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1 16:51최종 업데이트 19.03.21 16:51
경향신문은 3.1절 57주년을 맞아 1976년 3월 1일자부터 3일간 '독립운동과 한용운'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필자는 조선중앙일보 주필·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 이관구(李寬求)씨.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있다가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중앙위원과 정치부 간사를 맡았다. 그때 신간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한용운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 첫째 날 글에서 그는 한용운의 인상기를 이렇게 적었다.


"나지막한 키에 영채 있는 안광과 강초한 얼굴은 담력과 학덕을 겸비한 지사의 풍모를 강하게 풍기거니와 볼에 파인 총탄의 흔적에서 지나간 거센 풍상을 읽을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이따금 체머리를 흔들게 된 것이 또한 특징이다. 굳은 침묵을 지키다가도 한번 입을 열면 열화 같은 변설(辯舌)에 마디마디 조리에 어긋남이 없다. 지기와 만나 담소할 때는 다사로운 정한이 넘쳐흐르지만 지조 없는 변절자를 대할 때는 매서운 호령에 주먹까지 거침없이 먹인다."

조선불교 유신운동 펼친 승려 독립운동가
 

한용운


한용운(韓龍雲)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한응준(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며,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관리 출신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으로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한용운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주위에서 신동으로 불렸다. 6세에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7세에 대학(大學)을 독파했다고 한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초년기에는 방황과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1892년 14세 때 한용운은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원만치 못했던 것 같다. 둘 사이에서 아들(한보국)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훗날 아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문전박대하였다.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18세 되던 1896년, 한용운은 홀연히 집을 나왔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목하니 노릇, 즉 밥 짓고 땔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하면서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오세암 생활은 갑갑하기만 했다. 게다가 서양문물을 직접 견문하고 싶은 욕구도 생겨났다. 그는 금강경과 목탁을 담은 걸망 하나를 메고 길을 나섰다.

일단 원산에서 배를 타고 연해주로 향했다. 러시아를 둘러보고 만주로 여행을 하던 도중에 불의의 변을 당하였다. 그의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독립군들이 그를 친일단체 일진회 첩자로 알고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이 명중하지 않아 목숨은 건졌다. 첫머리에서 이관구가 말한 '볼에 파인 총탄의 흔적'은 이때 입은 상처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고개가 비뚤어지고 체머리, 즉 머리를 흔드는 요두증(搖頭症)을 앓게 되었다. 그는 두만강을 건너 안변의 석왕사에서 잠시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그의 부친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김연곡(金連谷) 선사를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이후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7년 그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구문물이 범람해 있었다. 1908년 4월 그는 조동종 대학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무렵 메이지 대학에 황실유학생으로 유학을 와 있던 최린(崔麟)을 알게 돼 교제하기 시작했다.

32세 때인 1910년 그는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이는 당시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랄 수 있는데 그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건의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를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면서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맞서 그는 박한영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조선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하고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1913년 5월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책으로 펴내 본격적으로 불교계 혁신운동에 나섰다. 이 책을 통해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 근대화를 주창하였다. 그는 "유신이란 무엇이냐 파괴의 아들이요, 파괴란 무엇이냐 유신의 어머니다. 천하에 어미 없는 아들은 없다고 말은 하되 파괴가 없이 유신이 없다는 것은 흔히 모르고 있다"며 조선불교가 유신(維新)하려면 파괴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불교가 고루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개방된 대중화를 통하여 새 시대에 맞는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1914년 4월에는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간행하고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대전>은 일반인들이 불교경전을 알기 쉽게 풀어 쓴 해설서로 불교 대중화를 위해 쓴 것이다. 이듬해부터 그는 영호남의 주요 사찰들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었다. 순례의 주목적은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10월 그는 조선 선종(禪宗)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했으며, 1917년 4월 <채근담 주해(菜根譚 註解)>를 동양서원에서 출간했다.

'독립청원서'가 아닌 '독립선언서'... 공약 3장 추가

40세가 되던 1918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였다. 당시 출판법에 따르면 잡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종교·학술·문예 분야로 국한돼 있었다. 이 때문에 <유심>은 외형상 불교잡지 형태를 띠었으나 실상은 청년계몽운동을 위주로 다룬 시사종합지에 가까웠다. 그는 서울 계동 43번지에 셋방을 얻어 잡지사 간판을 걸고 혼자서 이 잡지를 만들었다. 비록 3호로 종간되었지만 국내 최초의 문예지 <창조(創造)>(1919. 2)보다도 앞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그 무렵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은 국내 민족진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부터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거사계획이 추진되었다. 한용운은 1919년 2월 말 천도교의 최린과 만나 3.1독립운동 거사계획을 듣고는 즉석에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최린과는 일본에서 인연을 맺어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후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영호남의 사찰에 긴급히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선승이라는 특수신분과 지방의 깊은 산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과의 교통 및 연락 지연 등으로 애로를 겪었다. 결국 연락이 손쉬운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상규) 혼자 서명을 받아냈다. 33인 가운데 불교계 인사는 2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참가로 3.1혁명은 종교계 연합전선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작성 등 3.1거사 초기 단계에서부터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3.1거사에는 서명 등 직접 참여하지는 않겠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 기초를 맡기는 것 자체를 반대하면서 자신이 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국 최남선이 선언서를 쓰게 됐다. 그런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의 명칭을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나서서 '독립선언서'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초고를 써오자 그는 여기에 몇 자 가필을 하고는 '공약 3장'을 추가하였다. 최남선이 쓴 선언서는 손병희의 비폭력 의지가 반영돼 문투가 온건한 편이다. 반면 '공약 3장'은 실천적이며 독립 의지가 뚜렷하게 담겨 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공약 3장 제2항은 나중에 33인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큰 논란이 됐으며 '내란죄' 죄목이 되기도 했다. 선언서 본문보다도 오히려 공약 3장의 파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밤, 그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다. 그는 계동의 자택으로 학생들을 긴급히 소집하였다. 잡지 <유심>을 만들던 곳이기도 한 그의 자택은 3.1거사를 전후한 시기에 그를 따르던 불교계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불교중앙학림(혜화전문학교 전신, 현 동국대)에 다니던 백성욱, 김대용, 오택언, 김봉신, 김법린 등으로 이들은 소위 '유심회' 회원들이었다. 한용운은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각 지역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도 불교계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일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수많은 승려와 신도,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행사 후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서울시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또 각 지방을 담당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 지방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 범어사를 비롯해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 등 주요사찰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동래 일원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가장 규모가 컸다. 이처럼 한용운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을 통해 3.1혁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원래 계획은 한용운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돼 있었다. 2월 26일 최린은 한용운에게 독립선언서 낭독을 의뢰했고, 한용운은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2월 28일 밤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모임을 하던 자리에서 종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학생과 민중들 다수가 집회하게 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빌미로 군경이 탄압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한용운의 인사말 겸 격려사가 끝나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다함께 독립만세 삼창을 했다. 곧이어 인근 종로경찰서에서 나온 일경이 들이닥쳤다. 일행은 손병희를 필두로 다섯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1년 반에 걸쳐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서대문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나중에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됐다.
 

한용운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그의 옥중투쟁은 치열하고 또 유별났다. 수감 초창기에 일제가 33인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죄를 적용해 중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을 듣고 33인 가운데 몇몇 사람이 겁을 먹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그는 "독립운동을 하고도 살 줄 알았더냐, 당장 민족대표를 취소해 버려라"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그는 수감시절 '옥중투쟁 3대 원칙'을 정해 놓고 있었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그는 옥중에서도 꿋꿋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장과의 일문일답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목적은.
답: 조선 전반에 독립한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다.
문: 이런 선언서를 배포하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답: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고 인민은 장차 독립국 국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용운은 옥중에서 종일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 참선에 열중했다. 노역으로는 최남선, 최린 등과 함께 모자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더러 이웃 방의 동지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당시에도 감옥에 통방(通房)이라는 것이 있어서 격리된 죄수들끼리 감옥 창살 밖으로 큰 소리를 내 서로 대화를 하곤 했다. 물론 이는 감옥 규정상 금지된 것이었다. 한번은 한용운이 옆방의 최린과 통방을 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호된 벌을 받았다. 이때 그가 읊은 즉흥시 한 토막이 전해오고 있다.

하루는 이웃방과 더불어 통화하다가
간수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네
손으로 두들겨 맞으니
잠시 동안 입을 벌릴 수가 없더라


1919년 7월 10일 열린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일본인 검사가 그에게 "독립을 선언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으니 글로 적어 주겠노라"며 옥중에서 참고자료 하나 없이 머리로만 이 글을 썼다.

무려 8천여 자(200자 원고지 60매 분량)에 달하는 분량인데 구성은 1) 개론 2)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 3)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 4)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하여 5) 조선독립의 자신(自信)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말이 답변서이지 또 하나의 독립선언서요, 논리 정연한 논문과도 같다. 소위 '조선독립의 서(書)'로 불리는 이 글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사해(死骸·송장)와 같고 평화가 없는 자는 다시없는 고통이다. 압박을 받는 자의 주위는 무덤과 다름없고 쟁분(爭奮)을 일삼는 자의 환경은 지옥이 되나니 우주의 이상적 가장 행복한 실재(實在)는 자유와 평화다. 그렇기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기고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태(甘飴)처럼 맛보나 이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일지로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독립의 이유와 필요성을 원초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폭력과 기만으로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였다고 규탄하면서 조선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외세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민족진영 일각의 실력양성론이나 외교론 등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조선민족이 독립정신만 있으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글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불후의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글은 그를 옥바라지 하던 상좌 춘성스님을 통해 비밀리에 해외로 빠져나가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제25호(1919.11.4.)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大要)'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관구의 증언(동아일보, 1976.3.3.)에 따르면, 이것 말고도 부본(副本)이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그가 얇은 미농지에 깨알같이 써서 이를 노로 꼬아 헌옷 갈피 속에 끼워 집으로 보냈는데 그의 사후에 자택 문갑 속에서 노뭉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용운의 출옥소감(동아일보, 1921.12.24.)

 
한용운은 만기출옥을 3개월 정도 남겨두고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했다. 이날 경성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은 총 7명인데 그는 이날 오후 3시 반에 제일 늦게 감옥을 나왔다.

출옥소감을 들으러 이틀 뒤에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그는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라며 "경전으로는 여러 번 그런 말을 보았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인데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속에서도 쾌락으로 지냈다"고 말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민족진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4년 1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총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는 불교계의 유신과 함께 총독부에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면서 사찰령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27년 2월 국내의 민족진영이 좌우합작으로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에는 경성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경성지회에는 천도교청년동맹을 비롯해 기독교청년회, 물산장려회, 화요회, 조선민흥회 및 청년·노동·농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의거와 관련돼 허헌, 김병로 등과 함께 구속됐다가 이듬해 초에 풀려났다. 또 일간지에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 최범술, 김상호 등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만당은 경남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일원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1938년 말 일경에게 조직이 발각돼 서울, 사천, 진주, 해남,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선풍 끝에 와해되었다. 그는 또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일간신문 발행을 구상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님의 침묵' 쓴 시인... 변절자는 '죽은 사람' 취급

한용운을 규정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시인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6년 그는 자작시 88편을 묶어 첫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펴냈다. 비록 시에서 '님'은 떠나고 없지만 그 '님'을 기다리고 또 반드시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언젠가는 해방의 기쁨이 올 것을 암묵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그의 '님' 속에는 칼보다 강한 저항정신이 숨겨져 있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자였다.

시인 조지훈은 한용운을 두고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요, 애국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라고 상찬했다. 또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으며, 벽초 홍명희는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언젠가 잡지 <불교>에서 조선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이 누구냐를 두고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한용운이 422표로 1등, 차점은 18표를 얻은 방한암이었다. 당시 조선불교계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부인 유숙원(동아일보, 1962.7.20.) (동아일보)

 
'승려 한용운'을 거론하자면 '대처승 논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를 부르짖었다. 그는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며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결혼생활이나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일병탄 직후 조선총독부에 다시 탄원서를 냈으나 이 역시 묵살됐다. 53세가 된 1931년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간호사 출신의 유숙원(兪淑元·1965년 작고)과 재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평소 그는 의리를 중시하였고 교우관계에서는 호불호를 명확히 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일제에 체포돼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옥사(1937.3.3.)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눈이 무서워 그 시신을 수습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한용운이 나서서 감옥에 방치된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하여 심우장 자기 방에다 모셔 놓고 5일장을 지냈다. 화장도 일본인 소유의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조선인이 운영하던 미아리의 한 조그만 화장터를 택했다. 영결식에서 만해는 방성대곡을 했는데 그가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 한번이었다고 한다.

반면 변절자 육당 최남선(崔南善)에 대해서는 산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며 안면몰수를 하였다. 어느 날 육당이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육당을 보고도 못 본 체 피해버렸다. 육당이 따라와 길을 막고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가 "당신 누구시오?"라고 묻자 육당이 "저 육당 아닙니까?"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또 한 번 "육당이 누구시오?"라고 되묻고는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육당이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위당 정인보는 육당의 집 앞에서 "이제 우리 육당이 죽었다"며 곡을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는 재혼한 유숙원과의 사이에 딸(한영숙)을 하나 두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류상으로는 한용운과 남남이었다. 유숙원은 혼인 후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딸 영숙은 아예 호적조차 없었다. 그는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가족들도 호적을 만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배급도 받지 못했으며 딸은 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결국 딸은 그가 집에서 직접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말년에 어렵게 생활했는데 부인의 삯바느질과 그의 원고료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총독부가 보기 싫다며 심우장(尋牛壯)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총동원 체제 하에서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친일로 변절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그는 1940년 2월의 창씨개명 실시, 1943년 말부터 시작된 조선인 학병 출정을 적극 반대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지조를 지키기도 쉽지 않았거니와 총독부 정책에 반대하고 나서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한용운의 묘소(서울 망우리, 우측은 부인 유숙원 묘소) ⓒ 오마이뉴스

 
허약체질에다 평소 중풍을 앓고 있던 그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뇌출혈로 입적하였다. 우리나이로 66세였다. 유해는 미아리에서 화장돼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5년 7월 유숙원이 사망하자 그의 옆에 묻혔다. 대개의 경우 부인은 남편 왼쪽에 묻히는 게 보통이나 유숙원은 그의 오른쪽에 묻혔다. 1982년 3월 1일 만해사상연구회에서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의 글씨는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그의 사후에 각계에서 다양한 기념·추모 사업을 전개하였다. 1967년 탑골공원에 동상 건립을 시작으로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 전집>(전6권)이 간행되었다. 197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만해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만해상을 제정해 1997년 1월에 첫 시상식을 가졌다. 고향 충남 홍성에 생가가 복원되고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1992년에는 만해학회가 출범하였다. 또 홍성과 부산, 백담사에 시비가 각각 세워졌으며, 1996년 7월에는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이 프랑스판으로 출간되었다. 1997년 11월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한용운, <한용운전집(全集)>(전6권), 신구문화사, 1973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한용운 편', 1994.3
- 만해사상연구회, <한용운 사상 연구> 1·2, 민족사, 1980
- 김삼웅, <만해 한용운 평전>, 시대의창, 2006
- 김광식, <만해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1
- 강미자, '한용운의 불교개혁운동과 민족주의운동', 경성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2
- 김영식,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 <신동아>, 2008.9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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