 젊은이들을 필요로 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청년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아름다운 두 명의 여성 준정과 남모를 내세웠던 것이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준정과 남모는 원화의 리더 역할과 동시에 당시 신라의 왕이 수행했던 종교의식을 곁에서 돕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서라벌 최고의 미모를 가진 준정과 남모, 거기에 빼어난 용모의 귀족 청년들 수백 명이 말을 타고 풍광 수려한 곳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닦던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시원스러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원화의 결말은 아름답지도 희극적이지도 못했다. 다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인용한다.
 
"준정과 남모, 두 여인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이에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불러 억지로 독이 섞인 술을 권했다. 준정은 술과 독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모를 깊은 연못으로 끌고 가 익사시켰다. 남모를 따르던 무리들은 슬퍼하며 준정의 음모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그 노래는 진흥왕과 진흥왕의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준정도 사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질투는 때때로 끔찍한 비극을 부른다. 준정이 권한 독이 든 술을 마신 남모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질투는 때때로 끔찍한 비극을 부른다. 준정이 권한 독이 든 술을 마신 남모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 삽화 이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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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의 죽음은 단지 준정의 질투 탓?

서강대학교 사학과 조범환 교수는 <한국고대사탐구(韓國古代史探究)>에 발표된 논문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비록 원화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고 화랑도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화랑도가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실 한국 사학자들의 화랑(남성) 연구에 비하면 원화(여성)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흡한 수준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사료(史料)가 부족했던 탓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의 연구 성과가 미약했기에 일제강점기 일본 역사 연구자들은 원화를 창기(娼妓·몸을 파는 기생) 정도로 격하시키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조 교수는 "원화의 신분이라든가 원화 아래에 있었던 청년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조언하며 "남모에 대한 준정의 질투가 원화의 폐지를 가져왔다는 단순한 해석에서 벗어나 원화 해체의 이면적 배경을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원화의 신분과 '해체의 본질적 이유'까지 연구해야

앞서 언급한 논문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삼국시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목의 첫 번째 이유는 원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는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원화는 단순히 미모의 여성이 아닌 화랑과 같은 진골(眞骨)이었고, 왕실의 제사를 보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이는 과거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해석이다.

또 하나. 조범환 교수의 논문은 원화의 폐지가 단순히 '준정과 남모의 스캔들' 즉, 여성의 질투만이 이유가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원화의 해체는 당대 신라가 처한 시대적 상황, 체제 내에서 벌어진 왕과 귀족의 권력 다툼, 약화된 이념 구조의 보완을 위한 차원에서 진행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조 교수 견해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화' 없애고 불국사 중건한 지소태후
   
오늘날의 불국사. 아버지 법흥왕 이상으로 불심이 깊었던 지소태후는 6세기 중반 불국사를 중건했다.
 오늘날의 불국사. 아버지 법흥왕 이상으로 불심이 깊었던 지소태후는 6세기 중반 불국사를 중건했다.
ⓒ 이용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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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과 곡절 많은 삶이라면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只召太后· 574년 이후 사망 추정)도 어느 신라 여성 못지않다.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을 통해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한 법흥왕과 보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지소태후는 당시 풍속대로 여러 명의 왕족·귀족과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낳은 자식이 6~7명.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과 함께 미실의 첫 번째 남편인 세종(조선 4대 왕인 세종과는 다른 인물)도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딸 역시 여러 명이었다.

540년 가을이 깊어갈 무렵 법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진흥왕은 겨우 만 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세상사 이치와 법도를 명확히 분간하기 힘든 나이.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런 이유로 진흥왕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섭정(攝政·임금을 대신해 통치하는 행위)이 시작됐다.

지소태후의 섭정 시기에 대해 역사학계는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빼어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사부(異斯夫), 거칠부(居柒夫) 등의 조력을 받아 아들이 수행해야 할 통치자의 역할을 큰 실수 없이 해냈다.

545년엔 국사(國史) 편찬을 지시했고, 경쟁 관계에 있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밀리지 않는 뚝심을 보여줬다. 불심이 깊었던 부친 법흥왕의 뜻에 따라 흥륜사를 완공하는 등 불교 중흥에도 공을 세웠다. 지소태후의 섭정은 10년 가량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소태후는 574년 불국사를 중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시기에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만들어졌고 이는 불국사에 봉안(奉安)됐다.

이를 볼 때 그는 아버지 이상으로 불교에 기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도 불국사는 "가장 크진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절"로 이름이 높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준정이 남모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소태후는 망설임 없이 원화를 해체하고, 원화를 따르던 무리들을 화랑으로 재편성했다.

서강대 조범환 교수는 '원화 해체-화랑도 설치'라는 지소태후의 결정이 가진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인재 발굴을 통해 어린 아들(진흥왕)이 법흥왕 시절 이루어진 여러 가지 변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것이며, 사상의 변화 과정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새로운 종교적인 변화를 이끌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준정, #남모, #신라, #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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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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