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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이 기준인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비혼은 '천덕꾸러기'거나 '낯선 존재'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비혼 인구가 날이 갈 수록 증가하고, '정상가족'의 틀이 조금씩 깨지면서 새로운 명절문화를 원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로비혼러'들에게 다른 명절의 가능성을 들어봤습니다.[편집자말]
엄마는 내가 태어날 무렵부터 시댁과 명절을 거부하는 투쟁을 해오고 있었다. 아빠는 '며느리는 시댁에 자주 방문해 시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결혼 초 매주 시댁에 가던 엄마는 지쳐 버렸고 이후 매년 우리 가족의 명절은 '시댁'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긴장감 속에서 시작됐다.

왜 엄마가 명절마다 아빠랑 싸웠는지 이해하게 됐을 무렵에는 나도 엄마의 절절한 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친척 동생들을 돌보고 상 차리는 것을 돕는 것, 여자 어른들은 하루 종일 밥하고 설거지하고 다과 내오는 일을 하는 것, 그동안 남자 어른들은 고스톱을 치고 술 마시다 싸우고 여자들에게 윽박지르는 것. 그것이 어렸던 내가 기억하는 명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명절 파업 덕분에 아빠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 명절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뵙는 것은 며느리가 아닌, 아빠 본인이었다. 아빠는 큰 불만을 가졌지만 나는 우리 가족이 제 모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명절이 되면 엄마와 아빠는 각자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남은 명절 기간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남동생이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부모님 고생 그만 시켜드리고 싶다'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으니 '결혼하면 자신의 부인이 가사노동과 돌봄을 하게 되니 부모님의 고생을 던다는 것'이 답이었다. 아빠의 그림자가 남동생에게서 보였다. 왜 우리 집안의 남자들은 결혼하는데 대리효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게 과연 우리 집안만의 일일까.

"아빠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시집가라" 이 황당한 말
 
결혼 안 합니다. 안 해요
 결혼 안 합니다. 안 해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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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추석, 할아버지는 당시 23살이었던 나에게 대뜸 "아빠 고생시키지 말고 얼른 시집가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결혼 안 할 건데요' 하는 말이 목구멍에 가득 찼지만 떨떠름한 웃음을 지은 채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었다. '성인'(비청소년)이 되어도 집안의 여성은 가부장 권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불가능해져 맞벌이가 필수라는 시대에 여성이 가부장 권력에 종속되는 일이 그 남성과 시댁에 대한 가사·돌봄·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것 말고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비혼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어릴 때 엄마를 바라보며 명절 풍경이 '기이하다'고 느낀 뒤로 내가 명절 파업에 동참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외숙부는 대뜸 '공부는 잘돼가냐'고 물었고 이모부는 학창시절 '대학 가서 연애하려면 지금부터 다이어트해라'고 '고나리(관리)질'을 시전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정 걱정되시거든 돈으로 해주세요', '외모평가도 성희롱인데, 직장에서 교육 안 받으셨어요?'하며 되받아치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친척들에게는 나 말고도 물어뜯을 먹잇감이 많았으니까.

내 다음 타깃이 된 것은 취직을 준비하고 있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촌들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매년 '명절 스트레스'와 '명절 고나리에 대처하는 법', '명절 이혼' 등이 이슈가 되지만 집안 풍경은 변함없었다.

당신의 '정상가족' 점수는 몇 점인가요?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2018)의 스틸컷. 어느가족은 '정상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2018)의 스틸컷. 어느가족은 "정상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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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집안 으~른들은 매년 둘러앉은 친척들의 점수를 매겼다. 성적, 외모, 취업, 결혼, 출산... 아기가 크면 그 질문은 또 다시 반복된다. 나에게는 이 과정이 '정상가족'이 되기 위한 시험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곳에 취직해야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그래야 애를 낳고 잘 살지'.

이 시험은 준비된 답안 안에 삶을 끼워 넣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시험의 주최자는 여성의 노동력 없이는 가족을 유지하지 못해 누구 한 명이라도 이성애-결혼-출산의 연쇄에서 벗어날까 봐 안달이 난 가부장제의 망령들이다.

최근 명절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연휴를 이용한 해외여행이 역다 최다로 예상된다든지, 영화관에 사람이 북적인다는 소식이다. 친인척의 집을 방문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족·친구·애인 등 소중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해체가 아니다. 정상가족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나약하고 악독한가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이성애에 기반한 결혼·혈연 중심의 정상가족과 정상성을 넘어 더 다양한 가족의 모습들, 삶의 모습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직시해야하는 것 아닐까.

태그:#명절, #비혼가족, #동성가족, #설, #명절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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