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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읽은 과학책 35권 중에는 읽을수록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아까웠던 책이 있다. 플로리안 아이그너의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이다. 원제는 '우연, 우주, 그리고 당신'(Der Zufall, Das Universum und Du)이다.

저자는 양자물리학자다. 글을 너무 잘 쓰다 보니 저널리스트로도 활약 중이다. 글솜씨가 정말 탁월하다. 과학을 대중에게 나눠주는 것도 중요한 일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플로리안 아이그너와 같은 사람은 인류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이 책은 정말 시간 가는 걸 잊고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의 글은 매서울 정도의 단호함이 매력이다. 그 단호함으로 시간의 화살이라는 어려운 주제도 거침없이 단숨에 설명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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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화살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불가사의하고 신기한 것은 시간의 일방통행성이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엔트로피의 일방성, 즉 열역학 제2 법칙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 즉 'arrow of time'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시라. 이렇게 나온다.
Entropy (arrow of time)

그렇다. 시간의 화살은 엔트로피와 같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이라니, 정말 짜증나는 작명 아닌가? 엔트로피는 결국 경우의 수에 관한 문제다. 경우의 수가 많은, 즉 확률이 높은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동어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엔트로피다.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기만 한다는 이야기는 경우의 수가 많은 쪽으로 상황이 바뀌어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닫힌 계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지만 일단 신경 쓰지 말자. 우리 우주는 분명히 닫힌 계다.

저자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데려와서는, '시간의 화살', 즉 엔트로피의 성질을 상당히 쉽게 설명해준다.
"어떤 것이 흩어지면 다시 잘 분류된 원래의 상태로 쉽게 돌아가지 못한다. 우연은 정돈된 것을 섞어버리고 분류된 것을 혼합하며 정리된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방향을 가지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 본문 83~84쪽

쉽게 설명하기는 했는데, 좀 두루뭉술하다. 우연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요지다. 그래서 시간이 한쪽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향'이라는 단어를 주시하자.

열역학 제2법칙은 일반적인 물리법칙과는 다르다. 물리법칙은 대부분 등방성을 가진다. 어느 방향으로든 성립한다는 말이다. 마찰력을 잠깐 접어두고 생각해보자. 마찰력이 없는 당구대 위에서 당구공들이 서로 부딪치며 움직인다.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은 뒤 거꾸로 돌린다고 해서 이 영상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거꾸로 움직여도 운동량은 보존되고,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한다.

하지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은 어떤가? 거꾸로 돌리면 누구라도 이 영상이 거꾸로 재생된 영상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컵이 산산이 조각나는 일은 일어나도, 컵 조각들이 모여 컵이 만들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가역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비가역적이라는 말은 사실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절대 안 일어난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몇백억 년 정도에 한두 번은 깨진 조각들이 합쳐져서 컵이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우주의 나이는 150억 년도 안 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자연법칙은 조금 혼란스럽다. 이 법칙은 대부분의 자연법칙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유효하고 단지 통계적인 법칙이다. 자연은 반드시 이 법칙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실제로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중략) 서로 연결된 두 개의 가스 용기에 단지 스무 개의 원자만 가둬놓으면 우연히 스무 개 모두가 왼쪽 용기로 옮겨 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엔트로피가 감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시스템에서는 엔트로피 감소를 절대 볼 수 없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책 93쪽

이 자연법칙이란 열역학 제2법칙이다. 이 법칙은 다른 자연법칙과는 달리, '평균적으로 유효하고 단지 통계적인' 법칙이다. 언제나 맞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맞는다는 말이다. '대체로'라는 것이 한없이 100%에 가깝기는 해도 일단은 그렇다.

'절대' 엔트로피 감소를 볼 수 없다고 말한 직후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은 왜일까? 리처드 파인먼의 '경로 합'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확률함수 결과값의 가중평균, 즉 기댓값이다. 양자물리학 자체도 사실은 '평균적으로 유효하고 단지 통계적인' 이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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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광속 통신

'EPR'이라는 것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양자물리학을 온몸으로 반대하던 아인슈타인이 포돌스키와 로젠이라는 두 추종자를 끌어들여, 사고 실험을 한 것이다. 쌍생성으로 두 개의 입자가 발생했다. 두 입자는 각자 갈 길을 간다. 빛의 속도로도 한참 걸려야 닿을 정도로 두 입자가 아득히 멀어졌을 때, 갈라진 두 입자 중 한 녀석의 스핀 값을 측정한다. 양자물리학에 의해, 그 이전까지는 불확정 상태에 있던 입자 A의 스핀 값이 정해진다.

이와 동시에, 몇 광년이나 떨어진 입자 B의 스핀 값도 정해진다. 어떻게 몇 광년이나 떨어진 두 입자 사이에서 정보 교환이 발생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호기롭게 제기한 양자물리학에 대한 도전장이다.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곧바로 답장을 쓰던 보어는 EPR에 대해서는 무려 3일간이나 생각을 하고 답장을 썼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모순이라 주장하는 저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보어의 결론이다. 단지, 초광속 정보 교환은 아니다. 몇 광년이나 떨어지기는 했어도, 그 시점에 순간적으로 입자 B의 물리량이 정해지는 것이 맞다. 이것을 '얽힘'이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연구했고, 1964년 벨의 부등식에 의해 보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아인슈타인의 패배다. 양자물리학은 옳았다. EPR 사고실험에 관한 책으로는 아미르 D. 액설의 <얽힘>을 추천한다.

양자 얽힘이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이용한 초광속 통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측정 전에 이쪽 입자의 물리량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확정하느냐는 난관이 존재하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한 마디로 초광속 통신을 부정한다.
"양자 얽힘을 정보 전달에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29쪽

그 이유는 우연히 정해질 측정값을 미리 확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건 교양 과학이나 읽는 나도 안다. 뭔가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건 안 돼'라고 단언할 수 있다니, 대단한 용기다. 과학은 그 반대의 과감함, 즉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먹고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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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는 단어의 뜻

우주의 역사가 대략 140억 년 정도 되고, 지구가 45억 년 전에 형성됐으며, 40억 년 전쯤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나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현재 과학의 상식이다. 하지만 그런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타당한 의문이다.

사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우리 의식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진화론은 좀 거창한 측면이 있다. 훨씬 더 확률이 높은 사건은 피와 살과 뼈로 된 생명체가 아닌 단지 뇌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뇌는 우주와 생명이라는 망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볼츠만 뇌'다. 볼츠만은 열역학 법칙들을 발견해낸 과학자의 이름이다.
"조금 전에 어떤 의미나 목적 없이 우연한 요동에 의해 생성됐다가 다음 순간에 주위의 카오스에서 다시 소멸될 것이다. 이런 불쌍한 녀석을 '볼츠만 두뇌'라고 부른다.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즉흥적으로 이러한 볼츠만 두뇌가 생성되는 것은 우연의 수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우주의 우연한 생성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 104쪽

우리 은하라는 적당한 규모의 은하에, 중심부로부터 적당히 멀리 떨어진 위치에, 태양이라는 적당한 크기의 별을 가져다 놓고, 아주 미묘할 정도로 환상적인 위치에 지구를 위치시키고, 외부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주는 목성이라는 거대 행성까지 준비한 다음에야 생명 탄생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연에 우연이 겹쳐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광활한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이 당연한 의문에 저자는 또다시 '우연'이라는 키워드로 답한다.
"우연한 사건은 그러한 사건을 우연으로 느끼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성립된다. (중략) 우주에 어차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예측 불가능성'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인가를 가능성 있게 여기는 누군가가 없다면 가능성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 266~267쪽

이 얼마나 멋진 결론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건 우연 덕분이다. 그런데 우연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덕분이다!

저자는 인간이라는 종의 장점이 끝없이 질문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끝없이 샘솟는 호기심으로 인류는 과학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다가 어딘가에서 막히면 우리는 그걸 '우연'이라 이름 붙이고 회피해 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이란 개념은 우주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 생각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연은 재앙이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면, 삶은 훨씬 단조로웠을 것이다.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플로리안 아이그너 지음, 서유리 옮김, 동양북스(동양문고)(2018)


태그:#잡식성 책사냥꾼, #플로리안 아이그너,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우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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