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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4일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해괴망칙하고 시대착오적 판결이다. 8년 전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13년 2월 14일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해괴망칙하고 시대착오적 판결이다. 8년 전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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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년 전 오늘

2013년 2월 14일은 고(故) 노회찬 의원이 '삼성 엑스(X)파일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날이다.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던 필자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다.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풍찬노숙이 아니었던 적이 없지만, 특히 삼성 엑스파일 사건은 정치인 노회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중대 사건이었다.

그가 2004년 17대 국회의원이 된 후 겨우 1년이 지난 2005년 8월 사건이 시작돼 2012년 19대 노원병에서 재선됐지만,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다시 2016년 20대 총선 당시 창원성산에서 당선해 2018년 여름 운명할 때까지 노회찬의 정치인생 14년 전 기간에 걸쳐 이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은 두 가지 사건을 포함한다. 

하나의 사건은 1997년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나 그해 있는 15대 대선의 여야 후보자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정기적·계속적으로 검사들에게 금품을 제공하며, 삼성 그룹과 관련이 있는 국회의원의 자리를 챙기는 것에 대해 나눈 대화들을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불법 도청한 사건이다. 삼성, 중앙일보, 유력 대선후보, 최고위급 검찰 간부의 유착 관계와 불법 정치자금, 뇌물 공여, 정보기관의 일상적 불법 도청 문제가 드러난 사건이다.

다른 사건은 MBC 이상호 기자 등이 2005년 7월 도청 테이프 내용을 보도하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노회찬이 2005년 8월 18일 삼성이 정기적으로 금품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최고위급 검찰간부 7명의 실명과 도청 테이프 녹취록을 공개한 사건이다.
 
2005년 8월 18일 'X-파일` 녹취록 내용 중 삼성으로부터 소위 '떡값'을 받았던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2005년 8월 18일 "X-파일` 녹취록 내용 중 삼성으로부터 소위 "떡값"을 받았던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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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엑스파일 사건이 보도된 후 도청 테이프에 담긴 범죄 사실을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검찰은 그에 대한 수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노회찬은 2005년 8월 18일 법사위 회의에서 전·현직 최고위급 간부검사들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구체적 내용을 공개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수사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화 내용 속에 등장하는 최고위급 검사 7인의 명단을 공개하게 된 이유다.

이후 노회찬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자신의 형사사건 항소심에서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파일의 내용을 제시하면서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것은 법사위원으로서 국회의원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오히려 몰랐다면 모르되, 알면서도 입을 닫고 있었다면 역사의 심판대에서 유죄를 선고받아야 한다."

그후에도 "삼성을 필두로 정치권과 언론계, 검찰의 검은 유착관계를 파악하고서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국회의원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술회했다(노회찬, <노회찬과 삼성 X파일>, 이매진, 2012, 35쪽).

노회찬은 그렇게 거대 권력, 권력의 카르텔을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이 확정돼 19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됐다. 하지만 노회찬은 국회를 떠나면서도 자신의 소신이 옳음을 강조했다.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정의란 무엇인가 : 국회를 떠나며>

2. 거대 권력과 싸웠던 노회찬
 
2004년 4월 16일 총선 전날(4월 15일),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개표방송을 보고 있는 모습.
 2004년 4월 16일 총선 전날(4월 15일),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개표방송을 보고 있는 모습.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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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을 포함해 진보정당 소속 국회의원 10명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던 시기 민주노동당은 '거대한 소수전략'을 채택했다. 국회의원 10명뿐이지만, 대중에 기초해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생각해 보면, 노회찬의 정치적 삶이 그와 같았다. 노회찬은 정치인으로 활동한 전 기간에 걸쳐 비록 소수 진보정당 의원이었지만, 항상 뒤에 있는 비정규직·서민·투명인간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다.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퇴행적 기득권 세력, 권력의 검은 카르텔에 맞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자 했다.

경제권력(삼성) - 언론권력(중앙일보) - 정치권력(대선후보) - 검찰권력(검찰)의 유착·공모·거래라는 부정과 불법의 거대 카르텔과 싸웠던 삼성 엑스파일 사건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다른 사례로는 진보정당의 국회 진출을 실현하고, 선거제도 및 국회 기득권 폐지를 위해 싸워 왔던 것을 들 수 있다. 노회찬은 노동자 중심의 대중적·합법적 진보정당 노선을 취했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서 활동한 후 1990년대 내내 계속 실패하고 많은 동지들이 떠나갈 때에도 끝까지 대중적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 현장을 지켰다. 그와 관련해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7쪽).

노회찬은 결국 노동자 대중조직도 참여시키고, 생각이 달랐던 운동권 정파 사람들도 합류시켜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한국전쟁 후 50년 이상 지속되던 보수 양당의 정치 질서를 깨뜨리고, 기존과 다른 정치적 목소리를 국회의사당에 울리게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1961년 5.16 쿠데타로 한국정치 전면에 등장한 후 장장 43년을 정치일선에서 활동했던 김종필의 10선 당선을 좌절시키고, 정계 은퇴를 이끌어낸 것은 부수적인 성과였다.

그런데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배경에는 오랫동안 부당한 선거제도와 싸워 왔던 노회찬의 활약과 노력이 있었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였던 1993년부터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에게 1인 1표만을 행사하고, 정당은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원(비례대표 의원)을 배분받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 전경.
 국회의사당 전경.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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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1인 1표제로 과도한 이익을 챙겼던 정치세력은 모든 지역구에 후보자를 낼 수 있고, 1~2위의 지지율을 다퉜던 기존 거대 정당들이었다. 노회찬은 처음 헌법소원이 각하되자 다시 2000년 2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2001년 7월 1인 1표제에 한정 위헌 결정을 했고, 그 결과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1인 2표제가 도입됐다.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그는 1인 2표제 도입에서 멈추지 않았다. 노회찬은 2018년 2월 6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라고 말했고, 평소에도 "시민의 삶을 바꾸지 못하는 국회를 가로막고 있는 선거제도만 바꿀 수 있다면 나는 평생 국회의원을 안 해도 좋다, 국회에서 물구나무라도 서겠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기존 정당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선거제도를 개혁해 유권자 목소리와 다양한 정치적 의사가 그대로 반영되는 선거제도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이와 같은 목표를 위해서 '정치적 현실주의자'라는 평가처럼, 마지막에는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한 후 교섭단체 원내대표직을 맡기까지 했다.

한편, 국민들이 기억하는 정치인 노회찬의 마지막 모습은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원내대표로 수령한 특수활동비를 반납하면서 특수활동비 폐지와 국회의 특권 내려놓기를 주장해, 국회 내의 담합된 부당한 관행에 도전하던 모습이다.

기득권 세력, 거대 권력에 맞섰던 또 다른 사례로는 사법개혁과 관련된 의정활동을 들 수 있다. 노회찬은 국회 법사위 소속 위원으로 의정활동의 전 기간에 걸쳐 검찰 개혁과 법원 개혁에 앞장섰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법 발의, 사법농단 사태 수사의 단초가 됐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한 진상조사 촉구, 사법농단 수사 촉구,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과 법원행정처 개혁방안 모색 등의 활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지부진한 사법개혁의 현실을 볼 때마다 그의 죽음이 아쉽다. 

3. 박용진처럼, 소수야당처럼, 이탄희처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은 2018년 11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건과 관련해 금융위에 안진회계법인의 2015년 작성한 가치평가 보고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
▲ 박용진 "안진회계법인 보고서 즉각 공개하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은 2018년 11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건과 관련해 금융위에 안진회계법인의 2015년 작성한 가치평가 보고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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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엑스파일 사건의 변호인이었고, 1인 1표 선거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을 대리하는 등 노회찬을 법률적으로 조력했고,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설립에 관여했던 관계로 필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노회찬 의원이 살아계셨으면'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주로 오래된 기득권 세력, 거대 권력과 관련된 사안과 관련해서 그렇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인다. 당분간은, 아니 영원히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회찬 자신은 '노회찬 의원님이 살아있다면'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이 평생에 걸쳐 맞서왔던 기득권 세력,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누군가는 대신해 줄 것을 원할 듯하다.

민주노동당에서 같은 당원으로 함께했던 박용진 의원(비록 민주당 소속이지만)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립유치원의 비리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대 권력, 기득권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과도 연관된 문제지만, 지지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가는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유지하고자 선거법 개정에 사실상 파업하거나 태업하고 있는 거대 양당에 항의하며 국민의 지지의사와 다양한 목소리가 그대로 반영되는 선거법 개정을 위해 소수 정당들이 연대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이 됐지만, '동료판사들의 뒷조사 파일을 관리하라'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며 사직서를 제출해 결국 사법농단 사태가 드러나게 된 단초를 제공한 이탄희 판사처럼. 

4.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이 24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500여 석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린 가운데,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사진은 축하공연으로 올라온 <작은 뮤지컬 6411>의 장면이다.
▲ 노회찬과 함께 꿈꾸는 사람들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이 24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500여 석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린 가운데,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사진은 축하공연으로 올라온 <작은 뮤지컬 6411>의 장면이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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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삼성 엑스파일 사건 과정에서 거대 카르텔과의 싸움을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싸움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정의의 골리앗, 정치적 거인이었음을 증명했다. 

이제 누군가가 노회찬의 뒤를 이어서 거대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노회찬처럼 정치적 거인으로 성장해 나갔으면 한다. 필자가 설립에 참여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도 거대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하면서, 노회찬을 이을 정치 신인, 정치 거인의 탄생에 도움을 주는 자리에 계속 서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는 노회찬의 유지이자 '노회찬의 꿈'이므로.

태그:#노회찬, #삼성 엑스파일 사건, #국회의원직 상실, #기득권 세력, #거대 권력의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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