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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회. 1926년 11월 3일 성진회가 조직되고, 이듬해 독서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된다.
▲ 성진회. 1926년 11월 3일 성진회가 조직되고, 이듬해 독서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된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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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국내 3대 항일투쟁의 하나인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났다.

발단은 한일 기차통학생들의 나주역 충돌사건이지만, 민족 내부에 부글거리는 용암은 오래 전부터 조선 청년ㆍ학생들의 가슴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결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정된 폭발이었다. 

당시 광주에는 광주고보ㆍ광주농업학교ㆍ전남사범학교ㆍ광주여고보 등 대부분의 학교에 비밀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독서회의 전신은 1926년 조직되어 장재성ㆍ왕재일 등이 지도하던 성진회(醒進會)였다. 1927년 10월 성진회가 강제로 해체되면서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는 한편, 독서중앙본부를 두어 상호 긴밀한 연계를 맺어 활동하였다. 

이같은 일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3ㆍ1혁명 이후 축적되어 온 청년ㆍ학생들의 항일운동의 양상은 동맹휴학으로 나타나고 동맹휴학은 독서회를 통해 조직되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각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휴교의 발생건수는 1921년 23건, 1922년 52건, 1923년 57건, 1924년 14건, 1925년 48건, 1926년 55건, 1927년 72건, 1928년 83건 등으로 1925년 이래 맹휴는 발생 건수에서 증가일로에 있었다.
 
광주학생운동 호회. 동아일보에서 방행한 호회로서 1930년 1월 17일자의 내용이다.
▲ 광주학생운동 호회. 동아일보에서 방행한 호회로서 1930년 1월 17일자의 내용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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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 시기 학생운동이 그만큼 활발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1929년 말 광주학생운동은 이러한 학생운동 활성화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이다. 

지역적으로 볼 때는 경기도(77건)ㆍ함경남도(51건)ㆍ황해도(42건)ㆍ경상남도(38건)ㆍ강원도(29건)ㆍ전라북도(29건)ㆍ전라남도(28건)ㆍ평안북도(24건)ㆍ평안남도(20건)ㆍ충청남도(20건)ㆍ충청북도(17건)ㆍ함경북도(15건)ㆍ경상북도(13건)의 순으로 맹휴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 맹휴가 가장 활발했던 학교는 고창고보ㆍ경신학교ㆍ송도고보ㆍ광주고보 등이었다.

동맹휴학의 이유는 교내문제 등도 없지 않았으나 가장 큰 요인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이었다. 일본인 교사(교장) 및 일본학생들과의 충돌을 비롯하여 일제식민통치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동맹휴교로 나타나고 마침내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1929년으로 3ㆍ1혁명 10주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이 봉기한 11월 3일은 당시 음력으로 시행하던 개천절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날, 이른바 명치절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도 광주 신사(神社)가 있는 광주공원 앞에서 '전남산견(產繭) 600만석 돌파 축하회'가 열리고 산견 관계자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이날 오전 명치절 행사에 동원되었다가 교외로 집결하여 전날(10월 31일) 기차 안에서 한국인 여학생에게 폭언한 일본인 학생을 두둔하고 한국학생들의 잘못만을 대서특필한 일본인 신문 『광주일보』 등 신문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며 항의하였다.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광주를 떠난 통근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남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 박기옥 등 조선인 여학생들을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 등이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다음날 광주지역의 신문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의 편을 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질타하는 기사를 실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11월 1일 광주시내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오는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역 부근에서 충돌했다. 마침 순찰중이던 일본인 경찰이 불문곡직하고 한국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그동안 차별대우와 쌓인 민족의식이 한꺼번에 발동하여 일본인 학생들과 주먹 대결을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일본경찰은 한국인 학생들만 연행해 갔다. 다음날인 11월 2일 시내에서 다시 한ㆍ일 학생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광주의 분위기는 분노에 들끓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경내에 위치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놓았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경내에 위치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놓았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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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1월 3일 11시경, 광주의 각급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집단난투극이 벌어지고 시민들도 몰려나왔다. 학생들을 호위하기 위해 나왔던 교사들은 학생들이 시위대로 돌변하자 당황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뒤따라 갈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시가지로 진출한 시위대는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이 왔구나. 무등산에서 단련한 기술로 용감히 적군을 물리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시위대가 충장로를 지날 때 시민들은 각목ㆍ장작개비를 내놓았으며,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통치마 앞자락에 호빵을 수십 개씩 싸오고 큰 바가지에 물을 떠오기도 하였다. 또 사범학교 학생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학생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를 누비며 '조선독립만세',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일본인학교 광주중학교를 폐쇄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교가ㆍ응원가 등을 불렀다.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연도의 시민들도 행렬에 합세하여 시위대는 대군중을 이루었다.

시위대가 도립병원(현 전남대 부속병원) 앞에 이르렀을 때 광주경찰서 고등계 주임 나베지마가 인솔하는 100여 명의 경찰대가 가로막아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박찬승, 「광주학생운동」)

총독부는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초비상 경계를 펴고 광주의 모든 중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한국학생 75명을 주모자로 구속하고 일본학생은 7명을 구속했다가 모두 풀어주었다.

광주학생 시위를 지켜 본 신간회 광주지회를 비롯하여 사회단체 간부들은 회합을 갖고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구성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를 시도하였다. 한편 광주의 제2차 봉기를 준비하여 광주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준비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탑.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내에 있는 탑으로서 광주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새겨놓았다.
▲ 광주학생독립운동탑.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내에 있는 탑으로서 광주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새겨놓았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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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들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하여 궐기하자! 싸우자! 굳세게 싸우라!

1. 검거자를 즉시 우리들이 탈환하자.
2.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3. 교내 경찰권의 침입을 절대 반대하자. 
4.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5. 직원회에 생도 대표를 참가시켜라. 
6.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켜라. 
7.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8.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9. 전국 학생대표 회의를 개최하라. 


광주학생시위는 방학 중인데도 전국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시위 또는 동맹휴학을 결행한 학교수 194개교, 참가학생수 5만 4천여 명이고, 그중 580여 명이 퇴학과  함께 최고 5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2,300여 명이 유기정학을 당하였다.

전국 희생자 학생옹호동맹이 1930년 1월 10일 전국에 배포한 격문에서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살피게 한다.

격   문

전조선 OO적 학생에게 격함

악독한 일본제국주의 지부인 조선총독부의 노예적 교육정책을 조선청년제군에게 시종 굴종적 마취제의 주사를 놓으며 탄압을 계속하고 있다.

보라, 사회과학연구 절대 금지, 국사(조선사)제외, 국어(조선어) 사용 금지, 일본제국주의의 충복이 된 자만을 교원으로 사용하는 등,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부형의 피와 땀으로 얻은 금전을 강탈하여 문화향상, 교육계발 등 갖은 구실로서 놈들이 실시하고 있는 교육정책은 우리 학생을 기만하여 OOOO의 노예로 만들어가고 타락의 심연에 영원히 빠뜨리려는 수단을 쓰고 있다.

OO청소년제군! 저반 전조선을 통하여 봉기한 OO적 학생의 시위 스트라이크사건을 보라. 살인적 단말마적 행위로 우리의 선두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는 학생 전부는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정의를 위하여 정당한 동맹파교에 놈들은 무엇으로서 우리들에게 대하는가. 경찰, 소방대와 학교당국이 야합하여 총검으로 위협, 탄압하고, 우리들이 정의를 부르짖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검속, 고문, 투옥 그리고 진보의 자유를 싫어하는 학교당국은 또 우리에게 퇴학명령, 정학처분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지 않는가!

피가 있는 조선 OO적 학생제군! 용감하게 싸우자, 시위운동, 스트라이크. 전국학생사건에 대한 학교당국 및 포악한 조선총독정치 폭로연설회 등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써 자유와 정의를 위해 교내에서 투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간성까지 육박하자. 

-. 검속된 학생을 탈환하라.
-. 교내 학생자치권을 옹호하라.
-. 일체 식민지교육에 항쟁하라.
-. 학원에 경찰간섭 절대반대.
-. 전국동맹파교로써 모든 요구를 관철하라.
-.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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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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