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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북미정상회담의 개최지 베트남

세계적으로 베트남이 화제다. 다음 주 27~28일에 2차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게 됨에 따라 전 세계가 베트남을 주목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1차 싱가포르에 이어 왜 하필 베트남을 정상회담의 장소로서 선택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베트남과 두 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인연에 주목한다.

우선 북한의 경우를 보자. 북한은 전통적으로 베트남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베트남의 호치민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베트남 하노이에는 북한 대사관이 위치해 있다. 또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개발의 모델로서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해진다.

반면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최근에 와서 재정립 중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소원했던 두 국가의 관계는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함에 따라 급격하게 호전되었다.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과 각을 세워 왔던 베트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으며, 동구권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경제개발을 꾀하던 베트남에게 미국과의 수교는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5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깜짝 방문은 달라진 두 국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었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 내려져 있던 무기수출금지 조치를 전면적으로 해제시켰으며, 하노이의 일반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음으로써 전 세계에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하노이에서의 버락 오바마
 하노이에서의 버락 오바마
ⓒ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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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실리를 우선하는 미국이라고 하지만 베트남전은 그들의 가장 아픈 치부이기 때문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엄청난 물자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패배한 전쟁. 그런 역사를 두고 미국이 어찌 베트남과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까?

<적과의 대화>는 바로 그런 의구심을 풀어주는 책이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작가인 히가시 다이사쿠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결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해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1997년 6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 동안 베트남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회의를 주목한다. 그것은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를 포함해서 양국의 수뇌부들이 모여 과연 전쟁은 피할 수 없었는지, 베트남전은 왜 확전되었는지 등을 논하는 자리였다.

그 회의에서 양측, 특히 미국은 자신들이 지녔던 편견을 인식하게 된다. 즉, 자신들이 가졌던 베트남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전쟁의 적지 않은 원인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과연 그들은 하노이 회의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베트남전의 원인

 
<적과의 대화> 표지
 <적과의 대화> 표지
ⓒ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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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회의에서 가장 먼저 논의되어진 주제는 과연 베트남전이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냐는 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여전히 식민지를 운영하려던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통일된 독립국가를 꿈꾸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공산주의를 지향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당시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그랬듯이 공산주의가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일 뿐, 50년대 이후 굳어진 냉전체제의 개념은 아니었다.

실제로 하노이 회담에서 베트남 인사들은 당시 베트남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기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트남은 미국을 반제국주의라고 생각했고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으로는 베트남은 하나의 커다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것은 1945년 8월까지 미국을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유일한 대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입니다. 미국은 서방 강대국 중에서 억압과 압제와 싸우는 유일한 나라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독립을 지향하는 베트남의 혁명에 미국이 동정을 하고 이해를 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 88p
 
그러나 베트남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베트남을 잘 몰랐다. 단순히 공산주의 국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미국은 아시아 식민지 민중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베트남과 중국이 어떤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는지 간과했다.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같은 공산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중국은 전쟁을 벌였는데, 당시 미국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위 '도미노 이론'의 공포였던 것입니다. 케네디 정권과 존슨 정권 내내 우리는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내주게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내주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전체를 상실하는 것은 미국과 기타 자유주의 사회의 안보 체제를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 73p

결국 베트남전은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가 굳어져감에 따라 미국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했고, 그 결과 베트남이 어떤 전통과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는지, 호치민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전의 확대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서
▲ 미국의 패배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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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베트남 양측은 베트남전의 발발과 함께 전쟁의 확대에 대해서도 논했다. 미국 측은 베트남전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 베트남 탓인 듯 주장했다. 베트남전은 미국에게 하나의 수렁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언제든지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베트남은 적극적인 공세를 펴서 미국 내 반전 세력의 입지를 줄이고 전쟁을 주장하는 국방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베트남 측은 불쾌해했다. 어쨌든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것이고, 전쟁의 확대 역시 미국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를 피해자인 베트남의 책임이라고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 측은 확전의 결정적인 이유로 '쁠래이꾸 공격'을 지적했지만, 베트남 측은 이것이 하노이 중앙정부가 아닌 현장 지휘관의 판단일 뿐이었다고 했다. 결국 명령 지휘 계통이 집중화되어 있던 미국이 베트남의 명령 시스템을 오해해 전쟁을 확대시킨 것이다.
 
만약 그 공격이 쁠래이꾸 부근에 있던 한 지방 사령관의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의 대응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을 결심한 것은 북베트남 정부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베트남의 게릴라 부대에 의한 단독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남쪽의 게릴라 부대에 대한 보복만으로 종결시킨다는 판단도 있을 수 있었을 겁니다 – 133p

지휘명령 계통이라는 것은 공업화 과정에서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농업 국가의 지휘명령 계통은 언제나 분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보의 전달 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137p
 
미국의 폭격과 협상

 
호치민 전쟁 박물관에서
▲ 전쟁의 비극 호치민 전쟁 박물관에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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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회의에서는 베트남전 말미에 있었던 평화 협상에 대해서도 거론되었다. 미국은 북폭을 통해 하노이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고자 했지만, 베트남은 오히려 북폭으로 말미암아 협상을 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미국에게 폭격은 전쟁 중 하나의 옵션이었지만, 베트남에게 미군의 폭격은 전쟁 그 자체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주권 침해였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미군의 폭격도 마찬가지다. 남한이야 폭격을 크게 당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북한의 경우 많은 인민들이 미국을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 폭격 때문이었다. 평양 시내 대부분을 파괴시킨 미군의 폭격은 공포 그 자체였으며, 또한 이후 이어진 미국에 대한 증오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북폭은 우리를 분개하도록 만들었고, 화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노, 분노, 너무도 커다란 분노 때문에 북폭을 받으면서 협상을 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굴욕을 갚기 위해서는 남베트남의 지상전에서 미국군을 박살내는 것밖에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 158p

미국 측은 북폭이 계속된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도 양국 지도자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평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고, 베트남 측은 북폭 하에서는 평화의 기회 따위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이들 양자의 대화로부터 알 수 있었던 것은 폭격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어마어마한 인식의 차이였고, 일단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에서도 권력은 군의 논리에 강하게 지배받는다는 현실과, 그 상황 하에서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구체적 사실이었다 - 191p
 
앞서 언급한 하노이 회의는 단순히 미국, 베트남 당국자들의 회상기가 아니다. 그것은 두 국가의 진정한 관계 개선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으며, 또한 함께 미래를 꿈꾸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미국과 베트남은 이를 통해 두 국가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혀갔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요컨대, 미국이 북한과의 정상회담 개최지로 베트남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과 북한이 만날 예정이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 또한 계속 만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과 베트남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가 간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적으로 살 수 없지 않은가.

적과의 대화 - 1997년 하노이, 미국과 베트남의 3박 4일

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원더박스(2018)


태그:#베트남전, #적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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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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