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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이 기준인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비혼은 '천덕꾸러기'거나 '낯선 존재'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비혼 인구가 날이 갈 수록 증가하고, '정상가족'의 틀이 조금씩 깨지면서 새로운 명절문화를 원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로비혼러'들에게 다른 명절의 가능성을 들어봤습니다.[편집자말]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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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번 추석엔 집에 못 가. 출장 가야 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회사에서 새로 맡게 된 과제가 미국의 어느 대학과 함께 작업해야 하는 일이었다. 과제 진행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에 가봐야 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다른 일도 맡고 있어 평일 해외 출장을 쉽게 허락받을 수 없었다.

마침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내 명절을 희생하기로 했다. 연휴에는 다들 잠시 일을 멈추니, 그 기간에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회사에 말했다. 사실, 명절 내내 어른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출장을 핑계로 그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당시 친척 어른들에게 나는 서른을 넘긴 '노처녀(!)'였다. 고향에 내려가면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뻔히 짐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직장도 구했으니 남자도 데려와야지."
"결혼은 안 할 거야?"
"더 늙어서 애 낳으면 키우기도 힘들다니까!"
"네가 계속 그러고 있으면, 셋째는 언제 (시집) 가냐?"


명절을 피하는 방법  
나의 고향은 일몰이 끝내주게 멋진 서해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 고향의 일몰 나의 고향은 일몰이 끝내주게 멋진 서해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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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 집 4남매의 큰딸인데, 둘째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당시 주변 어른들이 하도 내 걱정을 하셔서 마음이 불편했다. 큰딸이라 느낄 수밖에 없던 부담이 짜증으로 쌓였던 시기였나 보다. 부모님은 내가 느끼는 부담을 인정하고 별말씀을 안 했는데, 1년에 두 번 만나는 친척들의 걱정을 듣다 보면 화부터 치솟아 오르곤 했다. 만나서 싸우는 것보다 피하기로 결정했다. 연휴 출장을 결정한 이유였다.

"언제 가는데?"
"연휴 시작하는 주말에 출발해야 해. 돌아와도 집에 갈 시간은 없을 거야."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전화기 너머의 아빠 목소리에서 걱정과 불만이 느껴졌다. 먼 길을 떠나는 딸이 걱정스럽지만 하필 명절에 집에 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게 불만이셨을 테다. 완고한 원칙주의자인 아빠 성격에 혼자 여행을 가는 거면 혼을 내서라도 불러들였겠지만, 회사 일이라니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화를 속으로 삭이신 거다.

어쨌거나 나의 첫 번째 명절 탈출은 회사의 도움으로 그렇게 시작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명절 연휴를 보낸다. '결혼이 늦어져서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쳐야 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이다. 도리어 집에서 빈둥거리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결혼 안 한 시누이'로 신분이 전환됐다. 세월이 지나 4남매 중 막내 남동생까지 결혼하면서부터다. 이제 명절이면 고향 집은 그 유명한 '시월드'가 된다.

"애들이 이제 출발했대."
"그래? 늦겠네. 엄마, 음식은 조금만 하자. 애들 오기 전에 끝내자고."
"알았어. 그래도, 일찍 와서 같이하면 좀 좋니."
"됐어. 많이 할 것도 아니면서. 시어머니 노릇 좀 해보려고?"
"그런가? 하하하."


지난 추석이었나 보다. 엄마가 전화를 끊으며 투덜거리신다. 사연을 들어보니 아들네 가족이 이제야 출발했다는 모양이다. 인천에서 고향인 서산까지 내려와야 하는 길이라 막히는 것이 뻔한데도 서운하신가 보다. 우리는 서로가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결혼 안 한 시누이' 노릇을 할 거냐며 한바탕 웃었다. 사실, 나야 '시누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된 '며느리'에겐 우리 집이 익숙한 곳은 아닐 테니, 서로가 조금은 조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내 선택이 마음에 든다
 
설연휴를 틈타 엄마와 함께 일본의 온천에 갔었다. 근사한 료칸에서 대접을 받고 있으려니 엄마도 마음이 놓이셨나보다.
▲ 엄마와 일본 온천여행  설연휴를 틈타 엄마와 함께 일본의 온천에 갔었다. 근사한 료칸에서 대접을 받고 있으려니 엄마도 마음이 놓이셨나보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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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아빠가 먼저 떠나신 후, 우리 가족의 명절은 훨씬 단출해졌다. 아빠가 계실 때는 친척들도 어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받아들이려 하지만 아빠가 보셨으면 안타까워하시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쓸쓸하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거리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 예전 같으면 연휴 동안 집을 비우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다면, 요즘엔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명절을 보낼 수 있다.

어느 설날엔 엄마와 함께 온천에 다녀왔고, 추석 연휴를 끼고 일주일 동안 라오스 여행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나에게 연휴는 더 이상 불편한 시간이 아니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마흔다섯의 비혼임을 인정해줬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명절 연휴 일정을 채워 넣어도 나의 그런 선택을 존중해준다. 내가 명절 때 맡아야 하는 일이 있는데 자리를 비우면, 가족 중 누군가 그것을 기꺼이 대신 맡아준다. 나도 그들의 일을 대신해야 할 때가 온다면, 기꺼이 맡아 줄 준비가 돼 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자유'는 그동안 우리 가족 모두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 믿는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살아왔던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세상에 내보낸 네 명의 아이들은 덕분에 자신의 방식대로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됐다. 내가 가족의 골칫거리인 '노처녀'로 머물지 않을 수 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이 얘기하던 '평범한 삶'에 속하지 못했다. 이십 대에 결혼하지 못했고, 삼십 대에 아이를 낳지도, 학부모가 되지도 못했다. 마흔이 된 주변 친구들이 아이들의 대학 입시로 걱정할 때, 나는 그런 걱정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40대 비혼인 나의 삶은 실패작일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독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회사에서도 매일 버티는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내가, 정확히는 나의 자유가 마음에 든다.

"설 연휴에 어디 간다며."

지난주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가 묻는다. 난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이 59년 만에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보겠다며 UAE행 비행기를 예약해둔 차였다(결국, 대한민국이 8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여행은 하루 전에 급하게 취소했다). 엄마는 이제 철없는 큰딸이 어디를 가든 크게 걱정하지 않으신다. 가족의 믿음은 내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문이고 든든한 배경이다. 또한, 그들의 믿음이 있기에 나는 삶을 더 잘 살고 싶다.

인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중년을 넘어가면서 나이 듦과 병약해짐에 대한 걱정이 늘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지금의 내가 맘에 든다. 늙은 엄마의 걱정거리이거나 우리 집 며느리의 '못된 시누이'가 되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의 결과물이니 말이다.

태그:#비혼의 명절나기, #못된 시누이, #시월드, #가족간의 거리, #비혼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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