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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잔지바르에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건물이다. 높은 시계탑 때문에 먼 곳에서 쉽게 눈에 띈다. 잔지바르버스터미널에서 인도양을 오른편에 두고 계속 도로를 따라 스톤타운 중심가로 가다보면 시계탑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 경이로운 집(House of Wonders)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잔지바르에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건물이다. 높은 시계탑 때문에 먼 곳에서 쉽게 눈에 띈다. 잔지바르버스터미널에서 인도양을 오른편에 두고 계속 도로를 따라 스톤타운 중심가로 가다보면 시계탑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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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에서 스톤타운은 매우 매력이 있는 곳이다. 대개 관광객들이 인도양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기 위해 사파리블루나 주변의 작은 섬으로 작은 목선을 타고 나가기를 원해서 그렇지, 3~4일 머물면서 미로를 헤매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상당히 앙증스럽고 귀여운 곳이다. 그만큼 머물수록 정이 들고 찾아다닐 곳이 많다. 스톤타운 비치에 앉아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만 바라봐도 하루가 다 갈 정도로 시간을 금세 빼앗아가는 공간이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무역하기 이전에 잔지바르 섬은 페르시아인(이란인)들이 무역항을 건설했다. 잔지바르라는 이름도 페르시아어 잔지(Zanzi: 검다)와 바르(bar: 사주해안), 즉 '검은 해안'이라는 의미다.

잔지바르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석조도시의 건축양식과 도시구조 속에 수 세기에 걸친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해상무역활동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노예제도 금지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주요 노예무역항 가운데 하나였으며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노예제도 금지의 캠페인을 펼쳤던 기지로도 유명하다. 

포로다니 정원(Forodani Gardens) 한가운데에 유명한 경이로운 집(House of Wonders)이 있다. 이 건물은 높은 시계탑 때문에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유명하다.

이집에 '경이로운'이란 명칭이 들어간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전기가 처음으로 들어온 점, 둘째는 잔지바르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점, 셋째는 당시 건축기술 수준으로는 높은 건물이었다는 점 등이다. 이 집은 오만술탄국의 술탄 바르가시(Sultan Barghash, wodnl 1870~1888)의 치세 중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인도와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그는 파이프를 통해 물을 도시까지 공급하는 큰 업적도 남겼다.
 
유서 깊은 석조건축물들로 인해 잔지바르의 전체 도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 포로다니 정원(Forodani Gardens)  유서 깊은 석조건축물들로 인해 잔지바르의 전체 도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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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된 1890년 이후 영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선교활동에 따라 고딕양식의 성공회 건물과 로마네스크 양식인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 건축됐다. 영국과 아랍의 지배는 공산혁명에 의해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이 탄생되는 1964년에 종지부를 찍는다.

1964년 10월 29일 탕가니카와 잔지바르는 나라 이름의 앞 글자를 합쳐 탄자니아 연합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을 수립해 오늘에 이른다. 그 이후 석조 건축물들은 퇴락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역사는 세계적인 록밴드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됐다.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 보호령이었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8살 때 인도계 페르시아인 피를 가졌던 아버지의 강력한 철학과 신념에 의해 인도 뭄바이의 영국계 학교로 유학을 가서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머큐리가 16세에 다시 잔지바르로 돌아왔을 때는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인도, 파키스탄인들이 학살을 당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17세인 1964년에 가족 전체가 잔지바르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머큐리의 영국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와 <보헤미안 랩소디>
 
아라비아와 유럽의 전통이 혼용된 스톤타운의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좁은 골목길로 아랍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 스톤타운의 미로, 골목길 아라비아와 유럽의 전통이 혼용된 스톤타운의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좁은 골목길로 아랍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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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타운의 또 다른 묘미는 미로의 골목길 안에 가방, 티, 모자, 선글라스, 숄, 비키니 수영복 등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 스톤타운의 액서사리 잡화점 스톤타운의 또 다른 묘미는 미로의 골목길 안에 가방, 티, 모자, 선글라스, 숄, 비키니 수영복 등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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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국과 일본에서 광풍을 몰아왔다. 이 영화는 40~60대 중년들에게 1980년대의 추억을 소환해왔다. 1970년대의 록큰롤과 고고에 이어 1980년대의 록과 디스코의 유행은 대한민국의 밤 문화를 뒤바꿔놓았다.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서의 2류 밴드의 공연은 가난과 삶에 찌들었던 소시민 직장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80년대의 추억을 경험한 적이 없던 청년세대들도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퀸의 다양하고 웅장한 록밴드의 음악을 어릴 때부터 부모를 통해서나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록의 전설로 자리매김됐다. 이러한 축적된 경험과 잔상은 브라이언 싱어감독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폭발했다. 2018년 10월 31일 개봉된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100만 명만 동원해도 성공이라고 보았지만, 예상을 깨고 황금돼지해 1월 중순까지 1000만 명에 가까운 988만 명을 동원했다.
 
아쉽게도 페리와 보트의 스케줄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없어 프레디 머큐리의 저택을 찾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 스톤타운의 프레디 머큐리의 저택(사진 출전 : BBC코리아) 아쉽게도 페리와 보트의 스케줄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없어 프레디 머큐리의 저택을 찾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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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퀸의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에 가깝다. 따라서 머큐리의 성공과 실패의 삶을 세밀하게 접근한다. 성공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프레디 머큐리 자신의 창의성과 천재성을 들 수 있다. 그는 록과 록큰롤이라는 대중음악의 자유분방함에 미쳤던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엄격함이 몸에 배어있던 아버지와 머큐리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고 자주 충돌하였다. 둘째, 주류인종이 아닌 다른 인종으로서의 아픔과 고뇌였다. 머큐리는 이슬람 흑인들이 대세인 잔지바르에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인도계 페르시아인인 그가 적응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그는 더구나 앞 이빨도 뻐드렁니였고 턱도 툭 튀어나와서 여성들에게도 호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고독한 머큐리는 음악과 스포츠밖에 매달릴 다른 어떤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영국 이주 후에 여자 친구 메리가 무명 밴드 리더 보컬이었던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로맨스에 빠지게 된다. 머큐리가 메리 오스틴에게 남긴 재산은 우리 돈으로 약 290억 원 상당의 런던 저택과 약 112억 원 가량의 재산, 또 퀸의 저작권 수입 중 자기 몫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확인하게 된다.

셋째, 머큐리는 잔지바르와 인도 그리고 영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예민한 청소년기에 경험함으로써 구존동이(求存同異)를 몸에 체득하게 된 것이다. 소위 똘레랑스를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클래식의 환상곡과 대중의 팝음악을 뒤섞을 줄(Cross-over) 알았고, 소프라노의 경우, 올라갈 수 있는 높은 옥타브의 성악적 음색의 목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조화의 조화'가 영화 제목이 된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명곡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머큐리가 스페인의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의 열렬한 팬을 자처했고, 그녀와 함께 앨범 'Barcelona'를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야자나무와 코코넛나무, 파인애플 나무 등을 조경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잔지바르 레스토랑의 점심시간의 풍경이다. 인도양 바다의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서 아늑하고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 스톤타운의 야외 카페 야자나무와 코코넛나무, 파인애플 나무 등을 조경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잔지바르 레스토랑의 점심시간의 풍경이다. 인도양 바다의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서 아늑하고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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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타운은 신비로운 '미로'로 구성되어 있다. 2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작은 도시에 관광객들이 더 많이 몰려든다. 애초에는 스와힐리(Swahili) 사람들의 해상 무역 활동의 중심지였으나 아라비아, 이슬람, 포르투갈, 영국 등 다양한 사람들이 침입하여 독특한 문화를 조성했으므로 볼거리가 많다.

스톤타운의 미로 속에 프레디 머큐리의 부모와 머큐리가 살았던 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인도계 페르시아 인이었으며 조로아스터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부친과의 갈등이 많았었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종교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과거에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렀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불이 타오르는 작은 제단 앞에서 제례를 치렀으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불을 숭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신자들은 불 자체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나무 막대기 헌주 등의 봉헌물에 불꽃과 냄새를 피워 경배를 표현했던 것이었던 것이다.

퀸 노래 한번 못 들어봤지만...
 
 아프리카 밴드와 유럽의 다른 밴드와의 차이점은 기타, 드럼, 키보드, 리드보컬 등으로 대개 구성되지만, 그 악기이외에도 젬베(Djembe), 콩가(Conga), 키혼(Cajon) 중에 일부 타악기가 첨가되는 것이다. 스톤타운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성수기에 ‘재즈 페스티벌’, ‘레게 페스티벌’ 등의 이름으로 밴드공연이 계속 이어진다.
▲ "레게 페스티벌"의 밴드공연  아프리카 밴드와 유럽의 다른 밴드와의 차이점은 기타, 드럼, 키보드, 리드보컬 등으로 대개 구성되지만, 그 악기이외에도 젬베(Djembe), 콩가(Conga), 키혼(Cajon) 중에 일부 타악기가 첨가되는 것이다. 스톤타운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성수기에 ‘재즈 페스티벌’, ‘레게 페스티벌’ 등의 이름으로 밴드공연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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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가 작곡한 퀸 음악에는 런던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양적인 신비로운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렇다. 감미로운 멜로디의 이 노래에는 "Mama, just killed a man(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라는 충격적인 가사가 나온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대체로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이기에 자신의 '남성성'을 죽여 버렸다고 고백하는 내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여기고,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억압하는 '아버지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프레디 머큐리의 저항이라고 새롭게 해석했다. 흥미로운 견해이다. 이렇게 프레디 머큐리는 엉뚱하고 도발적이며 창의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렇게 먼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에도 일식 레스토랑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관광객이 일본관광객보다 더 많이 찾아가는데, 왜 한식 레스토랑은 없을까? <정(政)>이라는 일식 레스토랑의 젊은 사장은 직접 스시를 정성껏 만드는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여주면서 관광객들에게 흥미를 자아낸다. 하와이의 30~ 40명씩 줄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인기 ‘일식 우동집’도 조리사 6 ~ 7명이 면을 수타하고 조리하는 과정을 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 스톤타운의 일본 스시집 이렇게 먼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에도 일식 레스토랑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관광객이 일본관광객보다 더 많이 찾아가는데, 왜 한식 레스토랑은 없을까? <정(政)>이라는 일식 레스토랑의 젊은 사장은 직접 스시를 정성껏 만드는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여주면서 관광객들에게 흥미를 자아낸다. 하와이의 30~ 40명씩 줄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인기 ‘일식 우동집’도 조리사 6 ~ 7명이 면을 수타하고 조리하는 과정을 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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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타운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살던 집도 보존되어 있지만,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유산인 록음악과 밴드공연이 20여 년째 한여름 밤을 수놓고 있다는 점이다. 계속 이동을 해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저녁을 일식 스시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먹고 레게 페스티벌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100여 명의 관광객들이 듬성듬성 잔디가 있는 흙바닥에 앉아서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칠흑 같은 밤이 되자 거의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케냐, 탄자니아 맥주병을 손에 잡고 마시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의 성곽 같은 내부 뜰에서 미국이나 유럽관광객들은 맥주병을 들고 마시면서 ‘레게 리듬’을 따라 흥겹게 몰입해서 춤을 추고 있다.
▲ 사이키델릭 조명 아래의 레게 페스티벌을 찾은 관광객들 중세 유럽의 성곽 같은 내부 뜰에서 미국이나 유럽관광객들은 맥주병을 들고 마시면서 ‘레게 리듬’을 따라 흥겹게 몰입해서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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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청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밴드 공연의 중간 중간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대로 올라서는 디제이(DJ)가 흥겨운 댄스뮤직을 틀어놓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모두 일어서서 춤추라'고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리드보컬을 비롯해서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하는 멤버들이 아프리카 특유의 도속적인 의상과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유럽의 밴드와 달리 리듬 자체가 바다에서 서핑보드로 느린 파도타기 하듯 흐느적거리는 음색과 선율이 강렬했다. 밴드의 음악형식은 유럽식인데 비해, 내용은 아프리카 고유의 리듬이었다.
▲ 마지막 레게페스티벌의 출연팀 리드보컬을 비롯해서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하는 멤버들이 아프리카 특유의 도속적인 의상과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유럽의 밴드와 달리 리듬 자체가 바다에서 서핑보드로 느린 파도타기 하듯 흐느적거리는 음색과 선율이 강렬했다. 밴드의 음악형식은 유럽식인데 비해, 내용은 아프리카 고유의 리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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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이가 틀어주는 음악은 디스코풍의 댄스뮤직이었지만, 공연밴드의 곡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레게뮤직이어서 푸른 바다에서 서핑보드로 느린 파도타기를 하는 듯한 리듬이었다. 마치 자메이카나 브라질의 해변에 있는 클럽을 찾아온 느낌이었다.

퀸의 'Somebody To Love'를 한 곡쯤 불러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으나 끝까지 아프리카 토속성이 섞인 레게 뮤직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밴드의 리드싱어가 입은 의상이나 쓰고 있는 모자가 이슬람풍이라 이곳이 잔지바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마지막 밴드의 공연을 마치고 선선한 해변의 밤공기를 마시며 호텔로 돌아왔다. 마음은 파도치는 잔지바르의 인도양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태그:#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레게 페스트벌, #프레디 머큐리 생가, #스톤타운 , #잔지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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