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9 09:32최종 업데이트 19.01.29 09:32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부터 독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그후 윤이상, 임수경, 송두율, 그리고 최순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 있다. '권은비의 베를린 오 베를린'에서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시간들을 전한다. 이번 편에서는 햇볕정책을 주제로 논문을 쓴 독일인 요하네스 클라우자에게 한국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었다. 분단의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12년 전부터 한국에서 지내며 남과 북을 왕래해왔다. [편집자말]
 

1982년 베를린 장벽을 뒤로 하고 꼬마 요하네스와 그의 어머니가 서있다. ⓒ Johannes Klausa


요하네스 클라우자는 분단국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단된 도시 베를린에서 어릴 적부터 장벽을 보고 자랐고, 영원히 서쪽과 동쪽 사이를 갈라놓을 것 같았던 장벽을 망치로 무너뜨린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세대는 아마 이렇게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을 직접 무너뜨려본 사람과 아닌 사람.


때문에 독일 사람 중에서도 특히 "베를린 사람"이 지닌 시대적 감수성은 특별하다. 요하네스 또한 이른바 분단 세대이면서 통일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2002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 아시아의 또 다른 분단국가인 한국을 알게 됐다. 현재는 교황청 재단인 '고통 받는 교회 돕기'의 한국지부장으로 일한다.

독일 통일 이후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요하네스는 한반도를 넘어 레바논, 이라크, 파키스탄, 미얀마로까지 자신의 인생 현장을 넓혀가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갈등과 대립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극단의 사람들이 서로 같은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그를 지난 14일 만났다.

"난 분단 DNA 가진 사람,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
 

요하네스 클라우자 ⓒ 권은비

 
-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달라.
"고통 받는 교회 돕기의 한국지부장으로 2014년부터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 세계에 수많은 지부가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첫번째 지부라고 들었다. 왜 한국이었나?
"'고통 받는 교회 돕기', 즉 ACN(Aid to the Church in Need)은 1947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종교로 박해 받는 가톨릭 신자들과 교회를 돕고 있다. AC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 출신 신부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텐씨가 독일 난민들을 도우며 음식과 옷, 이불 등을 기부한 것이 유례가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리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또는 종교의 억압으로 인해 탄압받는 신도들이 있는 나라에 해마다 1000여 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4년 당시에는 한국에 아시아 최초의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필리핀에도 지부를 만들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나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 어떤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나는 스스로 독일인으로서 분단에 대한 DNA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분단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내가 경험한 분단과 통일에 대해 더욱 깊게 사유해볼 수 있었다."

- '분단 DNA'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베를린에서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기억하나?
"물론이다. 그때 나는 15살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쿠담거리(서베를린의 중심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쿠담 전광판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보였다. 다음날 갑자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동베를린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학생들이 없어서 교실이 텅 비어있을 정도였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기뻐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집안에 있는 각종 망치와 장비들을 들고 베를린 장벽을 향했다. 베를린에 살지 않는 친척들도 모두 장비를 들고 와서 장벽을 마구 깨부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대중을 만나다
 

요하네스 클라우자와 김대중 전대통령 ⓒ Johannes Klausa

 
- 한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방문했었다. 당시 재학중이었던 베를린자유대 정치학부 학술 연수로 인해 한국에 왔었다. 당시 한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굉장히 큰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회창'이라는 이름의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음악과 춤이 큰 소리로 흘러나왔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야구 경기 때 쓰는 응원도구를 두드리며 어느 정치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런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 선거운동의 강렬한 한 장면이었다."

- 그 후 다시 독일로 돌아가 한국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들었다.
"그렇다. 분단국가에 대한 접근법으로서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빌리 브란트의 새로운 동방정책을 비교 연구하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으로 당시 독일 기독교사회연합당 국회의원의 연구보좌관으로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 함께 일했던 국회의원은 한반도 정치에 많은 관심과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

- 그 논문 덕분에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 독일 국회의원 연구보좌관으로 합격하게 되었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독일과 한국의 분단에 대한 석사논문을 쓴 정치외교학도였지만 밤에는 바텐더로 일했었다. 게다가 성당에서는 복사를 맡고 있었고 동시에 록밴드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에 록에 미쳐 있었다. 당시 나를 뽑은 국회의원은 내 논문과 자기소개서를 비행기에서 읽었다며, 내가 바텐더이면서 정치학도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록음악을 좋아하는 이력이 재밌어서 뽑았다고 말하더라."

- 논문은 독일의 사민당 출신인 빌리 브란트에 대해 썼지만 일은 기민당의 국회의원과 하게 된 것이 흥미롭다. 또 다른 논문의 주인공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직접 만났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총 2번 만나게 되었다. 첫 번째는 2007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자유상'을 수상하여 방문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2008년 63빌딩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던 독일 국회의원과 만나게 되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그의 건강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한국에 본격적으로 머물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2007년 12월에 6개월 코스로 한국에 연수를 오게 됐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독일의 한 재단에서 북한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는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마침 나는 서울에 머물고 있었고, 2008년부터 3년 동안 북한과 남한 사이를 왕래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때에는 6개월의 짧은 여행으로 한국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한국에 정을 두고 지내게 된 셈이다."

그의 눈에 비친 남과 북... "춤도 똑같이 추더라"
 

한국에 처음 방문한 요하네스 클라우자 ⓒ Johannes Klausa

 
- 독일인이기에 가능했던 특별한 일이었던 것 같다. 2008년 처음 북에 갔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인천공항에서 중국을 거쳐 북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깜깜한 밤이었다. 몇 개의 가로등 불빛만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북한 사람 4명과 차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두렵기도 했다. 낯선 나라였으니까. 그런데 남과 북을 오가며 보니, 남북 간의 공통점을 많이 발견하게 됐다. 신기하게 남북한 아줌마·아저씨들은 춤도 같은 춤을 추더라. 또 북에서 청년들도 많이 만났다. 내 눈에는 남한의 청년들과 다름없는 모습들이 보였다."

- 2007년부터 지금까지 남북한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말하면, 과거에는 정말 전쟁의 위협을 느낀 적이 많았다. 가족들에게 다급한 심정으로 전화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2010년 천안함 사건 때는 원래 계획된 북한 방문도 모두 취소됐다. 또 북한의 핵실험 발표와 개성공단 폐쇄 등등 불안함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느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남북 간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어 개인적으로 매우 기쁘다. 언젠가는 남북한 사람들도 평화롭게 오고 갈 수 있길 바란다."
  
- 꽤 오랜 시간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처음에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국 사회에서 출신과 학연, 이념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공통의 의의로 한 목소리를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길 바란다. 내 편과 남의 편을 나누고 서로의 차이를 더욱 만들어낸다. 그러한 갈등을 한국에서 목격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지금도 종교의 자유 없이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서로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은 서로의 사상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이지리아의 아이들과 요하네스 클라우자 ⓒ Johannes Klausa

 
요하네스 클라우자가 한국에 터를 잡은 지 어느덧 12년이 흘렀다. 그렇게 그는 나에게 레바논, 이라크, 파키스탄, 미얀마, 나이지리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게 피부색과 국적과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듯이.

대립을 넘어 정치적인 것을 넘어, 기꺼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요하네스 클라우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12년 동안 첨예한 대립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 안에서 그가 살 수 있었던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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