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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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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하였습니다. - 기자 말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 여행을 마음먹었다. 가장 큰 목적은 한라산 설경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적당한 눈, 그리고 파란 하늘이었다. 이를 위해 제주도에서 기약 없이 머물기로 했다.

오는 배편을 예약하지 않고 출발하는 여행은 묘하게 설렜다. 숨막히게 뿌연 먼지는 언제쯤 걷힐 것이며, 나뭇가지는 언제쯤 하얗게 살찌워질 것인가. 이 기다림 속에서 많은 틈새 여정을 짜게 되었다. 제주도 둘레를 세 바퀴 정도 돌면서 여러 해변을 밟고 10여 개의 오름을 올랐다.

언제나처럼 절반의 식사와, 대부분의 잠자리를 야영으로 해결했다. 기약이 없는 여행에 안성맞춤인 방법이다. 숙소를 예약할 필요가 없고, 더 머물고 싶을 때 별 어려움 없이 여정을 연장할 수 있다. 실내 숙박의 안락함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매해 겨울 강원도의 풍경을 취재하기 위해 잠을 청했던 것에 비하면 참 따뜻한 밤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난해보다 더 추울 것이라는 예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라산 산악예보에서조차 최저기온이 영상인 날들이 계속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발 미세먼지는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도의 하늘조차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열흘의 시간이 흐르고 1월 15일, 드디어 원하던 기상 조건이 되었다. 차가운 한파가 서풍을 몰아내며 한반도 전역으로 남하했던 것이다. 각종 날씨기사에는 '차라리 추운 것이 낫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뛸 듯이 반가웠던 것은 바로 눈소식이었다. 중산간 이하에는 전혀 눈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기상청은 16일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약한 눈 예보를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다. 
 
1100도로와 눈세상 (645N)아침 1100도로 주변은 눈세상이었다. 사진을 찍은 곳은 세오름통신소. 눈숲 사이로 얇게 보이는 선이 1100도로이다. ⓒ 안사을

시작부터 아름다운 영실 경로

배낭은 최대한 가볍게 꾸렸다. 중형카메라 두 대가 이미 10킬로그램 가까이 되기 때문이었다. 120규격 필름 15롤을 챙겼다. 612포맷의 파노라마 카메라는 120필름 한 롤로 6컷을 찍을 수 있고, 645포맷의 카메라는 17컷을 찍을 수 있다.

한 롤에 37컷 정도를 찍을 수 있는 일반적인 35mm 카메라에 비하면 유지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다. 하지만 요즘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화질에 어깨를 견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중형필름을 화장지 쓰듯이 할 수밖에 없다. 612포맷의 필름 한 장은 풀프레임 디지털 카메라 센서보다 8배 이상 면적이 넓다. 그만큼 화질이 보장되는 것이다.

영실경로의 매력은 오르자마자 볼 만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15분만 오르면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의 위용을 볼 수 있고 발 끝에 구름이 놓여 있다.
 
첫 번째로 뒤돌아본 풍경 (645N/Portra400)시시각가으로 구름의 모양이 변한다. 멀리 보이는 곳은 서귀포 남쪽 해안이다. ⓒ 안사을
 
오백나한 (645N/Portra400)이 풍경은 마치 오백나한이 서있는 모양 같다고 하여 '오백나한'이라고도 하며 비슷한 의미로 오백장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안사을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SW612/Ektar100)왼편의 병풍바위는 1,200여개의 주상절리로 이루어져있다. ⓒ 안사을

등산로는 병풍바위 위쪽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이지만 '언제 저기까지 가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치가 마음을 사로잡아서 발길을 가볍게 만들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곳들은 남쪽 사면이기 때문에 눈이 쉬이 녹는다. 이 정도의 눈만 보여도 저 곳을 넘어가면 환상적인 상고대가 펼쳐져 있으므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삼각대를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카메라의 특성상 한 번 사진을 찍는 데에 최소한 5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 과정이 절대 귀찮지 않았다. 당장 볼 수 없는 필름의 비밀스러움과 환상적인 경치가 합세하여 촬영자의 손가락을 들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구름의 단면 (645N/Portra400)발 아래로 펼쳐진 흰 구름이 점차 동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안사을
   
영실을 오르는 사람들 (SW612/Pro400H)병풍바위 위쪽으로 연결된 등산로의 모습. 멀리 보이는 작은 산의 능선은 '볼레오름'이다. ⓒ 안사을

계단이 까마득해 보이지만 사실 그리 힘들지 않다. 출발점이 워낙 높고(해발1230m) 탐방로가 편하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오르막은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눈꽃이 화사하게 핀 나무들 사이로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늑한 공간이 나왔다. 까만 현무암 덩어리들이 얼기설기 놓여 있고 파란 하늘 밑에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형적인 제주도의 모습이었다. 눈이 많이 왔더라면 오히려 이런 풍경은 없었을 것이다.
 
현무암과 눈꽃 (645N/Ektar100)간밤에 내린 눈의 양이 적었지만, 암석의 표면이 드러나 있어서 오히려 조화로운 느낌이 든다. ⓒ 안사을

이곳만 지나가면 이제 눈 앞이 뻥 뚫린다. 종상화산으로 우뚝 솟아 있는 백록담의 서남쪽 벽면이 저 멀리 보이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탄성을 자아낸다. 이렇게 평탄한 산세 위에 가파른 봉우리가 솟아 있는 이유는 애초 만들어질 때 용암의 점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순상화산 부분은 묽은 용암이 분출해 만들어진 부분이라 경사가 완만하다. 경사가 가파른, 백록담이 포함되어 있는 정상 부분은 점도가 높은 용암이라, 퍼지기 전에 굳어서 지금도 이렇게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평원과 서벽 (SW612/Pro400H)하얀 눈, 갈색 조릿대, 파란 하늘, 그리고 까만 봉우리. ⓒ 안사을
 
윗세오름으로 가는 길 (SW612/Pro400H)등산로의 오른편으로 이런 풍경이 계속 펼쳐져 있다. ⓒ 안사을

이곳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환상적인 산책로가 계속된다. 이런 길이라면, 이런 경치라면, 몇 시간을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 설 때면 옆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쳐 갔는데, "정말 예쁘다"는 표현이 끊이지 않고 들렸다.

이곳 능선은 거의 남쪽 사면으로 치우쳐 있지만,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르기 800여 미터쯤 전, 북쪽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작은 나무 팻말에는 '전망대'라는 글씨만 써 있지만 이곳은 '윗세족은오름'의 정상이다. '족은'이란 말은 '작은'이라는 뜻이다.

북쪽을 바라보면 바다의 곶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만세동산'이다. 만세동산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어리목'으로 향하는 경로이다. 몸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눈꽃과 태양이 수직으로 배치된다. 동편을 바라보면 서벽의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윗세누운오름'의 능선에 가려서 시야가 조금은 답답하다.
 
윗세족은오름에서 바라본 만세동산 (SW612/Pro400H) ⓒ 안사을
   
태양과 구름과 눈꽃 (SW612/Pro400H)미세먼지가 없으면 이렇게 태양과 정면으로 마주쳐도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 안사을

윗세오름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겨울철, 남벽분기소로 향하는 길은 오후 1시에 닫힌다. 올라오면서 촬영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던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선택이었다. 점심 요기를 위해 사온 삼각김밥을 베어 물며 배낭 한켠에서 아쉬움 한 덩어리를 꺼내, 윗세오름 대피소 한켠에 고이 놓고 왔다.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돈내코에서 올라오는 경로로 탐방을 할 것이다.

어리목으로 하산, 안개 속으로

어리목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북서쪽 사면이라 영실 쪽보다 눈이 많다. 중산간의 숲을 걸으면서도 겨울 산의 정취를 맛보고 싶다면 어리목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이 경로는 1시간 반이면 내려갈 수 있는 길이지만 동행인의 한 마디에 그만 역시 지체를 해버리고 말았다.

"뒤에 좀 봐봐."

이곳의 풍경은 이런 식으로, 내려오면서 뒤를 돌아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오전이면 해가 숨어, 풍경은 어둡고 하늘은 역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영실로 내려가면 역시 역광이나 사광이 들어오고 그림자가 많아진다. 다만 오백나한의 위풍당당한 풍경은 오히려 서쪽에서 비추이는 순광으로 더욱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어리목 경로에서 올려다본 모습 (SW612/Por400H) ⓒ 안사을
   
어리목 경로 (SW612/Pro400H)오른쪽으로 보이는 숲은 만세동산이다. ⓒ 안사을
   
어떤 나무 (645N/Ektar100)만세동산을 뒤로 하고 홀로 서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 ⓒ 안사을
 
구름 속으로 (645N/Pro400H)저 구름 속에서는 눈이 내렸다. ⓒ 안사을

위 사진 이후로는 사진이 없다. 짙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100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좋지 않았다. 구름층을 뚫고 산을 내려오니 하늘이 매우 흐렸다. 이날의 날씨는 '흐림'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걸었던 여행자에겐 '맑음'이었다.

※ <필름사진 여행기>, 제주도 동편의 오름들에 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태그:#한라산, #겨울, #영실, #어리목,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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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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