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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부분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얼마나 내 감정을 드러내도 될까. 내가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가령 친애하는 트랜스젠더 동료를 잃고 장례식에 참석한 다음날 나는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어느 날은 육군이 조직적으로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했고 그 중 한 사람을 결국 재판정에 세웠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슬픔과 분노, 모멸감이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나의 세상에 파란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도 주변 사람들은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울어도 화를 내도 그 순간에 결국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 하거나 불편해 했을지도 모른다. 그 감정을 회사가 아니라 시위의 현장에서나 느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이 현실이 됐던 적도 있다. 언젠가 한때 몸 담았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사무실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의 그런 행동이 거꾸로 자기를 소외시킨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때는 올랜도 게이클럽에서 대규모 총격 사건이 있었던 시기였다. 바다 건너에서 나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며칠을 장례를 치르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내게 충고를 했던 그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인권단체에서 일을 하는 지금은 사정이 훨씬 낫다.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하니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강렬했던 소외의 경험과 그것이 남긴 영향이 씻겨져 나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도 일단 내가 원하지 않는다. 마돈나의 노래 'Living for love'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용서할 수는 있어, 하지만 절대로 잊지는 않아"

남자들이 말하는 '충돌'은 진실을 가린다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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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어온 페미니즘 열풍 그리고 미투 운동 이후 쏟아져 나오는 기사를 보며, 요즘 나는 다시금 내가 겪었던 소외의 순간을 곱씹고 있다. 이 기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서로를 향한 적대와 갈등이 지나치게 극심해지고 있다'고 말이다.

이는 대부분의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들이 갑자기 화를 내고 시끄러워졌다고 이야기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북미에서 발생했던 페미니즘을 향한 '백래시(역풍)'의 재현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저런 식의 말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의 극심한 성차별과 만연한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사람이 움츠러들고 질문하게 만든다. 스스로가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이런 의문은 당사자가 일상에서 차별과 혐오를 마주할 때 침묵하도록 유도한다.

남자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충돌'과 '갈등'은 진실을 위장하는 말이다. 여성을 향한 혐오와 여기에 대항하는 분노는 대칭적이지 않다. 두 정서는 대등하지도 성질이 겹치지도 않는다.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오드리 로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혐오는 아주 싫어하는 감정이 적의와 결합된 감정적 습관이자 마음의 태도다. 남자들은 남성성에 속해선 안 된다고 여기는 부정적인 속성들을 여성성에 부여한다. 그리고 이를 이유로 여자들을 멸시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혹은 유약하고 수동적이어서 안 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여성 개인이 그러한 '여성성'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까?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게 규범을 벗어난 여성들을 억압한다. 여성들을 차별해도 괜찮은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남자들이 남성으로서 가졌던 기득권이 무너짐을 의미한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이 멸시했던 여성들을 거꾸로 이상적이라 찬양하곤 한다. 그래야만 여성들을 분리하고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남성들이 어떤 면에서든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여성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혐오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누가 수용되고 배제되는지를 알려주는 은밀한 압력이기도 하다.

남자들의 혐오와 여성들의 분노가 절대 같지 않다

결과적으로 혐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개인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정의할 힘을 빼앗는다. 고정된 여성성에 맞추어 살면 박해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그렇게 차별과 억압만이 존재하는 위치로 여성들이 스스로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삶인가?

때문에 로드는 이런 말을 한다. 혐오는 파괴적이라고. 혐오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맞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삶이 아닌 것을 삶인 척 가장하고 살라는 요구는 죽어 있는 상태로 지내라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는 다르다. 다시금 로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분노는 사람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 목적은 변화에 있다. 그래서 분노는 잘 활용한다면 결코 유해하지 않다.

아마도 오드리 로드가 말했던 '왜곡된 관계'에는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맺는 관계다. 성차별주의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여성은 고유한 개인이 아니라 오직 '여성'으로서만 남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여성은 어떤 공간에서든 아내이거나 딸 혹은 성적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회사에서든 학교에서든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혹은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공동체 내 성차별과 성폭력 기사들이 그 증거다. 지금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러한 '왜곡된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다.

하지만 슬프게도 남성들은 이 왜곡된 관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관계가 자신들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한 것이었고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를 오히려 '역차별'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 하겠다'와 같은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남성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미 알고 있다. 여성들이 분노를 수용할 때 자신들이 내려놓는 것은 결국 차별로 만들어진 부당한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애초에 평등한 관계라면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분노가 전혀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
 
 혐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개인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정의할 힘을 빼앗는다.
 혐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개인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정의할 힘을 빼앗는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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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겪었고 이를 명확하게 인식했으며 그래서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 사회가 당신이 남자들을 적대하며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말해도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차별받는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할 때만 침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를 인정한다면 그들은 변화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분노를 회피하고 억누르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남자들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설득하고 설명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이롭지 않겠냐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내려놓는 것이 어떻겠냐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척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과격하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회유도 전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변화하는 것은 결국 남자들의 몫이다. 그들의 책임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배려하고 챙겨줄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들이 말하는 남성들을 향한 '부드러운 설득의 전략'은 이미 인류 역사에서 실패하길 수 없이 반복했다. 충분히 시끄럽지 않다면 남자들은 일단 듣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남자들은 변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느끼고 표출했던 분노가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하며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발견한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혐오를 통해 여성들을 멸시하고 차별했으며 폭력에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금 <시스터 아웃사이더>에 적힌 오드리 로드의 말을 빌려오고 싶다.
 
"내 안에 있는 힘을 찾아내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든 두려움을 헤치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안의 가장 상처받기 쉬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내가 느껴온 고통을 인정한다면, 내 적들이 그 고통의 원천을 무기로 이용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내 적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온 역사가 그들의 무기로 이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내 자신에 대해 내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나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데 이용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것인가

분노는 스스로가 억압받고 멸시받은 경험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성차별주의를 인정할 때 발생이 가능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차별과 혐오가 자신을 마음대로 깎아내리는 것을 거부하게 만든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를 벗어나 온전하고 고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말하자면 분노는 차별과 혐오 속에서도 한 개인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생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살아남았기에 분노했으며 또한 분노했기에 자신을 지켰거나 회복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일이다.

아마 남자들은 이토록 소중한 분노를 끝까지 분쟁의 씨앗처럼 여길 것이다. 페미니즘의 물결과 미투 운동에 회의적인 기사들도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남자들의 말들도 줄지 않을 것이다.

물론 때로 유혹은 강력하다. 나 또한 소수자로서 목소리를 내기를 멈추며 나의 존재를 적대하는 사람들과도 무난하게 지내고 싶을 때가 있다. 위장된 평화 속에 묻혀가고 싶기도 하다. 조용히 살면 괴로울 일은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가? 그렇게 하면 나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오드리 로드는 레즈비언 엄마를 두었다고 놀림 받는 아들에게 '친구들'이 그런 일을 저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녀의 아들은 이렇게 답한다.

"아뇨. 내 친구들은 그보다는 똑똑하죠. 다른 애들 말이에요."

우리를 보호하고 위하는 총명한 이야기는 결국 친구와 동료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방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그래서 권력을 가지며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과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결론은 이렇다. 페미니즘이 너무 과격하다며 여성과 남성의 적대와 갈등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들은 결코 당신을 위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오드리 로드 지음,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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