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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8일 11시,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중앙네거리에서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복장을 한 남녀 참가자가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지난 2월 8일 11시,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중앙네거리에서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복장을 한 남녀 참가자가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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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은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밑불이 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100돌이었다. 이날 11시에는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100돌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일본에는 국가보훈처장과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등이, 국내 기념식에는 국회의장과 주요 정당 대표 등이 대거 참석해 이 100돌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젊은 유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투지와 의기를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들의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면서 거기 이름을 올린 열한 분 실행위원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서 베풀어진 '2.8 100주년 기념식'

같은 날 같은 시간,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중앙네거리에서도 같은 형식으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대회'가 베풀어졌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고령군협의회(회장 정석원)와 이날 출범한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정희철)가 공동 주최한 이 행사는 결의문 낭독과 만세삼창으로 마감한 뒤 농악대의 선도로 읍내를 시가행진하는 것으로 종료됐다. 

기습 한파에 영하로 떨어진 날씨였지만 지역 주민 200여 명을 행사장으로 불러낸 것은 애국선열의 뜨거운 실천과 투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별히 이날 출범을 알린 '기념사업회'의 주인공인 김상덕 선생은 문재인 대통령이 기억하겠다는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 실행위원' 중 한 분이었다. 

김상덕(1891~1956)은 1891년 고령군 고령읍(현 대가야읍) 저전리 낫질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서울의 경신중학교에 입학한 게 스물두 살 때다. 그가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게 이 시기다. 4년 뒤 학교를 졸업하고 부모가 짝지어 준 합천 출신 강태정과 혼인한 그는 경신학교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을 떠나 세이토쿠(正則)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경영학부에 진학했다. 

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의 11명 실행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각종 웅변대회의 연사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일경에 체포된 그는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이종근, 송계백과 함께 7개월 15일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날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 2백여 명이 참여하여 2.8독립선언과 김상덕 선생의 충혼을 기렸다.
 이날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 2백여 명이 참여하여 2.8독립선언과 김상덕 선생의 충혼을 기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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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간 김상덕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스물아홉이었다. 그는 의정원의원의 자격으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56명의 한국 대표 중 일원으로, 대회 중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21명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운동 계속

극동민족대회는 소련을 배제한 가운데 중국 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열강 간 이해관계를 재조정하는 미국이 주도하여 연 워싱턴회의(1921)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워싱턴회의에 대응하여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이 국제회의를 조직한 것이었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계급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의 계급 운동은 시기상조라는 것, 민족운동에 대중이 동참하고 있으므로 계급 운동은 민족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임정이 실제 역량보다 명칭이 과하므로 조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결의하였다. 
 
 김상덕 선생.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부장을 지내다 귀국했다.
 김상덕 선생.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부장을 지내다 귀국했다.
ⓒ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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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에게 이 국제회의 참가한 경험과 견문은 이후 활동의 좌표를 정하는 데에 정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특히 홍범도(1868~1943), 김승학(1881~1965), 여운형(1886~1947), 김규식(1882~1931)과 같은 쟁쟁한 지도자들과 동참함으로써 인간 관계망을 확대하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1922년 3월 상하이로 돌아온 김상덕은 수립 3년 만에 조직 개편의 필요성이 대두된 임시정부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회의는 임정 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차이가 선명해지면서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화되었다. 김상덕은 임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에 서 있었으나 회의는 끝내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좌절하자, 김상덕은 1924년 봄 중국 지린성(吉林省)으로 옮겨가, 일제강점기 평양지방법원 판사를 지냈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가 되는 김응섭(1877~ ? )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였다. 

한족노동당은 친일세력을 뺀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균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선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령을 내건 민중 지향적 진보 조직이었다. 김상덕은 1928년 2월 김동삼(1878~1937)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책임 비서를 맡았다. 

민족유일당, 민족혁명당 등 항일 협동전선 구축에 이바지

한편 김상덕은 1927년 9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남만주지역의 당 조직부장이면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는 만주와 중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김상덕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5월, 마침내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가 열렸으나 내부의 입장 차에 따른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이 운동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이 결렬된 후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김상덕은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당이 편성한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약했다. 그러나 북만주에서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는 중국인 무장부대와 원만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자 1933년 2월 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1885~1967)과 함께 난징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인 '한중연합토일군(討日軍)'의 조직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했다. 

그러나 이 교섭의 결과는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무렵 한국독립군은 사실상 와해 상태였고, 중국국민당 정부로서도 통제권이 미치지 못하는 북만주 중국인 무장부대를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칭의 임정요인들(1945). 뒷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상덕, 최동오, 유림, 엄항섭, 앞줄 왼쪽부터  이시영, 김구, 유동열, 황학수
 충칭의 임정요인들(1945). 뒷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상덕, 최동오, 유림, 엄항섭, 앞줄 왼쪽부터 이시영, 김구, 유동열, 황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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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김상덕은 1934년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한 신한독립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2년에 중국 내 민족운동가들은 1920년대 후반의 협동전선 운동인 민족유일당을 잇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아래 동맹)을 결성하여 대일통일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동맹은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중국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대한인교민단 등이 참여해 결성되었다. 동맹은 가맹단체들이 노선상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강력한 항일전선을 형성하고 협동전선을 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충칭 임정에서 학무부장에 취임, 국무위원 활동

김상덕은 1936년 민족혁명당의 17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지만, 당은 이내 분열로 치달았다. 먼저 상해의 한국독립당 세력이, 이어서 김상덕과 함께 만주에서 난징으로 왔던 홍진(1877~1946)도 이탈하였다. 1937년 4월에는 지청천(1888~1957)이 이끄는 조선혁명당 세력도 당을 떠났다. 

김상덕은 한때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에 적을 두었고 한국독립군에서 지청천과 함께 활동한 바 있었지만, 이들의 이탈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주도권보다 명분을 우위에 두고 단일 세력의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했던 듯하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민족혁명당은 난징에서 우한(武漢)으로, 다시 구이린(桂林)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이동했다. 조직을 따라 움직이는 과정에서 김상덕은 갓난아기인 막내딸을 여의었고, 충칭에 도착해서는 부인을 잃었다. 

중일전쟁 이후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1939)한 뒤, 1940년대 들어 세계정세의 변화가 감지되면서 중국 내에서의 민족운동의 흐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41년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임정 참여를 결정한 것도 그 변화의 일부였다. 

김상덕은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대표로 당선하여 1942년 10월부터 의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정호(1913~1990), 김원봉(1898~1958)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고 미국·소련·영국 등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추진하고자 '외교대표파견안'을 제안하였다. 

또, 1943년 4월에 김상덕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임명에 따라 김규식 선전부장을 비롯한 15명으로 구성된 선전부 선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3년 5월에는 학무부 차장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3월부터는 학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진 귀국(1945.11.23.) 뒷줄 왼쪽부터 다섯 번째가 김상덕 선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진 귀국(1945.11.23.) 뒷줄 왼쪽부터 다섯 번째가 김상덕 선생이다.
ⓒ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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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과 12월, 두 차례로 나누어 귀국했다.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수십 년을 헌신하며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요인들의 귀국길은 그야말로 역사적 환국이었다. 김상덕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을 비롯한 15명의 제1진과 함께 귀국하여 백범과 같이 서대문 경교장에 여장을 풀었다. 

제헌의원,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약하다 납북

김상덕은 1946년 미 군정이 조직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에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6·25전쟁 때 납북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948년 고향인 고령에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헌의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여 1948년 9월 22일에 공포하였고, 이 법에 따라 한 달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각 도에서 1명씩 호선된 10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설치되었는데, 경북의 김상덕과 서울이 김상돈이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월부터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6월 6일) 후 특위의 활동 시한을 8월 말까지로 규정한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7월 6일)되면서 이튿날 사임 연설을 하고 일괄 사표를 냈으니 실제로 김상덕의 반민특위 활동은 불과 6개월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력에서 이 반민특위 위원장직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국회의원 가운데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굳게 지키고 애국의 성심을 가진 자.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라는 특별조사위원의 자격에 부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쉰여덟 살, 해방 후 조국의 과제로 떠오른 '자주적인 통일 정부의 수립'과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자인 친일파 청산'을 책임질 적임자였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작업은 애당초 친일청산 의지가 없었던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친일경찰의 폭력으로 좌초해 버렸다. 

이듬해 5·30총선에서 김상덕은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경북 고령에 출마했으나 정권의 탄압과 친일세력의 테러 위협으로 정상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여 낙선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월 하순께 그는 반민특위 관사 앞에서 북한군에게 납북되었다. 
 
 기념식 끝에 참가자들은 만세삼창으로 행사를 마쳤다.
 기념식 끝에 참가자들은 만세삼창으로 행사를 마쳤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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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은 1956년 4월 28일 평양에서 세상을 떠나 평양 삼석구역 특별묘역에 안장되었다. 향년 65세. 그는 한동안 '월북 좌익'으로 몰렸고, 유족들은 연좌제라는 올가미에 걸려 힘들게 살아야 했다. 김상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것은 1990년이고, 납북피해자로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때가 2011년이었다. 김상덕의 유해는 2003년, 평양의 재북 인사 묘역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1990년 서훈, 그리고 마침내 뒤늦은 귀향

김상덕의 인생 역정에서 드러나는 "일관된 하나의 행동 양식"을 신주백(연세대 HK 연구교수)은 "민족주의자 가운데 상당히 진보적인 색채를 품었던 활동가"였지만 "민족을 우위에 두고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으로 든다. 그가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에 참여하고 통일정당인 민족혁명당에서 끝까지 활동한 것은 그러한 행동 양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힘들게 민족운동에 종사한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행동이나,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 조직과 심한 갈등"도 없었다고 했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온건하고 원만한 성품"이 항일운동 과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정하고 공평하게 반민특위를 운영할 수 있는 적임자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는 짓궂어 그와 우리 민족에게서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강고한 독립투사였지만 온유하고 후덕한 그의 성품은 외아들 정륙이 쓴 '백년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하는 편지글 형식의 역사 칼럼)에서도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아버지! 중경에서 터 잡고 살던 손가화원(孫家花園) 시절, 굶주리고 배고팠던 기억마저 지금은 그립습니다.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면, 저의 손을 잡고서 한 통 가득 빨래를 들고 양자강 가로 가셨지요. 아버지가 빨래하는 사이, 철부지 저는 드넓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그러다 싫증이 나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요. 

빨래를 마치고 힘겨워 허리를 쭉 펴고 있자면, 바구니를 지고 백사장을 오가며 잔술 파는 행상들의 한 잔 술을 간절해 하던 아버지의 눈길을 기억합니다. 한 잔 술마저 망설이는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은 지금도 저의 심사를 저리게 합니다. 큰맘 먹고 병아리 오줌보다 조금 많은 한 잔 술을 사게 되면 목을 젖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려 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술안주 마른 두부는 값만 묻고 말았었죠. 

아버지의 손자 진영에게 일러 제상(祭床)에 반드시 두부 전을 차려 올리게 한 것은 그때 기억 때문입니다. 

   - 김정륙, "반민특위 위원장 전상서"(2010.8.2.)  중에서
 
 고령군 대가야읍 읍내 주산에 1992년 주민들의 울력으로 세워진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사적비'
 고령군 대가야읍 읍내 주산에 1992년 주민들의 울력으로 세워진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사적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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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식 참가자들은 '만세 행진' 펼침막을 앞세우고 대가야읍내를 한 바퀴 돌았다.
 기념식 참가자들은 "만세 행진" 펼침막을 앞세우고 대가야읍내를 한 바퀴 돌았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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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주선으로 북한의 부친 묘역을 찾아 술을 올리면서 정륙의 고단한 삶에 드리웠던 한도 풀렸던가. 1990년 서훈이 이루어지고 이태 뒤에 대가야읍 주산(主山)에 지역민들의 울력으로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사적비'가 세워진 지 27년 만에 그를 기리는 사업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1명 실행위원의 일원으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청년 독립선언'을 선포한 지 100년 만에, 북한에서 영면한 지 63년 만에 그는 마침내 고향 사람들의 기림을 받으며 그리운 옛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읍내 사거리에서 베풀어진 한 시간 남짓한 집회의 마지막 순서로 사람들이 소리 높여 부른 '대한독립 만세' 삼창 소리를 그는 들었을까. 그것은 한 독립운동가가 온몸으로 살아낸 간난의 삶에 대한 헌사이면서 고향의 뒷사람들이 앞 시대의 출향 인사에게 건네는 따뜻한 귀향의 당부였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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