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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쌍산의소 막사 터
 화순 쌍산의소 막사 터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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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만 남을 호남의병전적지

호남의병은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의병 전적지를 더듬으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의병 수십만이 참여하고, 숱한 의병이 희생된 전투지에 견주면, 마땅한 유적지가 없거나 있었던 유적지조차 거의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병장 생가는 흔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몇몇 남아 있는 곳조차 관리가 소홀하거나 개발로 그 원형을 잃고 있었다. 의병장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의병 전적지에서는 지난날의 치열했던 전투지임을 알 수 있는 팻말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곳도 있었다.

동행한 문화해설사나 의병 후손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호남의병전적지는 한낱 전설로만 남을 처지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늘그막에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을 둘러보다가 거기서 고향 출신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만났다. 나는 그제까지 고향 출신 일본군 장교 박정희 전 대통령만 알았지, 바로 이웃마을의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과 그 어른 조카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은 모른 채 살아왔다. 그 부끄러움으로 나는 뒤늦게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십수 년째 순례하고 있다.

나는 먼저 의병전쟁기 중 치열했던 호남 벌에 창의의 깃발을 휘날렸던 전적지부터 답사에 나섰다. 그 가운데 의병 전적지가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양회일 의병장이 맹활약했던 화순 쌍산의소만은 빠트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순군청에 부탁하자 담당자는 양 의병장 증손 양금렬씨를 소개해줬다.

여러 번 날짜를 조정한 끝에 2008년 4월 6일을 답사일로 맞췄다. 나는 그 길에 전북 의병장 답사취재 계획도 세운 바, 그 전날 남원 전해산 의병장 생가와 무덤을 답사한 뒤 이튿날 화순 쌍산의소를 찾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출발 전, 양금렬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약속 전날 4월 5일은 한식날로 집안 어른들이 성묘하고자 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하루 당겨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이미 약속이 돼 있기 때문에 그날 오후 느지막이 서둘러 화순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갇힌 호남의병장들(앞열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열 왼쪽부터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갇힌 호남의병장들(앞열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열 왼쪽부터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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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일 의병장 전적지 쌍산의소

나는 약속날 남원 전해산 의병장 유적지를 둘러본 뒤 부지런히 화순군 이양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조금 넘었다. 양금렬씨와 양동하(83) 전 능주 전교 그리고 화순군 이순도 문화해설사 등 예닐곱 분이 반갑게 맞아줬다. 미처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우리 일행은 급히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곧장 쌍산의소로 향했다.

출발한 지 30여 분 후 마침내 쌍산의소 막사 터에 이르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그곳은 이미 해가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곳에서 간신히 기념촬영을 마친 뒤 사방을 둘러봤다. 아주 기막힌 천연 요새 의병전적지였다.
   
 화순 쌍산의소 내 최초 창의 장소(최근 복원)
 화순 쌍산의소 내 최초 창의 장소(최근 복원)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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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선 이순도씨는 말했다. 이곳은 구한말 의병 요람지였고, 6.25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들의 은거지로도 쓰였다. 뒤따르던 양금렬씨가 말했다.

"지난해 여름(2007. 8. 3.), 이곳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의병사 연구대가 조동걸 박사는 구한말의병전쟁시기를 전기(1894~1896. 10), 중기(1904~1907), 후기(1907. 8~1909-09. 10), 전환기(1909. 11~1915. 7), 말기(1915. 8~1918)로 나눴다.

이로 미뤄 볼 때 구한말 의병 투쟁기는 20여 년간이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의병의 수에 대체로 연인원 60만 명 내외요, 그 희생자 수는 15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화순 쌍산의소 막사 터
 화순 쌍산의소 막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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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의소는 거의 완벽하게 남은 의병 전적지

그런데 막상 의병 전적지를 다녀보면 그때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없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물로는 화승총이나 진중일기 정도인데, 대부분 일제에게 빼앗겨 전해지지 않습니다. 유적은 늘 일제에 쫓기는 의병들이 영구적인 시설을 새로이 만들기보다는 자연동굴이나 산성, 사찰, 재실 등 이미 지어진 건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의병만의 독자적인 유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남 화순 쌍산의소는 거의 완벽한 의병 전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에서
 
나는 그 점을 이순도씨에게 되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화순 쌍산의소는 워낙 궁벽한 산중이라 외부와 단절됐기에 일제도 미처 파괴치 못하였습니다. 해방 뒤에는 호남이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 탓으로 이나마 보존되었을 겁니다."
 

언젠가 나라에 민족정기가 바로 우뚝 서는 그날이 오면, 이곳은 분명 민족의 성지로 새로이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 이순도 문화해설사와 양 의병장 후손으로부터 자상한 안내로 의병전적지를 답사했다. 우리 일행은 쌍산의소 막사 터, 화약재료 창고였던 유황 굴, 제1~3 망루 등을 둘러본 뒤, 최초의 거병 장소였던 증동으로 갔다. 
 
 한 세기 전 의병들 모습
 한 세기 전 의병들 모습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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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밭에 왕대 난다'

하지만 어둠으로 그곳 대장간 터를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내가 못내 안타까워하자 뒤따르던 양금렬씨가 말했다.

"아쉬움이 많으면 다시 오게 되지요."

우리 일행은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자 저녁 8시가 넘었다. 양 의병장 후손들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소매를 꼭 잡았다. 그 따뜻한 인정에 한 밥집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마침 때를 놓쳐 시장한 데다가 그 고장 특미 육회 비빔밥을 들자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제야 밝은 자리에서 주객은 소주잔을 나누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분들은 내 신상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양동하 전 능주 전교는 내 고향을 물었다.

"구미 금오산인입니다."
"네에? 경상도 선비가 호남에 오시다니... 참 귀한 손이오."

 
 화순 쌍산의소 만세 바위로 의병들이 훈련도중 이 바위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 함.
 화순 쌍산의소 만세 바위로 의병들이 훈련도중 이 바위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 함.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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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전교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1906년) 우리 집안은 양 장군 거의로 가산을 탕진하여 그 뒤로는 힘을 못 썼소. 그래서 자손들을 대학에도 못 보냈다오. 하긴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면 충신 집안은 멸문을 당했다니 할 말이 없소만, 나라를 되찾았으면 집안이 다시 힘을 써야 할 건데, 어찌 그리 못하고 있소."

"'왕대밭에 왕대 난다'고 하지요. 앞으로 이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 저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이 나라에 민족정기가 제대로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 고맙소. 영남 분이 자기 고장 의병장보다 호남 의병장부터 먼저 찾아준 점도 ... 내 생전에 언제 다시 찾아주시오."
 
양 전교는 내 손을 꽉 잡고는 잠깐 만남을 못내 아쉬워했다. 양금렬씨로부터 의병대장 집안의 종손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항일의병 집안이 온전했겠습니까?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됐지요. 증조부 양회일 장군은 다행히 외아들(양원승)을 뒀는데, 바로 제 조부님이시지요. 왜놈에게 선친을 잃고 평생 떠돌다가 금강산에서 객사하셨습니다.

슬하에 세 분 아드님을 뒀는데, 두 아들도 아버지를 닮아 떠돌다가 큰 아들인 저희 아버지는 해방 후 60이 넘어서야 겨우 정착하여 저를 낳았습니다. 그때 동네에서는 환갑을 넘겨 생남했다고 잔치까지 벌였다고 하더군요. 막내아들, 곧 제 숙부는 끝내 출가했습니다. 법명이 월인(月印)으로 몇 해 전에 입적하셨습니다."


잠깐 들어도 파란만장한 집안의 수난사였다. 수저를 놓고 일어나자 그새 밤 9시가 넘었다.

"언제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먹빛 짙은 귀갓길을 재촉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재청 발간 '월간문화재사랑' 2019년 2월호와 박도 지음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눈빛출판사)에도 게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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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