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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자전거로 5분만 가면 도서관이 있다. 귀한 보물이 가득한 집채 만한 금고가 곁에 있는 기분. 여유롭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 사이를 걷다가 발길을 붙드는 제목을 봤을 때, 그 내용 또한 마치 찾고 있던 퍼즐 혹은 열쇠처럼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을 때의 반가움, 해방감, 오묘함이란! 그 보물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보물과 같은 책 이야기. 형식은 자유. 허구에 허구를 더할 수도, 누군가에 전하는 편지가 될 수도. 내 보물을 보여주는 방법은 내 자유니까. - 기자말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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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보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 책은 하루키가 40대와 50대 시절 10여 년간 작가 겸 러너(runner)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경험하고 사고한 바를 기록해 엮었다. 하루키는 이 작품을 '달리기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이라고 썼다. 

이런 상상을 몇 번쯤 했었다. 인간 이상의 지능과 감성을 지닌 외계인이 와서 "지구를 대표할 만한 것들을 소개해주세요"라고 예의 있게 요청한다면 현대 부문에선 단연 하루키라는 인물 자체와 그의 저서들을 추천할 만하겠다고. 그만큼 하루키는 특별하고 대단한 재능을 지닌 사람 같았다.    

수많은 세계인들을 매료시키는 글쓰기의 달인이라면 분명 내게는 없는 초능력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뼘쯤 두터워도 하룻밤에 다 읽히는 마술 같은 책들을 계속 써내고 심지어 10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 같은 극한 운동마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22살 학생 신분으로 결혼해 지금껏 잘 사는 것까지도! 

그러나 그의 글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다만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고 목표를 세워(여기까지는 나도 잘 한다) 그것을 열심히 실천해왔을 뿐이다. 하루, 1년, 10년, 20년 꾸준히.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고 때로 다독이고 이도저도 안 될 땐 제자리걸음이라도 걷다가 또 나아감으로써. 중요한 것은 절.대. 멈.추.지. 않.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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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런 '평범한' 고백들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도 자기 존재와 삶의 모순 혹은 의문 속에 허무와 혼란을 느낄 때가 있구나, 그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하구나, 좋은 습관을 이어가는 것도 역시 매순간 자기와의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 결과이자 계속되는 과정이구나 하면서.   

인간으로, 작가로, 러너로서의 고뇌 외에도, 마흔 이후 몸과 마음의 변화, 둘 사이의 괴리, 그로 인한 내적 갈등에 관한 대목에서도 크게 공감했다. 앞서 이 회고록의 배경이 하루키의 나이 40~50대 때라고 했는데 나 또한 이제 막 사십대에 진입, 이 낯선 나이가 내 것이라는 데 여전히 당혹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탓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육체적으로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는 아직 전혀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그의 여행기 <먼 북소리>에서도 '나는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좋든 싫든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썼다. 

나 역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낯섦과 무게감이 있는 이 마흔이란 나이를 정녕 내 것이라 실감하는 데만 한 해를 다 보냈다. 지금도 누가 나이를 물으면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정말이지 나로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한데 한순간 늙음과 죽음이 저만치 보이는 듯한 세계로 이동해 있는 느낌. 

나도 분명 늙어 소멸될 거란 사실. 5살 때부터 종종 예고없이 가슴이 훅 꺼지듯 찾아들던 죽음에의 공포. 하지만 마흔 전까진 그저 막연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명백한 현실로 와 닿는.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나가 있다면 언제까지 살지 장담할 수 없으니 서둘러 해야 한다는 갑작스런 절박함, 조급함.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내적 성숙과 사회적 인정을 통한 양질의 성공에 이른 사람도 나이 먹는 일이 쉽지 않음을, 때로 거북하고 거부하고 싶은 것임을. 하지만 그가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짐하므로써 나는 그를 초능력자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 호감과 존경을 더해 우러러보게 됐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올해 1월 하루키는 70번째 생일을 맞았다. 나는 그의 공식 SNS에 찾아가 '18 til you die(죽을 때까지 18살)'라는 댓글로 축원을 전했다. 회고록에서 그가 자신의 자전거 프레임에 새겼다고 한(벌써 20년도 더 지난 것이다), 캐나다 가수 브라이언 아담스의 노래 제목 '18 til I die'를 나 또한 인용한 것.

진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성실하고 멋지게 오래오래 나와 같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저 싫고 무서울 때, 그 모든 길을 나보다 조금 앞서 걸었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위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사(2009)


태그:#달리기, #달리기를말할때하고싶은이야기, #무라카미하루키, #18 TIL I DIE,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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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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