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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에 재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을지면옥'이 철거 위기에 놓였을 줄은 몰랐다며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요한 건 냉면집이 아니다. 세운상가를 둘러싼 을지로 일대의 역사와 오늘의 문제를 조명하고자 한다. - 기자 말
 
1960년대로 추정되는 을지로 일대의 모습.
 1960년대로 추정되는 을지로 일대의 모습.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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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떨어져 을지로 일대를 바라보면 3km가 채 되지 않는 반경 안에 광장시장, 방산시장, 중부시장, 평화시장이 있고 건축·조명·공구·미싱·화학·금속 등의 도매업체와 소규모 공장이 각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벽과 벽을 맞대고 영업 중이다. 이 일대의 업체나 소규모 공장들은 기본적으로 40년 혹은 50년째 영업 중이고, 더러는 6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 지역이 '제조업 단지'가 된 건 크게 두 가지 역사적 흐름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이들 중 대부분이 종로와 동대문 일대로 몰렸다. 서울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의류와 원단 관련 사업을 시작한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난 후 버려진 미군 군복을 요즘 표현으로 리폼해 팔던 실향민들이 늘어나 커다란 상권을 이뤘다. 그러다 1960년대 초반에 평화시장 건물이 생기면서 거대한 의류산업단지가 조성됐다.

희귀한 제조업 단지, 그 탄생의 역사
 
세운상가 오픈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세운상가 오픈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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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일대가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종로 일대에서는 귀금속 거리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금광 붐이 일었던 1930년대부터 이 일대에서 보석과 패물 거래가 활발했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과 전란을 겪게 됐고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시계나 귀금속을 팔아 현금화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금은방을 비롯해 시계수리점 등이 생겨났다. 휴전 이후 1980년대까지 국내 시계 거래의 80%가 이 일대에서 이뤄졌다고 하니, 엄청난 시장이었던 셈이다. 이런 흐름에서 귀금속 세공 공장과 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동대문의 의류 관련 산업과 종로의 귀금속 세공 관련 산업이 크는 사이, 각종 공구나 기계·원자재 등을 공급할 시장이 필요했다. 동대문과 종로 사이에 있는 을지로에 자연스럽게 공구상을 비롯한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을지로는 '자연발생한 제조공업단지'다.

서울에 인구가 몰리자 정부는 서울의 도시 개발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세운상가'가 생겼다.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이 상가는 세운-대림-삼풍-신성상가로 이어지는 폭 50m, 길이 1.18km의 기다란 형태의 건물 중 하나다.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1km 길이의 특이한 제조업 중심 상가는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1960년대로 추정되는 동묘 일대. 세운상가가 지어지고 있다. 사진 왼편에 공업사와 페인트를 취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점 간판이 보인다.
 1960년대로 추정되는 동묘 일대. 세운상가가 지어지고 있다. 사진 왼편에 공업사와 페인트를 취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점 간판이 보인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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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건물이 들어선 곳은 일본제국정부가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폭격에 의한 도시 화재를 막기 위해 비워둔 '소개지대'(疏開地代), 즉 공터였다. 해방과 전란 이후 이 공터에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히 들어섰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서울 도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서울시는 해당 지역을 창경궁부터 남산을 잇는 도심의 녹지 축 내지 공원으로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도시개발 계획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부족한 토지'라 판단하고 이 지역에 민자 유치 상가를 짓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세운상가는 1968년에 완공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를 맞이하며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대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꾸려지고 있을 때, 을지로 일대의 제조업 단지 역시 엄청난 흥행기를 맞이했다.

내로라 하는 기술자들과 장인들이 몰려 있는 이곳이 한국 산업의 실험실이자 텃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을지로에서 40년째 각종 기계를 제작하는 사업을 해온 이아무개 사장은 "삼성이나 금성이 텔레비전을 어떻게 만들겠어요? 당시에 을지로에 있던 기술자들 여럿 스카우트 됐죠"라고 말했다.

이제는 건축·미술·영화의 성장판... 하지만
 
세운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신진상가가 완공된 모습.
 세운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신진상가가 완공된 모습.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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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서며 이 지역은 한국 예술과 문화의 기저에서 자원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인프라로 거듭났다. 이전까지 산업과 공업에 집중된 일거리들이 쏟아졌다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건축·미술·디자인·영화·연극·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재료를 구하거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서울은 물론 수도권의 미술대학이나 디자인대학을 상대로 작품이나 샘플을 만들어 주는 일을 수주하는 소규모 공장들이 늘어났다. 을지로3가 일대의 소규모 금속 가공업체 등의 간판에는 '학생 작품 제작' 혹은 '작품 의뢰 환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을지로 일대의 제조업 단지를 토대로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지로를 재개발해 건설할 예정인 '복합문화시설'의 조감도. 서울시는 '복합문화시설'이라 표현했지만, 설계안을 확인해보니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을지로를 재개발해 건설할 예정인 "복합문화시설"의 조감도. 서울시는 "복합문화시설"이라 표현했지만, 설계안을 확인해보니 "주상복합아파트"였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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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뿐만 아니다. 연구실에서 필요한 기계를 주문 제작하기도 한다. 수도권만이 아니라 포항공대나 카이스트의 연구실에서 을지로까지 찾아와 실험에 필요한 기계나 도구 등을 제작하기도 한다.

을지로가 한국 문화와 예술, 나아가 학문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곳곳에 기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 서울시는 이 지역을 재개발하고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2018년부터 철거가 시작됐고, 여기저기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얼마전 박원순 서울시장은 "을지면옥이 철거되는 줄 몰랐다"라며 노포가 상생할 수 있도록 철거를 중단하고 설계안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미안하지만 냉면은 이곳에서 철저하게 부수적인 것이다. 철거는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바로가기 클릭, http://omn.kr/1h5m7)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을지로 일대.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을지로 일대.
ⓒ 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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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을지로, #서울, #도시재생, #재개발,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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