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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부속 암자 은적암 가는 길 소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마곡사 부속 암자 은적암 가는 길 소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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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로 꿈이 바뀌기 전까지, 나의 우상은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유난히 나라 사랑을 강조하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은, 시간 날 때마다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며, 담임선생은 무엇을 바라셨을까? 겨레의 큰 스승 김구 선생 이야기는 단골 메뉴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문득 가보고 싶었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인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체포되어 옥살이하다가, 탈옥하여 머무른 흔적을 보고 싶었다. 가까운 곳이었다. 공주 태화산 마곡사에 갔다.
 
'마곡(麻谷)을 향(向)하야 안개를 헤치고 드러간다. 거름거름 드러간다. 한발걸음식 오탁세계(汚濁世界)에서 청량계(淸凉界)로, 지옥(地獄)에서 극락(極樂)으로, 세간(世間)에서 거름을 욈기어 출세간(出世間)의 거름을 거러간다.' <정본 백범일지>, 2016, 돌베개

마곡사 사계를 기록하고 싶었다. 눈이 와야 겨울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입춘이 다가오자 조바심이 났다. 눈 덮인 마곡사를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데, 눈 소식은 없었다. 입춘이 지나자 부랴부랴 마곡사를 찾았다. 백범 명상길 1코스 백범길과 2코스 명상 산책길을 걸었다.
 
 고증에 따라 조성된 백범당(중앙) 옆에 광복 후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있다.
 고증에 따라 조성된 백범당(중앙) 옆에 광복 후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있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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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당

백범당에 갔다. 김구 선생 기념관이다. 원래 건물이 없었으나, 고증을 거쳐 2004년에 조성하였다. 마곡사에서 이를 백범당으로 명명하여, 백범과 맺은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1898년 늦가을에, 선생이 마곡사를 처음 찾았을 때 "장목교(長木橋)를 지나서 심검당(尋劒堂)에 들어간즉( ...)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앉히고(...)" 등으로 백범일지에 기록하였다. 심검당은 극락교를 지나서 대광보전 동쪽에 있다.

백범당 벽에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친필 휘호이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을 밟고 들판을 갈 때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迹): 오늘 내 발자취가
수작후인정(逐作後人程): 뒷사람 이정표가 될 것이니

서산대사의 시로 알려졌으나,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의 시집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린 시 '야설(野雪)'이다. 선생은 이를 즐겨 인용하며,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옆으로 나와 희지천을 따라서 올라가면 삭발 바위가 있고, 백범교를 건너면 성보박물관이 있다.
 대웅보전 옆으로 나와 희지천을 따라서 올라가면 삭발 바위가 있고, 백범교를 건너면 성보박물관이 있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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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바위

대웅보전 옆문을 나와 희지천(希之川)을 따라서 올라간다. 삭발 바위가 있다.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한 곳이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가 체도(剃刀)를 가지고 천변(川邊)으로 나가서, 삭발진언(削髮嗔言)을 쏭알쏭알 하드니, 내의 상투가 모래 우에 뚝 떠러진다. 임의 결심(決心)을 하엿지만은 머리털과 갗이 눈물이 뚝뚝 떠러진다.

법당에서는 종(鍾)을 울니고, 향적실(香積室)에서 공양주(供養主)가 불공(佛供) 밥을 짓고, 각암좌(各菴座)에서 가사착복(袈紗着服)을 한 중들이 수백명(數百名)이 회집(會集)하고, 나도 흑장삼(黑長衫) 홍가사(紅袈紗)를 착(着)하야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인도(引導)한다.' <정본 백범일지>

이 땅의 젊은이도 입대 전 머리를 깎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똑같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흐르는 눈물인가.
 
 마애불 오르는 길목에서 내려다본 백련암.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이 선생이 은거하던 성윤당이다.
 마애불 오르는 길목에서 내려다본 백련암.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이 선생이 은거하던 성윤당이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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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머물며 수행하던 백련암(白蓮菴)에 갔다. 태화산 중턱 작은 암자이다. 관음전 옆 건물이 선생이 거처하던 요사채라고 했다.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인기척에 보살이 문을 연다. 선생처럼 온화한 미소를 띤다. 안에 감추어진 편액을 가리킨다. 성윤당(性允堂)이다.

당시 선생은 질풍노도의 20대였다. 겨우내 기나긴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성윤당 앞 약수로 뜨거운 가슴을 식혔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속이 시원했다.

백련암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다. 마애불이 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두 손 모았을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무엇을 빌까. 한참 망설였다.

선생은 반 년 정도 머물다 1899년 봄에 마곡사를 떠난다.
 
'나는 진세간(塵世間) 연(緣)을 다 할단(割斷)치를 못하엿거나, 망명객(亡命客)의 임시(臨時) 은신책(隱身策)으로거나, 하여(何如)하엿든지 단(但)히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법(道法)의만 일생(一生)을 희생(犧牲)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한다. (중략) 백미(白米) 십두(十斗)를 방매(放賣)하야 여비(旅費)를 하여 가지고 경성을 향(向)하고 출발(出發)하엿다.' <정본 백범일지>

백범 기념 식수

광복 이듬해, 선생은 마곡사를 다시 찾는다. 20대 승려에서, 70대 한 나라의 주석이 되어 온 것이다. 마곡사 동구에 승려들이 늘어서 지성껏 환영한다.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대광보전 주련(柱聯)을 보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물러나 속세를 돌아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마치 꿈속 일만 같다

광복을 위하여 독립운동 하던 시절을 돌아보니, 마치 꿈같았으리라. 주련은 선생의 미래를 예언하듯,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선생은 염화실(拈花室)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그때 심은 향나무가 푸름을 간직한 채 지금도 백범당 옆에 남아 있다.
 
 극락교 주위 나무에 하얀 눈은 없고 연꽃이 주렁주렁 열렸다.
 극락교 주위 나무에 하얀 눈은 없고 연꽃이 주렁주렁 열렸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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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에 가면 백범 김구 선생이 있다. 절규하며 통일 정부를 주장하던 우리 겨레의 지도자가 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선생 소원대로 남과 북 하나가 되는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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