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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자전거로 5분만 가면 도서관이 있다. 귀한 보물이 가득한 집채만 한 금고가 곁에 있는 기분. 여유롭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 사이를 걷다가 발길을 붙드는 제목을 봤을 때, 그 내용 또한 마치 찾고 있던 퍼즐 혹은 열쇠처럼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을 때의 반가움, 해방감, 오묘함이란! 그 보물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보물과 같은 책 이야기. 형식은 자유. 허구에 허구를 더할 수도, 누군가에 전하는 편지가 될 수도. 내 보물을 보여주는 방법은 내 자유니까. - 기자 말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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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도장깨기예요."
"저는 소설가 가쿠타 마쓰요입니다. 헌책은 잘 모릅니다만 간판을 보고 꼭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헌책 도장깨기라니 재미있는 발상이다. 두 번째 보물 <아주 오래된 서점>의 시작이다. 글에서 헌책 도장 사부로 등장하는 오카자키 다케시와 그 제자가 되어 1년간 각지의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가쿠타 마쓰요는 실제 이 책의 저자들이다. 두 인물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야스나케도 이름은 바꼈지만 실은 이 책의 기획자다.       

형식만 보면 픽션 같은데 인물뿐 아니라 책 속에 등장하는 헌책방들도 모두 실재하는 곳들이다(폐점된 몇몇 서점만 빼고). 그래서 글을 읽다 보면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듯 묘한 기분이 되는데, 이는 몸소 도심 속 헌책방 골목을 거닐 때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저자들이 말한 '현실과의 미묘한 엇갈림'이란 표현이 이해된다.     

나는 부산의 유명 관광지인 보수동 책방골목 주변에 4년쯤 살았다. 영도대교, 국제시장과도 가까운 비교적 지난 세월과 지역의 색이 짙은 동네다. 그 중에서도 좁다란 길목을 따라 허름한 헌책방들이 늘어선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특유의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한 길 옆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선 대로변과는 '차원'이 다른. 

가끔 책방들이 문도 안 연 이른 아침에 골목을 걸으면 책들도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듯했다. 책보다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인 한낮엔 어린 것들 소란을 너그러이 봐주는 노인 혹은 품이 큰 노목이 연상됐고, 해질 무렵 다시 책방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 '모든 것은 이렇게 끝이 나고 또 반복되겠구나' 싶어 숙연하고 쓸쓸해졌다.  

헌책방에서 느끼는 묘미는 여러가지인데, 당장 꼭 하나를 꼽자면 베테랑 책방 주인들에 내 책을 팔 때. 이때 일명 '쪼는 맛'이 쏠쏠하다. 뜻밖에 꽤 높은 가격을 주인이 먼저 부를 때는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고, 무심한 듯 "얼마에 팔고 싶은데~" 하는 주인 앞에선 눈치게임을 하듯 긴장이 된다. 실망스러운 때는 정이 들어 팔까 말까 하던 책을 내놨는데 너무 '똥값'을 부르거나 아예 구입을 거부할 때. 
 
가쿠타 마쓰요·오카자키 다케시 공저 <아주 오래된 서점>
 가쿠타 마쓰요·오카자키 다케시 공저 <아주 오래된 서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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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의 영향으로 국내외 할 것 없이 유서 깊은 헌책방들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한편에선 꿋꿋이 살아남아 새로운 수요층을 불러들이고 다양한 분야와 연계해 상생을 꾀하기도. 최근 진주 여행 때 20대로 보이는 젊은 헌책방 주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조용히 튼튼히 자라고 있는 어린 식물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헌책이 사는 길은 헌책을 좋아해 사는 이들이 많아지는 걸 거다.

<아주 오래된 서점> 책 말미에 이야기 속 헌책방들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상세히 적힌 부록이 있다. 일본을 여행하게 되면 이를 참고 삼아 '헌책 도장깨기'에 도전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스스로의 촉을 이용해 헌책(방) 발견의 기쁨을 증폭시키고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 것도 멋질 테고. 단, 어느 쪽을 택하든 오카자키 사부가 당부한 다음의 '헌책도 입문 시 주의사항'을 반드시 명심할 것! 
 
하나.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누가 뭐래도 최고다. 아무리 가격이 싸도 헌책방 주인이나 마니아가 경멸해도 상관 말아야. 

둘. 헌책방 책은 모두 가게 주인이 자기 돈으로 사들인, 반품 불가한 상품이다. 타인의 책을 만지는 것이니만큼 최소한의 예의는 필요.

셋. 헌책방의 책은 기본적으로 딱 한권뿐. 다음 기회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넷. 헌책 패션. 책을 망가뜨리는 복장은 안 된다. 젖은 우산과 코트, 단단한 큰 가방이나 주의를 소홀하기 쉬운 배낭, 닭벼슬 머리에 쇠사슬을 단 펑크족은 금지! 

다섯. 100엔짜리 책을 사면서 만엔짜리 지폐를 낸다? 편의점이면 몰라도 헌책방에선 거의 영업 방해. 사전에 잔돈을 준비해라.  

바로 다음 번에 소개할 '세 번째 보물'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야>는 도서관에서 본 순간 소유욕이 일어 마침 헌책방 관련 책도 읽었겠다 집 근처 중고서점에 가서 사버렸다. 그런데 그 덕에 너무 멋진 헌책방을 발견했다. 1960년에 지어진 공장 외관은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를 완전히 리모델링한 건물에 신식 헌책방과 다른 문화공간이 섞여 있었다. 헌책방은 구식에 낡았을 거란 편견을 완전히 깨준. 정확한 장소명은 'F1963'. 부산 광안리 바다에서 가까우니 관심 있는 분들은 와보시길.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위치한 F1963 내 YES24 중고서점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위치한 F1963 내 YES24 중고서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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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서점

가쿠타 미츠요.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 문학동네(2017)


태그:#헌책방, #아주오래된서점, #일본소설, #도서관,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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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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