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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희생과 침묵을 요구하는 명절문화에 반기를 드는 며느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며느라기'를 지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교회를 믿어야겠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결의에 차 있었다. 말도 안 맞는 저 한마디를 굳건하게 내뱉은 엄마는 과연 무슨 생각이셨을까.
 "교회를 믿어야겠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결의에 차 있었다. 말도 안 맞는 저 한마디를 굳건하게 내뱉은 엄마는 과연 무슨 생각이셨을까.
ⓒ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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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믿어야겠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결의에 차 있었다. 큰 결심을 한 듯 나를 불러 말씀했다. 하느님을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닌 믿어야겠다니. 말도 안 맞는 저 한마디를 굳건하게 내뱉은 엄마는 과연 무슨 생각이셨을까.

"엄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 그러더라."


또다시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는 일 년에 제사를 8번 지냈다. 장남과 결혼했고, 시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셔서 시집올 때 첫인사를 제사상으로 드렸다. 그 제사상을 일 년에 8번 차려야 하는 줄 알았다면 엄마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몇 년 후 시어머니인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고조모와 고조부 제사, 거기다가 설과 추석까지. 합쳐서 총 8번. 30년을 넘게 엄마가 차려왔을 제사상을 생각하면 그 말 한마디가 납득이 되고도 남았다.

"엄마, 그 말은 어디서 들었어?"
"앞 동에 아줌마는 교회를 다니는데 제사를 아예 안 지낸단다."
"엄마. 엄마가 혼자 교회 다닌다고 제사를 안 지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안이 다 교회를 다녀야 하는 거야."
"그러냐? 안 되는 거냐?"


엄마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일 년에 8번을 이혼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엄마는 혼자 힘들어 죽겠다며 한탄을 쏟아냈고, 아빠는 제사상 한번 차리는 거 가지고 유난을 떤다며 당연히 큰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춘기 때는 언성을 높여 싸우는 부모님을 보고 차라리 이혼을 하라며 집을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당연히 엄마 편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해하겠는데, 증조와 고조가 붙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사실 너무 까마득했다. '증조, 고조'라는 단어는 조선 시대나 삼국 시대처럼 나에게는 그저 다 똑같은 머나먼 옛날이다. 가늠이 잘 안 된다. 조상님께는 죄송하지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 옛날 분들의 제사 때문에 일 년에 여덟 번을 사네 죽네 해야 한다면 이건 뭔가 좀 아니지 않은가 싶었다. 엄마가 많이 안쓰러웠다.

엄마는 큰며느리였다. 그 위치에 충실하기 위해 매번 장을 보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탕을 끓여 가짓수에 맞게 제기에 올려 상을 차려내는 행위를 오랫동안 묵묵히 해왔다. 나도 일찍이 엄마 옆에서 그 일을 도우며 함께 해왔지만 오랜 시간 쪼그려 앉아 전을 종류별로 부치는 일 하나만으로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고된 가사노동 뒤 돌아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친척들의 시선과 무심한 아빠의 말이었다. 엄마가 이혼을 외치는 게 당연했다.

엄마는 매번 제사상을 차리며 나에게 너는 절대로 장남에게 시집은 안 보낸다고, 엄마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장남만 아니면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장남은 안 된다'는 엄마의 조건은 내 사랑에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나는 결국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나 또한 명절이 오면 시어머님을 도와 차례상을 차리고 제사도 지낸다. 딸은 이래저래 엄마를 닮나 보다.

하지만 남편은 나에게 그걸 당연한 일이라 절대 말하지 않는다. 내가 시어머님과 전을 부치고 있으면 많이 미안해하고, 제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몸은 괜찮냐며 고맙다고 몇 번을 반복해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피로하지 않다. 제사가 끝난 후 엄마는 아빠에게 이혼을 외쳤지만 나는 남편에게 아무것도 외치지 않는다.

명절과 제사 때마다 엄마에게 필요했던 건 큰며느리가 제사상을 준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친척들의 마음과 그 수고를 알아주는 남편의 말 아니었을까. 엄마도 단순히 본인 힘든 게 싫어 이혼을 외쳤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제사 후 아빠가 고생 많았다며 엄마의 수고와 며느리로서의 노고를 알아줬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내미는 돈 봉투보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공감이 엄마에겐 필요했다.

길고 힘든 엄마의 투쟁
 
 일 년에 8번, 엄마는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쳤을 것이다.
 일 년에 8번, 엄마는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쳤을 것이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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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8번, 엄마는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제사를 합쳐 명절 두 번과 합제 한 번으로 정리했다. 일 년에 총 세 번으로 준 것이다. 삼십 년 가까이 이혼을 외치고 난 후 얻어낸 합제였다. 길고 힘든 엄마의 투쟁이었다.

이 세상의 며느리들이 명절과 제사를 반기지 않는 건 제사 준비는 며느리가 다하고 제사 음식은 친척들이 다 먹는 것 같은 일종의 허무함 때문일 것이다. 장남의 아내인 나 역시 명절과 제사 때마다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음식을 준비해 차려낸다. 그러고 나면 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들의 재배(再拜)가 다 끝날 때까지 주방 한쪽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 풍경이 여전히 멋쩍다.

조상님들께 '제가 열심히 준비해 차렸으니 맛있게 드세요'라고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제사상 한쪽에 '차려낸 이 : 며느리'라고 새기고 싶었다. 수고는 때로는 생색으로 조금 풀리기도 하니까.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듯, 제사상도 '당연히' 며느리가 차리는 게 절대 아니다. '힘들게 고생하며' 차려내는 것이다.

어김없이 명절은 또 다가온다. 내가 시댁에서 차례상을 차릴 때 엄마도 집에서 차례상을 준비하겠지. 나도 엄마도 또다시 '며느리로' 충실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결혼 후 첫 명절을 보내고 친정에 갔을 때, 엄마는 나를 보고 제일 먼저 이 말을 내뱉었다.

"차례상 차리느라 고생했지? 우리 딸도 이제 며느리라... 고생했어!"

며느리는 며느리를 알아보는 법. 사실 그 말은 누구보다 엄마가 먼저 진작에 들었어야 할 말이었다. 이번 설, 시댁에서 상차림을 다 치우고 엄마에게 가면 내가 먼저 너무너무 고생 많았다고 엄마를 꼭 안아줘야지.

딸이 엄마에게, 며느리가 며느리에게 해주는 위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며느리들이 받아야 할 최소한의 보답. 물론 말 한마디로 그 모든 수고가 보상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그 한 마디조차 잘 해주지 않는 남편들이 있기에 아내와 며느리들은 명절이 하나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열심히 차려내면 뭐하나. 먹기만 할 줄 아는데.' 엄마도 이 불평을 달고 살았다. 그 먹는 입으로 말도 챙긴다면 좋을 텐데.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으니 문제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다가가 나처럼 똑같이 하라고 시켜볼까 한다. 토닥토닥 말로도 행동으로도 엄마의 품을 위로하라고 말이다. 그러면 이번엔 적어도 엄마가 이혼을 외치지 않는 조용한 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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