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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이해찬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18 망언'에 대해 재차 유감을 표하고 있다.
▲ 돌아온 이해찬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18 망언"에 대해 재차 유감을 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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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A군대의 선제공격이 있고 뒤이어 B군대의 반격이 있었다면, B국가는 반격을 가했을 때 희생된 병사들뿐 아니라 선제공격을 받았을 때 희생된 병사들까지 한데 묶어서 동일한 전투의 희생자로 예우한다. 선제공격으로 희생된 병사 따로, 반격으로 희생된 병사 따로, 그런 식으로는 예우하지 않는다. 선제공격에서 반격까지, 전 과정이 하나의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무시하는 이가 있다. 바로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지난 8일 소위 '5.18 공청회'가 망언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 김진태 의원은 '유공자 명단 공개' 주장에 덧붙여 또 다른 주장을 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기인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던 이 대표가 어떻게 5.18 유공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5.17 조치 피해자가 5.18 유공자로 지정되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허위 신청이나 특혜가 있지 않았나,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보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2·12 → 서울의 봄 → 5·17 → 5·18

1979년 10.26사건(박정희 피살) 뒤인 12월 12일,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 4년제 정규 육사의 시초인 육사 11기 이하 장교들이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를 이루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으로 대표되는 구군부를 뒤엎고 주도권을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완결되지는 않았다. 1980년으로 넘어가면서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시위가 격화됐다. 전두환이 청와대로 가려면 이 '민주화 요구'를 넘어야 했다.

그에게는 일종의 장애물이었을 텐데, 그게 한둘이 아니었다. 군부만 장악했을 뿐, 정부까지 장악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수아비나 다름없기는 했지만 최규하 대통령 밑에 내각이 있었고, 또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민주공화당이라는 집권여당이 있었다.

그런 '장애물'을 타개하고 정권 장악을 이루고자 신군부가 벌인 일이 바로 5.17 조치다. 부마항쟁(부산·마산) 때문에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만 실시됐다가 10.26 사태 이튿날인 10월 27일 제주를 제외한 지역들로 확대된 비상계엄을, 5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제주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였다.

특정 지역을 제외한 부분계엄이 실시되면, 대통령-국방장관-계엄사령관으로 명령 계통이 확립된다. 반면, 모든 지역을 망라하는 전국계엄이 되면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계통이 압축된다. 현행 계엄법 제6조 제1항에도 동일하게 규정돼 있다. 10.26 때 전국계엄이 실시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암살 직후의 혼란 속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전두환이 부분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한 것은 제주도를 상대로 뭔가 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내각의 국정 간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실제 권한이 없었으므로 국방장관만 배제하면, 군부가 계엄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점은 5월 17일에 신현확 국무총리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서리는 임시 임명)에게 했던 항의에서도 드러난다. 신현확의 아들인 신철식 전 국무조정실 정책조정차장이 쓴 <신현확의 증언>에 그 항의가 소개돼 있다.
 
"이거 보시오. 전 부장!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전국계엄이라는 게 뭐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하고 직결해서 모든 국정을 다 하게 되는 게 전국계엄이오. 내각이라는 건 이름만 있지 법적으로 아무 권한이 없어지는 거요."
 
5.17 조치는 형식상으로 봐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무회의 의결 과정도 그렇고, 그 이후 과정도 그랬다. 집총한 군인들이 중앙청(경복궁 내부)을 포위한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5.17 조치가 통과됐다. 또 당시 헌법(1972년 제정) 제54조 제4항에 규정된 국회 통고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신군부는 국회까지도 무력으로 봉쇄했다. '5.17 쿠데타'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5.17과 5.18,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이해찬 대표의 5·18 유공자증.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당대표실 페이스북 2월 15일자 글에 실려 있다.
 이해찬 대표의 5·18 유공자증.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당대표실 페이스북 2월 15일자 글에 실려 있다.
ⓒ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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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조치는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반대하는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 이해찬을 포함한 운동권 학생들의 신변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5.17 일환으로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문에 이해찬 역시 구속됐다. 정주신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5.18의 성립: 민주화 과정에서 민·군의 예정된 충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 5.17 조치로 국회의 폐쇄, 정치활동의 금지, 대학의 폐쇄, 파업 금지, 언론 검열 강화, 대학생 간부 검거령, 김대중 체포 등이 뒤따랐다. 뒤이어 계엄사는 '현직 국가원수 비방 금지, 정치 활동 금지, 대학 휴교령' 등 포고령 10호를 발표함에 따라,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의 정치적 박탈도 이루어졌다." - 동북아연구소가 2007년 발행한 <동북아 연구> 제22권 제2호에 수록
 
5.17은 정권 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도전'이었다. 이에 대해 '응전'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응전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7이 도전이고 5.18은 응전이었으며, 5.17이 선제공격이고 5.18은 반격이었던 것이다.

양자가 상호불가분 관계라는 이야기다. 최영태 전남대 교수의 논문 '5.18 민중항쟁과 김대중'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에서 시작된 광주항쟁의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5월 18일 전남대생들은 신군부의 5.17 쿠데타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이상주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 민주화운동에 계엄군들은 야만적인 폭력으로 맞섰고, 시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계엄군들의 폭력에 분노하여 항쟁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 호남사학회가 2015년 발행한 <역사학연구> 제57집에 수록.

5.17과 5.18이 불가분 관계라는 점은 <신현확의 증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군부의 강압을 못 이겨 비상국무회의에서 5.17을 통과시켜준 신현확 총리는 "일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고 예감했다"라고 한다. 그 뒤 상황을 <신현확의 증언>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예감은 적중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선포했다는 뉴스가 전국으로 퍼져 나간 그날 밤, 신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6백 명의 재야 인사가 체포되고 2백 명이 수배되었으며, 김종필·이후락·박종규·오원철 등 유신의 권세가들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 김대중씨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었고, 김영삼 총재는 가택연금되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광주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신현확 총리의 머릿속에서는 5.17로 인한 운동권 체포와 광주 항쟁이 하나의 사건으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아들이 <신현확의 증언>을 정리했던 것이다. 강압을 받으며 5.17을 통과시킨 신현확의 인식 속에서도 5.17과 5.18은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5.18을 전후한"이라는 문구

 
 이해찬 대표가 5·18 유공자가 된 경위를 설명하는 당대표실 페이스북.
 이해찬 대표가 5·18 유공자가 된 경위를 설명하는 당대표실 페이스북.
ⓒ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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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과 5.18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은, 역대 정부가 피해자들을 하나로 묶어 보상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둘을 하나로 묶는 방식은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 처음 시작된 게 아니다. 5.17 및 5.18 당사자인 노태우 대통령이 공포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법률 제4266호인 이 법률의 제1조는 아래와 같다.
 
"이 법은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상이를 입은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에 따라 관련자와 그 유족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함으로써 생활 안정과 복지 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 화합과 민주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광주항쟁은 5월 18일에 시작했는데도 위 법에서는 "5월 18일을 전후한"이라고 했다. 김진태 의원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른 체 하는 대목이다. 5월 18일부터 벌어진 사건에 원인을 제공한 일들이 그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5월 18일을 전후한"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5.17과 5.18의 불가분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문구다.

그런데 위 법은 집권당이 민주자유당일 때 제정됐다. 5월 18일부터 광주 현지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5.18 희생자로 판단해 예우하는 방식은 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민자당은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을 거쳐 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따라서 "5월 18일부터"가 아니라 "5월 18일을 전후한"이라고 규정된 것이 정 불만스럽다면, 이해찬 의원이 아니라 한국당에 따져야 마땅하다. 김진태 의원이 항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 셈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김진태 의원은 5.17 조치의 피해자인 이해찬 대표가 어떻게 5.18 유공자가 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도전 대 응전, 선제공격 대 반격이라는 상호 불가분 관계를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가 국민들의 역사인식이나 지적 능력을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밖에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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