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갈> 포스터

영화 <당갈> 포스터 ⓒ NEW

 
미루다 본 영화가 있다. <당갈>이다. 개인적으로 인도 남성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딸이 해외에 머무르는 홈스테이 호스트가 인도 출신이었다. 당시 '가부장주의'와 억압이 지나쳐 딸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학교 등·하교와 외출까지 간섭하고, 무슨 의견이라고 말하려고 하면 윽박 지르곤 했다. 결국 홈스테이를 바꾸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게 됐다. 물론 모든 인도 남성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 일이 되니 초연해지기 어려웠다. 또 가끔 인도에서 전해지는, 그곳 여성 인권의 현재를 보여주는 사건사고 소식도 나의 인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갈>은 전형적인 성장 영화다. '누구의 성장이냐'에 대한 부분은 의견이 갈린다. 아버지가 꿈을 이룬, 아버지가 강요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냐는 의견과 딸의 레슬러 성공담이니까 여성 승리의 서사라는 의견이 대립한다. 

나의 판단은 반반이다. 아버지가 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룬 이야기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여성인권이 열악한 인도'에서 여성이 레슬링에 도전해 금메달을 딴 신화는 여성들에게 분명 다른 삶을 꿈꾸게 할 가능성을 열어주기에 긍정적이다. 
 
아버지의 꿈, 레슬링 선수가 되는 것
  
 영화 <당갈>의 한 장면

영화 <당갈>의 한 장면. ⓒ (주)NEW

 
아버지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은 한때 주 대표 레슬링 선수였다. 재능과 열정을 갖춘 마하비르는 금메달을 꿈꾸었지만, 어려운 가정은 그를 후원하지 못했다. 그는 고이 접어둔 금메달에 대한 꿈을 아들을 통해 실현하리라 염원했지만, 딸만 넷을 낳게 된 후 체념한다. 딸 기타(파티마 사나 셰이크)와 바비타(산야 말호트라)가 남자 애들과 맞장 뜬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마하비르는 딸들의 레슬러로서의 잠재력을 발견한다. 즉시 그는 '두 딸 레슬러 만들기'에 돌입한다.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은 어린 딸들에겐 고통이었다. 마하비르가 딸들의 성취에 바치는 헌신은 우리 아빠들에게서도 발견되곤 한다. 골프 선수 박세리의 성공 뒤에 아버지의 헌신이 있었다는 전설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승리는 영광을 가져 온다. 그 과실은 달다. 하지만 문제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그 꿈이 누구의 꿈인가, 무엇을 위한 꿈인가 하는.
 
딸만 넷을 낳은 아내가 미안해하자, 마하비르는 "딸들은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이 있기 전 마하비르는 딸들의 잠재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딸들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알파 걸'로 키울 마음이 없었다는 얘기다. 또한 아버지 마하비르가 딸들을 레슬링에 입문시킨 발로가 페미니즘에 근거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대신 이루려 했고,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마지못해 딸을 훈련시키기에 이른다.
  
 영화 <당갈>의 한 장면

영화 <당갈>의 한 장면. ⓒ (주)NEW

 
감독은 배우들의 입을 통해 여성 인권에 접근한다. 마하비르를 통해 딸도 소중하게 여기라는 생각을 전한다. 14살에 조혼해야 하는 비운의 소녀 입을 빌려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온 세상과 싸우면서 그들의 비웃음을 묵묵히 참고 있잖아"라고, 딸의 인생을 펼쳐주려는 아빠의 선구자성을 계몽시킨다. 감독의 이러한 시각은 인도라는 공간의 문화적 한계를 고려할 때,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의 측면에서도 그럴까? 딸을 인간으로 대하는 방식이 자신이 정한 방식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면,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른 딸에게만 비로소 승인해주는 여성 인권이라면 그것은 이미 인권의 가치를 상실한다. 극 중 기타와 바비타는 자발적으로 시작한 레슬링을 시작하지 않았다. 운동에 집중하라는 이유로 두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머리카락을 삭발 수준으로 밀어 버리는 마하비르의 행위가 이를 증명한다. 딸들이 원하는 현재의 '소확행'을 몽땅 담보해야만 얻을 수 있는 미래의 행복을 페미니즘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고된 훈련이 보람 있게도 기타와 바비타의 레슬링 실력은 일취월장한다. 기타는 남자 선수들과 겨루어 승승장구하고 마침내 주 대표에서 국가 대표로 선발된다. 국가 대표 단체합숙 훈련에 들어가자, 마하비르는 기타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안절부절 한다. 국가대표 감독은 기타의 기존 레슬링 방식을 전면 수정한다.

아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기타는 동료들과 어울리며 점차 자유로워진다. 다시 머리를 기르고 외모도 가꾼다. 때로 영화를 보며 소소한 여가 생활도 즐긴다. 나는 기타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과정이 흐뭇했다. 얼마나 억눌려온 감정들일까. 머리를 기른다고 외모를 가꾼다고 반드시 운동을 못하게 된다는 법은 없다. 자기만의 패션 감각을 뽐내고도 정상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외모를 가꾸는 것이 무조건 자기다움을 찾는 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걸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좋은 운동선수가 되는 지름길도 아니지 않은가.
 
딸 기타가 이룬 꿈은 자신의 것일까?
  
 영화 <당갈>의 한 장면

영화 <당갈>의 한 장면. ⓒ (주)NEW

 
국가대표 감독이 기타의 훈련에 마히비르의 개입을 차단하자, 마히비르는 "조국에 금메달을 바치려는" 자신의 충정을 국가대표 단장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이는 마하비르의 왜곡된 꿈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마히비르는 자신이 꿈꾸던 것의 대리자로 딸을 불러냈고, 그의 우국충정을 듣는 대표단은 마하비르에게 감동한다.

조국에 헌신하는 '남성의 대리자로서의 여성의 인권'은 북돋울 만하다는 안전막을 치고서야 <당갈>은 여성 인권을 거론할 수 있었다. 인도의 남성에게 여성 인권을 납득시킬 유일한 방식은 '아버지가 허락한 페미니즘'이어야 했던 것일까. '아빠가 허락한 딸들의 인권만 승인된다'는 잘못된 암시를 줌으로써, 결국 기타와 바비타의 페미니즘은 애초 계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국가대표 감독이 지시하는 새로운 훈련 방식을 체득하는 데 실패한 기타는 국제 대회에서 고전한다. 마침내 아버지 마히비르가 기타의 훈련에 다시 개입한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고 경기에 임한 기타는 승승장구하고, 마침내 영국 레슬링 국제 대회에서 인도 여성 최초로 금메달을 거머쥔다. 그녀는 메달을 아버지에게 헌정한다. 이 지점은 기타가 아버지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버지에 의한 승리였음을 내포함으로써,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다시 따르고 나서야 비로소 얻은 승리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타의 목에 건 금메달에 고무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레슬링에 도전해 승리할 때, 기타의 절반의 성취는 온전한 성공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다 안다. 부모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자녀가 모두 승리하고 성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상에서의 여성 인권으로
  
 영화 <당갈>의 한 장면

영화 <당갈>의 한 장면. ⓒ (주)NEW

 
'금메달'이라는 위대한 성취는 억압 받는 인도 여성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10대 초반의 여성을 조혼시키고, 달리는 차 안에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인신매매와 살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도에서 여성의 금메달은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여성의 인권이 회복돼야, 금메달의 가치도 비로소 빛날 수 있다.

여성 인권에 대한 도전과 담론은 빛나는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처럼 거창한 일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영화 <와즈다>에서 10살 소녀 와즈다는 묻는다. "왜 여자는 저전거를 탈 수 없죠?" 그리고 와즈다는 자전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어른들의 겁박에도 물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여성 인권에 대한 도전은 사우디아라비아 소녀 '와즈다'의 자전거 타기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일상의 억압을 끊으려는 와즈다의 당돌한 도전은 기타의 금메달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취다. 마침내 얻은 자전거를 타며 질주하는 와즈다의 모습은 기타가 레슬링 경기장에서 이룬 한 판의 승리보다 통쾌하다. 여성주의로서 <당갈>의 성취가 아쉬운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됐습니다.
당갈 인도여성인권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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