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컷.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이 한국을 휩쓸었다. 퀸을 잘 모르던 젊은층부터 원래 퀸을 좋아했던 중장년층, 퀸의 광팬이 아니었더라도 뒤늦게 팬덤에 합류한 이들까지. 한동안 포털사이트의 영화 리뷰가 <보헤미안 랩소디>로 도배됐을 정도였다. 관객들은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불러내 다시 각인했다. 다들 각각의 사연으로 옛 추억을 소환하면서.
 
최근 영화 <레토>를 봤다. '소련'이라 불렸던 시대, 억압에도 불구하고 '록'을 성취했던 젊은 음악인들의 이야기였다. 영화는 '빅토르 최'(유태오)를 통해 서사를 풀어낸다. 빅토르 '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문득 프레디 머큐리와 빅토르 최가 같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프레디와 빅토르 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컷.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프레디와 빅토르에게서 몇 가지 유사성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소수민족 출신이자 전설의 뮤지션이고 또한 일찍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둘은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소수자'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파키'라고 종종 경멸 당하듯, 프레디는 파키스탄계 이주민이다. 공항 노동자로 일하며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망을 갈고 닦는다. 공부로 승부하는 것이 이주민 성공 신화의 바로미터라고 믿는 아버지와 불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음악에 열중하는 프레디를 한심해 한다.
 
빅토르 최는 '까레이스키'(연해주에 살다 스탈린 소수민족 차별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진 '고려인'을 이르는 말-기자 주)의 후예이다. 내게 빅토르 최가 애틋하게 느껴졌던 건, 시시한 민족주의의 유산이었을까.
 
사실 빅토르와 '까레이스키'를 연관 짓는 건 적어도 <레토>에선 의미가 없다. 빅토르가 그의 뿌리인 한국에 천착하는 서사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 그는 부조리함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려 했고, 막 명성을 얻는 데서 영화는 끝난다. 빅토르에 관한 힌트는 오히려 <레토>의 공간적 배경이 '레닌그라드'라는 데 있다. '레닌그라드'가 어디인가? 러시아 혁명의 중심지였으며, 제2차 대전 당시 4백만 명이 넘는 최악의 사상자를 낸 곳이다. 전후 도시가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전쟁의 상흔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터, 그가 반전 노래를 부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지금은 옛 이름을 회복해 상트페데르부르크라 부른다.
 
이 둘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록'이라는 음악적 지향이다. 둘 다 싱어송라이터이다. '록'을 지향했지만, 프레디가 광폭의 음악성으로 장르를 넘나들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곡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 넣은 그의 작업에서 천재성뿐만 아니라 장인 정신까지 엿보인다. 명곡의 반열에 오른 '보헤미안 랩소디'도 너무 길다는 이유로 음반사가 퇴짜를 놓지만, 음악적 소신을 굴하지 않았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그의 무수한 명곡은 엄청난 도전의 산물이다.
 
빅토르 역시 록을 추구하지만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한다. "왜 자꾸 내 음악을 바꾸려 들지? 그냥 부르면 안 돼?"라고 밴드 친구들에게 항의한 빅토르. 그는 록이라는 장르에 얽매여 있기보다, 자기만의 색이 있는 음악을 구축하려 한다. 프레디와 빅토르 둘 다 밴드를 결성해 활동한 점도 유사하다. 프레디의 '퀸'은 물론 빅토르도 '키노'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며 명성을 얻는다. 퀸이 막대한 자본의 힘으로 앨범을 만들고 히트하며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과 달리, '키노'는 모든 사정이 어려웠다. 사회주의 록 밴드의 비애라고 봐야 할까.
  
 <레토> 스틸컷

<레토>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 세미콜론 스튜디오

 
구 소련은 록을 젊은이들의 정신을 망치는 음악이라고 매우 경계했다. 레닌그라드 록 콘서트장에서 공연을 하려면,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음악인지 사상적으로 검열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앨범 작업도 사상적으로 당에 우호적이어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여건이 열악했다. 어렵게 만든 데모 테이프가 흥행에 성공하며 키노는 록 밴드로 명성을 얻는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 레닌 스타디움에서 6만 명이 넘는 관중을 불러냈다. 당시 소련의 엄혹했던 분위기를 반영할 때, 이는 퀸이 라이브 에이드 런던 공연에서 동원한 7만 명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공이다. 빅토르는 러시아 록 역사의 '전설'이다.
 
세 번째 공통점은 프레디와 빅토르 두 사람 모두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알려주듯이 1991년 에이즈로 사망한다. 45년을 살았다. 빅토르는 199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는데, 겨우 28세였다. 빅토르에 비하면 프레디는 오래 살았다. 빅토르의 사고는 의혹투성이였는데, 당시 반전을 노래했던 빅토르를 제거하기 위해 KGB가 꾸민 음모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미스터리인 채로 남아 있다. 소련은 1991년 말에 붕괴됐다.
 
'소수자성'은 프레디와 빅토르의 정체성이었을까?
  
 <레토> 스틸컷

<레토>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저 퀸의 멤버 중 하나로만 기억하던 프레디 머큐리를 다시 새긴 건, 그가 '소수자'여서다. 프레디는 성소수자임을 공식적으로 커밍아웃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으로 보여 주었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던 시절이라 그의 성소수자성은 줄곧 가십거리로 소비되며 그를 괴롭혔다. 이런 의문도 든다. 프레디는 '파키'라는 억압받은 소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는 스스로를 프레디 머큐리로 명명하면서, 파키스탄인 '파로크 불사라'(프레디의 본명)와 이별했던 것은 아닐까?

<레토>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소수자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직 러시아 록의 전설인 빅토르 최와 그의 동료 뮤지션을 현재로 불러내 생생히 살려낸다. 그가 까레이스키의 후손이라 끌렸던 건, 강제 이주로 고생했을 그들의 고난을 떠올린 내 감상 탓이다. <레토>를 보기 전까지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던 내가, 그를 보며 바로 까레이스키로 호명하다니.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까레이스키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역대 정부들이나 러시아 록 레전드가 까레이스키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에 공명했던 나나 부끄럽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까레이스키를 제대로 기억하는 방식은 지금 한국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주민이나 난민에게 인류애를 발휘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말이다.
 
끝으로, 매우 유사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 둘을 그린 영화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자. <보헤미안 랩소디>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그 열풍이 증명할 터. 단지 퀸이라는 프리미엄이 흥행에 기여한 것일까. 반면 <레토>를 멀티플렉스 개봉관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두 거물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하나 마나한 상상을 해본다. 이들이 함께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은 어떨까? 사후에라도 만났다면 록의 향연을 펼쳤으리라. 사람은 가도 음악은 영원한 법이다. 영화 두 편은 '짧고 굵게' 두 천재 뮤지션의 삶을 응축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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