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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1920/21
 마르셀 뒤샹 1920/21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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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행위보다는 영향과 평가가 중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입체파에서 시작 다다이즘을 거쳐 개념예술로 넘어간 영원한 아방가르드 작가다. 한 사조나 경향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가 이처럼 늘 변화를 추구한 것은, 하나의 사조를 고집하거나 그만의 취향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더 이상 시각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관념과 메시지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은 창조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게 아니고 영향과 수용을 통해 살아남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예술가와 관객(소비자)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측면이 중요해진다. 현대에 와서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관객과 소비자다. 미술사에 기록된 수많은 예술가들은 역사의 평가를 받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창작품은 더 이상 예술가의 설명 또는 합리화가 아닌 관객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
 
"수백만 명의 예술가가 창작을 한다. 하지만 관객이 인정하거나 논의의 소재로 삼는 예술가는 고작 몇천에 불과할 것이고, 후대에 의해 존경받는 자는 더더욱 적다. 예술가는 세상의 모든 지붕 위에 서서 자신이 천재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선언이 사회적 가치를 얻고, 그 결과 후대가 그를 미술사 입문서에 포함시킬 수 있으려면 그는 관객의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 [1957년 4월 휴스턴의 미국예술연맹이 주최한 회의에서 행한 마르셀 뒤샹의 강연. In: ARTnews 56 No 4(1957 Summer), 28 Page]f
 

입체파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발휘
 
수풀
 수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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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은 형제자매 네 명이 예술가의 길을 걸은 예술가 집안 출신이다. 바르비종 화풍의 풍경화를 그린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인상주의 경향의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이 1902년의 '블랭빌 교회'다. 이 교회는 뒤샹 저택 가까운 곳에 있다. 1906년에는 파리 몽마르트르로 가 직업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10년부터 그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체스 게임'(1910)이다. 이 작품에서는 세잔풍의 후기 인상주의 경향이 나타난다.

1911년에 들어 그린 '파라다이스', '수풀'에서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야수파 또는 표현파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입체파 화가들과 접촉하면서 그의 그림은 형태를 해체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소나타', '초상(뒬시네아)'은 피카소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움직임의 재현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추상과 움직임이 더욱더 도식적으로 표출된 것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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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가 뒤샹은 인간을 기계장치로 또는 해부학적으로 분해해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1912), '신부'(1912)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뒤샹은 입체파 화가들에 의해 미래파 화가로 의심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어떤 하나의 사조에 예속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화가들』(1912)에서 뒤샹의 독특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는 대놓고 난해하거나 소수만 이해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비판에도 별 상관없다는 듯 이 기법을 가능한 한 끝까지 밀고 나간다."

1912년 가을부터 뒤샹은 관습적 의미의 회화와 멀어진다. 그는 자유와 창의성을 위해 전통적인 매체를 버린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고, 예술로 생계를 이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1913년 11월부터 1915년 6월까지 생트-주누비에브(Sainte-Geneviève) 도서관 자원봉사자로 근무한다. 이때 뒤샹은 고대철학, 원근법, 광학에 대한 공부를 하며 시각예술가로 작품활동을 이어나간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초콜릿 분쇄기'(1913)와 '금속테 안에 물레방아를 담은 글라이더'(1913-15)이다.
 
레디메이드(Ready made) 작품이란?
 
 
뒤상과 '자전거 바퀴'(1913)
 뒤상과 "자전거 바퀴"(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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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늘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왔다. 이러한 생각은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제품을 예술의 소재로 사용해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을 깨뜨려보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예술적인 의도보다는 기분전환을 위한 장난으로 시작되었다. "1913년 나에게는 자전거 바퀴를 키친 스툴에 고정해 놓고 그것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자는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자전거 바퀴'(1913)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예술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해프닝에 불과해 버려졌고, 1964년 복제품이 만들어져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또 하나의 레디메이드 작품이 '병걸이'(1914)다. 와인병 건조를 위한 원형 스탠드로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뒤샹이 한 일은 제품을 선택하고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를 통해 기능적 제품이 의미 있는 예술작품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뒤샹은 미국으로 떠나려 한다. 유럽보다는 미국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피난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심장질환으로 군복무가 면제된 뒤샹은 1915년 4월 뉴욕에 사는 패치(Walter Pach)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그 결과 그는 6월 15일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큰 유리
 큰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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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속한 이 예술적인 삶이 싫었네. 도서관을 통해 어떻게든 예술가로부터 도망치려 노력했지.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서 이 환경과 나의 불화는 점점 커지기만 하는군. […] 내 유일한 선택지는 자네가 있는 뉴욕이야. 그곳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라네."
 
1915년 말 뒤샹은 뉴욕 브로드웨이 66번가와 67번가 사이 링컨 아케이드 빌딩 작업실에서 레디메이드 '부러진 팔에 앞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드로잉, 회화, 유리, 납, 철사, 호일 등을 결합한 '큰 유리'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1916년 4월 뉴욕 부르주아 갤러리에서 열린 《세잔 이후 모던 아트》전에 드로잉, 그림, 레디메이드를 출품했다. 그러나 이때 레디메이드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신문의 리뷰에서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언급될 정도였다.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
 
샘(1917)
 샘(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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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후인 1917년 4월 <독립예술가협회> 첫 전시에 또 다시 레디메이드 작품을 출품해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것이 유명한 '샘(Fountain)'이다. 뒤샹은 모드(Mott) 철강회사의 뉴욕 맨해튼 전시장에서 소변기를 구입한다. 리차드 머트(R. Mutt)라는 필명과 함께 1917이라고 쓰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한다. 감독들이 이 작품에 대해 논의를 했고, 투표를 통해 전시불가 결정을 내린다. 협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샘'은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매우 유용한 물건이겠지만, 미술전시회는 그 본래의 자리가 아니며,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그것은 예술작품이라 할 수 없다."

 
협회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 작품이 비도덕적이고 천박하다. 둘째 이 작품은 표절에 가까운 독창적이지 않은 오브제다. 그러나 미학의 독립성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던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이 작품의 사진을 찍어 뉴욕 다다이즘(Dadaism) 잡지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 제2호에 싣는다. 그리고 '샘'의 전시불가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실었다.

뒤샹의 '샘'을 옹호하는 입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샘'의 정신이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둘째 무엇이 예술인지 결정하는 것은 예술가다. 그러므로 이번 결정은 예술가의 권리를 짓밟은 행위다. 셋째 '샘'이 가진 함축적 의미와는 별개로 그 자체 아름다움과 순수한 형태만으로도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샘' 해프닝을 통해 뒤샹은 미국에서도 설자리가 별로 없음을 깨닫고, 이듬해인 1918년 8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다.
 
이번에는 여장 남자 에로즈 셀라비로
 
 
‘LHOOQ’
 ‘LHO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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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1년이 안 된 1919년 6월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다다이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다다이즘은 전쟁의 폭력과 민족주의, 논리와 미학, 부르주아 사회의 관념과 도덕성에 반대하면서 저항과 반예술(anti-art)을 추구했다. 파리에서 뒤샹은 모나리자 복제품에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붙이고 'LHOOQ'라는 표제를 붙인다. 이를 프랑스어로 소리내 읽으면 'elle a chuad au cul'이 되어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가 된다.

뒤샹은 이처럼 그림을 패러디하고 언어적으로 유희를 하면서 근대예술의 우상을 파괴한 것이다. 아름다움, 불멸성, 아우라 등으로 대변되는 근대예술이 장난의 대상이 된다. 1920년 초 뒤샹은 여장남자로 나타난다. 화장을 하고 보석을 달고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썼다.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라는 여성자아를 만들어 예술과 언어에 대한 실험을 계속해 나간다. 에로즈 셀라비는 'eros, c'est la vie'가 되어 '에로스, 그것이야말로 삶'이라는 뜻을 가진다.

 
에로즈 셀라비
 에로즈 셀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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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봄에는 드라이어(Katherine Dreier), 레이(Man Ray)와 함께 실험적인 모던아트 전시기획사인 <무명사회(Société Anonyme)>를 창립한다. 이 기획사는 현대미술 관련 강연, 전시, 콘서트, 출판과 홍보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1926년 <국제 모던아트 전시회>를 열었고, 1940년까지 80회의 전시회를 연다. 전시행사는 입체파, 다다이즘, 추상예술 같은 현대미술과 관련이 있었다.

뒤샹은 <무명사회>에 참여하면서 예술가들의 독선과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독설 같아 보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예술가들이 작품값으로 평가받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경계했던 '가짜와 사기'가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면 살수록 이들이 아주 조금의 성공이라도 거두는 순간부터 가짜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말은 또한 예술가들 주변에 빌붙어 있는 개들은 모두 사기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짜와 사기꾼'의 조합이라니, 당신은 어떻게 일말의 믿음을 지켜올 수 있었습니까? […] 결국 그림은 매겨지는 가격이 높아야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뒤샹이 드라이어에게 보낸 1928년 11월 5일자 편지)

태그:#마르셀 뒤샹, #입체파, #레디메이드, #다다이즘 , #에로즈 셀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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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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