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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

어릴 적 할머니는 저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동네잔치라도 있던 날이면 할머니는 제 이름을 부르시면서 몰래 감춰 오신 떡과 고기를 제 앞에 풀어놓으셨습니다. 아들이 귀했던 그 옛날. 누나들과 저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달랐습니다. 비록 어렸지만 목소리 음절의 강약과 고저만으로 당신의 기분과 의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누나들이 저를 놀리는 것을 목격할 때 목소리는 최소 '시'음 이상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누나 몰래 떡과 고기를 주시려고 저를 부를 때 목소리는 '도'나 '레'음으로 내려갔으며 데시벨도 최저치로 떨어지고는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시인의 "꽃" 일부

부끄러움이 많았던 초등학교 시절 아침 상장 수여식 때 불리던 제 이름은 인정 욕구에 불타오르던 어린 시절의 뿌듯함이었습니다. 첫사랑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 어렵게 그녀 집에 전화해서 '여보세요'라고 숨죽여 속삭였을 때 "응, 명호야"라고 말해주던 그녀 목소리는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누가 불러주는가에 따라 꽃이 되기도 하고 전율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이름이 불리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논산 훈련소 사격훈련 불합격자 명단에서 조교가 부르던 제 이름은 고통 그 자체였고 신호위반했을 때 제 면허증을 본 교통경찰관이 부르는 제 이름은 공포였습니다. 상황에 따라 누군가의 이름이 불러진다는 것은 이처럼 기쁨의 전율이 되기도 하고 공포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 빙상계에서 심석희 선수의 폭로로 이어진 빙상계 내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빙상계의 권력으로 지목받은 전명규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이 1월 21일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전명규 전 부회장은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해명하며 자기는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과 관련이 없고 조재범 코치가 심석희 선수를 상습 폭행했다는 것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조재범 코치가 석희를 폭행해 왔다는 것도 저는 몰랐습니다. 석희는 어려서부터 조재범 코치에게서 배웠고 석희에게 상당히 미안하고 여러분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전명규가 부르는 "석희"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지낸 전명규 한체대 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젊은빙상인연대, 손혜원 의원 등이 제기한 빙상계 성폭력 은폐 의혹 등 각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각종 의혹에 대해 입장 밝히는 전명규 교수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지낸 전명규 한체대 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젊은빙상인연대, 손혜원 의원 등이 제기한 빙상계 성폭력 은폐 의혹 등 각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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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내내 전명규 전 부회장은 심석희 선수를 "석희"라고 부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심석희 선수의 이름을 "석희"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석희 선수는 1997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23살의 성인입니다. 한국 빙상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전명규 전 부회장은 심석희 선수의 스승이자 심석희 선수가 나온 학교의 교수라는 신분이지만 기자회견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석희"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기자 회견장에서 전명규 전 부회장이 "석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평소 그가 선수들과 코치들을 어떤 존재로 여겨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을 그저 아랫사람으로만 생각하며 기자 회견장에서까지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은 스승이 아니라 "보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보스에게 지시를 받는 코치는 심석희 선수와 함께 훈련을 했고 폭행을 했습니다. 심석희 선수는 그 코치에게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어렵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 닫힌 공간에서 "석희야!"라는 이름이 불렸을 때 심석희 선수가 느끼는 공포는 일반인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빠 친구들이 부르는 "석희"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고발과 관련해 고향인 강원 강릉 시내에 심 선수를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19.1.22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고발과 관련해 고향인 강원 강릉 시내에 심 선수를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19.1.22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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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희 선수의 고향인 강릉에서는 심석희 선수를 응원하는 현수막들이 걸렸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현수막 사진을 보고 눈물이 울컥했습니다. 그것은 심석희 선수 아버지의 친구들이 내건 현수막이었습니다.

"석희야 힘내라~ 우리가 응원할께!!"

문자로 표현하면 "석희"라는 같은 글자이지만 심석희 선수가 느끼는 감정은 천양지차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석희 선수에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심석희 선수! 힘내십시오.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https://blog.naver.com/myoung21에도 함께 게재합니다


태그:#심석희, #전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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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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