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몇 년 전 결혼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명절이었다. 결혼 후 명절은 오직 여성의 역할만을 바꾼다. 남성들은 여전히 본가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여성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지만, 여성은 결혼 후 남편의 집에 따라가 그 과정의 실무적 역할을 맡게 된다. 나로서는 당연하게 이어져 온 그 '전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할수록 의문은 깊어졌다. 

"명절에 무조건 남자 집 먼저 가고, 여자 집은 나중에 가고 그런 거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남편에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을 때, 당연히 동의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나는 누가 봐도 '이상한' 이 불균형에 대한 그의 판단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뭐가 이상해? 원래 다 그렇게 해 왔던 건데."

그게 '명절에는 우리 집 먼저 가는 게 맞다'는 자기 방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것을 지적했을 때 이상하지 않다고 답하는 입장이 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불평등한 전통'에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일까.

결혼 전에 명절에는 서로의 집에 번갈아가면서 먼저 가기로 약속했다. 남편은 그런 말을 꺼내는 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첫 명절은 처음이라 시댁 먼저, 그 다음은 명절에 시어머니 생신이 끼어 있어서 시댁 먼저 하는 식으로 네다섯 번의 명절이 지났다. 명절에 처가댁을 먼저 가겠다는 것이 그때만 해도 얼마나 파격적인(!) 이야기인 줄 알기에 일단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하지만 명절에 해외여행은 다녀오면서도 처가댁부터 들르겠다는 말을 그는 끝끝내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결혼해서 효도하려 했는데' 부모님에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굳이 에너지를 쓰고 투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왜 말을 못해? 너는 우리 관계가 평등해지는 걸 주장하는 게 껄끄러워?"

나는 그가 나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 정립되어 있는 우리 관계의 근본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우리의 평등을 거부한다기보다, 부모님과 대립하는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기존의 명절 문화가 지속될 때 불편한 것은 그가 아니다. 내가 참으면, 내가 덜 예민하면 모두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명절을 보낼 수 있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을까?

물론 그도 청소년기에는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위해 반항했을 것이다. 모두가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변화를 꾀하기에 이 문제가 그에게 절실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희생 위에 건설한 전통인가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명절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 가는 걸로, 적어도 스스로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문제를 각자의 부모님에게 설명하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었다. 내가 모든 관계를 일일이 보듬고 누구도 상처 입지 않도록 애쓸 수는 없다. 그가 부모님을 설득하여 납득시키든, 그냥 회피하든, 그것은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결혼 4년차의 설 명절이 다가왔다. 각자 명절을 보내기로 했지만 남편은 혼자서 시댁에 가지 않았다. 아마 시어머니가 '오지 말고 그냥 둘이서 보내라'고 권유하신 듯했다. 사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결혼한 두 사람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부모님과 명절 아침을 보내는 것은, 명절마다 무조건 여자가 남자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보다는 합리적이다. 

명절을 보낸 뒤 부부 상담과 이혼율이 그렇게 높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기존의 명절 문화에 고통 받고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각자 보내는 명절이 우리 부부 사이를 덜 훼손할 수 있다. 부모님께 각자 효도하고 기분 좋게 다시 만나면 된다.

그래도 설 당일에는 시부모님에게 새해 문자를 보냈다. '못 가서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에게는 장문의 답장이 왔다.

'세상은 말이다. 전통, 도덕, 관습 이런 것도 아주 중요하단다. 때가 되면 자손을 보고, 명절을 챙기며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삶이다. 물론 요즘은 하루가 달리 변하는 게 많아 무엇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통이나 관습을 따르는 게 무난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그 전통과 관습이 누구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지어진 그럴 듯한 성인지 혹 그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신 적이 있느냐고. 오랜 세월 동안 명절마다 정작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 뵙지 못하고 남편의 조상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차례상을 차리는 시어머니가 없었더라도 그 전통이 이어질 수 있었겠느냐고. 그리고 이제는 아들과 결혼한 남의 집 귀한 딸에게까지 남성들의 안락한 전통을 떠받치는 역할을 물려주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일이겠느냐고. 

나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차례 거부하는 며느리와 전통 주장하는 시아버지 

명절 당일은 아니지만 그 다음날이 시어머니 생신이라 다 같이 외식을 했다. 시아버지는 명절에 며느리가 차례를 지내러 내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세상이 다른 것은 또렷했다. 

남자가 아내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인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요리하는 남편을 향해 혀를 차실 때까지만 해도 웃어넘겼다. 하지만 남편이 갖고 싶다는 비싼 외제차에 대한 이야기 끝에 나를 보고 "며느리가 돈 많이 벌어야겠다"고 하시는 걸 듣자 황당한 기분을 숨길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신랑은 부엌일 시키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한테는 돈 벌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님, 저 그냥 일 그만두고 살림할까요?"

어찌어찌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남편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내 이성의 끈이 툭 끊긴 소리가. 아버님은 웃으면서 모순을 인정하시면서도 '그래도 내 생각을 굽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셨고, 나는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든 제 갈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도 명절마다 아버님은 전통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잔소리를 하실지도 모르고, 나는 여전히 그 전통을 따라야 한다면 직계 자손인 남편에게 맡길 생각이다. 

사실 굳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지 않는 편이 예의바른 것인지도 모른다. 명절에 잠깐 '참으면' 굳이 갈등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아버지가 언젠가 내가 말하는 '불평등한 전통'을 조금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오히려 솔직하게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고, 수차례 서로를 설득하는 것이 세대 간 거리를 조금씩은 좁혀줄지 모른다는 기대도 해 본다.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채로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모양이다. 모두가 조금씩 괴롭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부딪치는 쪽을 택해 살아가려고 한다.

태그:#명절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