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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독립투사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권고한 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1898~1958)은 21세 때부터 무장투쟁 방식의 항일운동에서 두각을 보였다. 1919년에 그가 조직한 의열단이 이 활동의 중심이 됐다. 그의 투쟁을 지원하고자 의열단 선언문을 써준 사람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관점에서 <조선상고사>를 서술한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1880~1936)다.

김원봉이 지휘한 의열단은 일왕 궁궐과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 등에 대한 폭탄 공격을 전개했다. 그가 일본제국주의에 얼마나 위협이 됐는지에 관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이렇게 서술한다.
 
"일제에게 의열단의 존재는 끔찍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 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기는 친일파와 악질 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열단장 외에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광복군 부사령관 등을 지낸 김원봉은 1945년 해방 뒤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에 맞서 분단 반대투쟁을 벌였다.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체류했다. 그 뒤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58년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 패해 숙청 당하고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
 김원봉.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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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7일 성명을 내어 "보훈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라"면서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은 국가유공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원봉 서훈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자유한국당에서도 같은 입장을 밝히는 의원들이 나왔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북한 정권 출범 공신에게 서훈하겠다는 것은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며 "보훈은 근본적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는 것으로 현대사 인물을 섣불리 평가하는 일은 국민 속에서도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됐나

일본의 조선 강점은 선진 자본주의 진영의 세계 침략에 편승해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독립투사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꼭 공산주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적에 대항할 이념적 무장을 갖추고자 그랬던 측면이 좀 더 컸다.

또 독립투쟁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주로 전개됐다. 국내에서는 제약이 많으므로 무장투쟁을 하자면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러시아 역시 일본과 대립했으니, 그곳 공산당과 협조하는 독립투사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보훈처가 선정한 독립유공자 중에 공산주의자가 적지 않은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또 1945년 해방 뒤에 이승만과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북한도 결과적으로는 단독정부를 세웠고, 민족분단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김구·김규식과 김일성·김두봉의 남북협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남북분단에 대한 책임에서 이승만 정권과 북한 정권은 어느 정도 차별성을 보였다.

이 시기에 분단을 반대하는 독립투사들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미움을 샀다. 백범 김구나 몽양 여운형도 그랬다.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분단을 받아들이고 남한에 남거나, 분단을 거부하고 남한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남한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월북을 택한 독립투사들은 고향 땅에서 잊히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고향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서도 지워져야 했다.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한 벽초 홍명희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벽초 홍명희의 경우
 
 홍명희. 1948년 평양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를 낭독하는 모습.
 홍명희. 1948년 평양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를 낭독하는 모습.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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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꺽정>으로 더 유명한 홍명희의 생업은 언론인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 사장을 역임했다. 본업은 독립운동이었다. 서울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이 2017년 12월 7일 개최한 '민주공화정 100주년 심포지엄'에서 최형익 한신대 교수는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두고 "일제 치하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했던 최대 좌우익 정치연합 운동체"라고 평가한 뒤 이렇게 말했다. 발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간회 창립의 산파는 물론 실질적 지도자가 홍명회였음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을 포함하여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야 신간회 활동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고도 남을 뿐만 아니라 일제 고등경찰의 최대 요시찰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긴장과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신간회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거론되는 일제강점기의 최대 좌우합작 단체다. 부회장을 지내며 이 단체를 이끈 홍명희는 이로 인해 옥고도 치렀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남한에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있지도 않다. 그도 김구·김규식·김원봉과 함께 남북협상을 하러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등을 지냈다.

우리 남한 사람들 중에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미군정 지배가 부득이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김원봉이나 홍명희 같은 인물들을 제외한 상태에서 독립운동사를 구성하다 보니, '2%' 부족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염라대왕 같던 독립투사, 일제의 최대 요시찰 대상이었던 독립투사 등을 제외했으니 이런 결과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우리 남한 사람들 중에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에서는 무장투쟁이 약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해방 뒤에 북한 정권에 참여한 상당수는 그 직전까지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이들이다. 이들을 다 제외한 상태에서 독립운동사를 구성하다 보니, 남한 사람들한테는 독립운동이 활기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원봉이나 홍명희 같은 인물들이 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은 게 오로지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경력 때문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보훈처는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정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 송강호와 공유가 주연한 영화 <밀정>에서 공유가 연기한 김시현은 의열단원이 돼 전국적 대규모 항쟁을 준비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네 차례나 수감됐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김시현이 월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김시현의 경우
 
 영화 <밀정>.
 영화 <밀정>.
ⓒ 영화사 그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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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 그는 경북 안동에서 두 번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그가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최대 이유는 이승만 암살 시도의 배후라는 점에 있다. 암살에 직접 나선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자금책을 담당했던 유시태(안동 출신)다. 암살 실패 뒤 김시현과 유시태는 무기징역을 살다가 1960년 4.19 항쟁 뒤 석방됐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김원봉·홍명희처럼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김시현·유시태처럼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지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승만 정권과 대립했거나 이들의 미움을 샀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김구나 여운형처럼 이승만의 미움을 사고도 국민적 존경을 받거나 남한 내 입지를 유지할 만한 입장이 아니어서,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사에서 지워버려도 괜찮았다는 점이 이들의 진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보훈처는 '북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닐 수도 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독립운동사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이 아니라 이승만 때문에 지워졌다?

만약 이승만 정권이 사용했던 잣대를 버리고 독립운동사를 있는 그대로 측정한다면,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친북이나 공산주의 이념에 있는 게 아니라 반(反)이승만 활동에 있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이승만식의 역사인식을 폐기하고 모든 독립투사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독립운동사를 새롭게 구성한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으며 활력도 없지 않았다는 점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도 일제를 위협할 정도로, 또 무장투쟁을 통해서도 전개됐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보훈은 근본적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는 것"이라며 김원봉 같은 이들에 대한 서훈을 반대했다. 나 원내대표는 "현대사 인물을 섣불리 평가하는 일은 국민 속에서도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원봉이나 홍명희 같은 인물들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다. 공을 세워도 이만저만한 공을 세운 이들이 아니다. 후손인 우리가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을 정도의 공적을 그들은 남기고 떠났다. 그들의 공로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섣부른 평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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