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연휴에 피로도 풀고 친구 만나 놀기도 해야지. 이렇게 시간이 가버리다니.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살았어?"

큰아들이 아빠와 단둘이 시가에서 설을 쇠고 오자마자 하는 말이었다. 지난해 말 드디어 취업해 첫 월급을 받은 스물일곱 살 청년. 그에게 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션이었단다.

시가에서 아빠는 할머니댁 보일러 수리, 동네 친척댁 방문, 밭에서 무 수확하기, 쌀 방아 찧기 등을 했다. 아들은 부엌일을 했단다. 전 부치고 수저 놓고 밥상에 음식 나르고 설거지하고. 부엌일을 하다 보니, 나물이 손 많이 가는 음식인 것도 알겠더란다.

"엄마, 내가 작은 상에서 작은 엄마랑 여자 친척 동생들이랑 먹었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라? 할머니는 나를 막 부르셨는데, 내가 작은 상에서 먹는다 그랬어. 큰 손자라고 내가 늘 큰상에서 먹었잖아. 아, 엄마랑 동생이 명절에 이런 기분이겠구나. 그런 기분 처음 느꼈어."

 
20대 직장여성인 딸이 설 전날 서울성곽길을 오르며 땀흘렸다. 모녀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자유란, 맛을 아는 사람일수록 더 맛을 안다. 20대 푸르른 날을 딸이 어떻게 살아야 일생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딸은 최소한 나보다는 더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그런 점에서 명절도, 이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
▲ 설 전날 서울성곽길을 오르는 딸 20대 직장여성인 딸이 설 전날 서울성곽길을 오르며 땀흘렸다. 모녀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자유란, 맛을 아는 사람일수록 더 맛을 안다. 20대 푸르른 날을 딸이 어떻게 살아야 일생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딸은 최소한 나보다는 더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그런 점에서 명절도, 이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
ⓒ 김화숙

관련사진보기

  
내가 며느리로 느낀 감정을 아들이 느꼈다니. 놀라웠다. 아들은 만약 자기 배우자가 명절마다 낯선 부엌에서 밥만 하고, 심부름하느라 작은 상에서 허겁지겁 먹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단다. 당장 다음 명절엔 가족 여행하잔다. 할머니 살아계신 동안, 자기가 나서서 다른 명절을 만들어 보겠단다. 콜! 역시 내가 안 내려간 건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은 없어

남편과 아들이 시가에 간 동안, 나는 안산에 남았다. 5년 전만 해도 꿈에도 꾼 적 없던 삶이었다. 친오빠를 간암으로 잃은, 가족력 B형간염보균자인 내가 간암 환자가 됐다. 그 충격 중에도 딸을 암으로 잃을지 모를 친정엄마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군복무 중인 큰아들, 대학생 딸, 그리고 고2인 막내의 앞길도 걱정됐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병으로 인한 근심 걱정에 '나'는 없었다. 나를 먼저 사랑하고 돌보는 순리였다. 

"이게 뭐야! 이제부터 다르게 살 거야!" 앞으로는 명절에 나만의 상상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자칭 '쫌 다른 명절 프로젝트'. 올해 설이 5회째다.
 
좋아하는 서울성곽길을 나는 음력 섣달그믐날 걸었다. 특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 백악마루까지 오르는 길이 좋다. 비온 다음날이라 서울시내가 잘 내려다 보였다. 백악마루를 지나 숙정문 앞에 섰다. 서울의 4대문 중, 이름이 바뀐 북대문이 숙정문이다. 원래 4대문 이름엔 인,의,예,지가 하나씩 들어가게 돼있었다. 북문은 홍지문이 될 거였다.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당시 정치인들은 백성들이 정치의 시비를 구별하게 똑똑해 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지자 대신 개혁과 정화라는 뜻의 숙정을 썼다. 숙정문 앞에 서면 나는 사라진 지(智)자를 생각하고, 여자가 똑똑해지는 걸 싫어하는 가부장제를 생각하곤 한다.
▲ 내가 좋아하는 서울 성곽길  좋아하는 서울성곽길을 나는 음력 섣달그믐날 걸었다. 특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 백악마루까지 오르는 길이 좋다. 비온 다음날이라 서울시내가 잘 내려다 보였다. 백악마루를 지나 숙정문 앞에 섰다. 서울의 4대문 중, 이름이 바뀐 북대문이 숙정문이다. 원래 4대문 이름엔 인,의,예,지가 하나씩 들어가게 돼있었다. 북문은 홍지문이 될 거였다.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당시 정치인들은 백성들이 정치의 시비를 구별하게 똑똑해 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지자 대신 개혁과 정화라는 뜻의 숙정을 썼다. 숙정문 앞에 서면 나는 사라진 지(智)자를 생각하고, 여자가 똑똑해지는 걸 싫어하는 가부장제를 생각하곤 한다.
ⓒ 김화숙

관련사진보기

         
월요일 아침 8시, 나는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지하철 경복궁역에 내려 서울 성곽길을 올랐다. 자하문으로 들어가 가파른 계단으로 백악마루까지 가서 숙정문을 거쳐 길상사로 내려갔다. 땀 젖은 옷을 갈아입고 절밥을 먹었다. 절 카페에서 책도 보고 쉬었다. 입춘의 절은 인산인해였다. 모든 사람이 귀성 전쟁 중은 아니었던 거다. 우리는 심우장 쪽으로 넘어가, 와룡공원 성곽길을 오르다 성균관대 쪽 샛길로 내려갔다.
    
우리 모녀는 한산한 서울 도심을 웃고 떠들며 다녔다. 광장시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시장통을 겨우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니, 거기도 사람들이었다. 강남의 거리에도 중고서점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우리가 저녁을 먹은 태국식당도 계속 손님이 찼다. 12시간 만에 안산에 돌아왔을 때, 내 만보기 숫자는 3만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설 당일에는 글을 쓰기 위해 동네 카페를 찾았다. 길에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모두 카페에 있었다. 글을 쓰며 보니, 문밖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계속 보였다. 세상 모든 여자가 전 부치는 게 아니듯, 우리 자식 세대는 다르게 사는 게 보였다. 인천공항을 빠져나간 사람 수가 역대 최고라지 않던가. 아직도 명절노동이며 차례상이 단골뉴스가 되는 세상은 얼마나 상상력이 빈약한가.

다시 살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설 앞두고 뜨거웠던 '시가-처가 호칭' 문제를 생각한다. 여성가족부가 대안적 호칭을 만들겠다지만, 아마도 먼 길이 될 것이다. 호칭 바꾸자는 아내한테 어느 남편은 "넌 우리집이 우습구나"로 답했다나. "성차별인가?"라고 물은 여론조사 결과엔 한숨이 나왔다. 여성들 다수는 성차별이라는데, 남성들 다수는 성차별이 아니란다. 
 
설날 아침 9시 직전 안산 우리동네 길이다. 내가 집에서 나와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500미터 정도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카페 안에 사람이 많아서 놀라고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 나는 두 번 놀랐다. 지금의 명절문화는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은 아닐까. 이제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 설날 아침 동네 카페로 글쓰러 가는 길 설날 아침 9시 직전 안산 우리동네 길이다. 내가 집에서 나와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500미터 정도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카페 안에 사람이 많아서 놀라고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 나는 두 번 놀랐다. 지금의 명절문화는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은 아닐까. 이제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 김화숙

관련사진보기

    
솔직히 말하자. 아가씨, 도련님은 차별적이고 그런 호칭이 작동하는 가족제도는 문제가 아닌가?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이 왜 아가씨 대신 '고모', 도련님 대신 '삼촌'으로 불러왔겠는가. 호칭은 가부장제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거다. 호칭만 고친다고 시스템이 자동 개선되진 않을 거란 말이다. 남성 중심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부계혈통, 며느리 도리, 아버지의 성씨. 도대체 어디에 성평등이 있단 말인가?

부부관계와 호칭도 내겐 일찌감치 걸리적거리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 세대는 당연히 아버지는 반말, 어머니는 존댓말을 썼다. 서로 이름 부르는 친구였다가 결혼한 내 친구는 시부모 앞에서 결국 남편을 'ㅇㅇ씨'로 불러야 했다. 흔히 듣지 않나? 성차별이란 이렇다. 젠더 감수성이 없이는 안 보인다. 가족 내 위치와 정치적 유불리 따라 다르게 느끼게 돼 있다. 남자에겐 편한 게 여자에겐 성차별인 거다. 

"우선 여보, 당신, 님, 씨, 자기 따위 쓰지 말자! 존댓말도 버려!"

숙덕커플인 우리 부부가 다시 살기 위해 먼저 바꾼 게 호칭이었다. 들여다볼수록 위계적인 부부관계고 가족제도였다. 호칭은 우리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 맞다. 평등한 동반자로 살자니 존댓말도 껍데기였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됐다.

부부관계건 시가-처가 관계건, 평등관계를 본 적이 있던가? 인정하자.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가족제도란, 모두 가부장제의 옷을 입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뿐이었다. 숙덕커플의 다시 살기는 그렇게 페미니즘과 닿을 운명이었다. 내가 가 본 적 없는 길이었다. 보고 배운 익숙한 것은 버려야 했고, 낯선 걸 시도해야 했다. 결국 상상력이 문제였다. 

명절이 끝난 지금, 다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살자. 

태그:#페미니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가부장제, #서울성곽길, #호칭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경기도 안산. 운동하고, 보고 듣고, 웃고, 분노하고, 춤추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읽고, 쓰고 싶은대로 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