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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경제학> 표지
 <도넛 경제학> 표지
ⓒ 학고재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학>을 통해 현재의 성장주의 경제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충족하고, 밖으로는 인류의 보금자리인 지구 환경을 보전하는 길이 도넛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경제지 기자가 아니고 경제학과 교수다. 도넛 경제학이라는 다소 가벼운 이름과는 달리, 그녀가 주장하는 내용은 가볍지 않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시장을 불안정하게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그런 불안정성과 불평등을 오히려 조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해결책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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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위험

화폐와 시장이 대개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믿음은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공유한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 중 어느것이 더 혐오스러운가? 단어의 느낌이 다르다. 시장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부 실패에는 뭔가 사악한 의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경제학에서 외부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대개 내부화가 제시된다. 문제를 시장 내부로 편입시키는 것인데, 대개 금전 거래를 동반한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의 수많은 실험이 화폐 개입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어린이집에 지각하는 부모에게 벌금을 매겼더니 벌금을 내고 당당하게 지각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실험은 이미 고전이다. 개도국에서 학교 출석에 대한 대가를 금전으로 지급했더니 금전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아이들의 결석률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가구당 1명의 아이에게만 금전을 지급하니 큰아들만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딸의 결석률은 그야말로 로켓처럼 치솟았다. 저자는 금전 거래 도입보다는 '미묘한 정책 설계', 즉 '넛지'가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의 내재적 불안정성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알려져 왔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세계 경제 대통령 행세를 하는 세상이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뿐이다. 거품 이론으로 유명한 민스키는 자본주의가 투기 붐을 만드는 내재적 경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불평등의 문제 역시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내재적 성향이다. 국가 재정이 소득세에만 집중하고 재산에 대한 과세에 계속하여 눈감는다면, 조만간 인류는 역대 최고의 빈부격차를 기록하는 쾌거를 달성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가장 가난한 4분의 3은 중위 소득 국가에 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여기로 이민을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나라가 전반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세계은행이 중위 소득 국가로 재분류했기 때문이다. (197쪽)

경제성장은 99%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1%에 의해 견인된다. 중국, 인도, 나이지리아의 1인당 GDP는 이제 중위 소득 국가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부유층의 비대칭적인 소득 확대가 소득 평균값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페이 루이스(Fay Lewis)가 빈 땅에 세운 표지판 - "헨리 조지의 책을 읽으세요."
 페이 루이스(Fay Lewis)가 빈 땅에 세운 표지판 - "헨리 조지의 책을 읽으세요."
ⓒ Fay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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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보다 100년쯤 전에 불로소득의 위험성을 지적한 헨리 조지. 그를 신봉한 페이 루이스(Fay Lewis)는 재미있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했다. 그는 도시 한복판의 노른자 땅을 사서 황폐하게 방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런 표지판을 세웠다.
저는 이 공터를 3,600달러에 샀고, 6,000달러로 값이 오르면 팔 생각입니다. 제가 불로 소득을 챙기는 것은 이 공동체가 여기 있기 때문이며 또 그 공동체 성원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을 하지 않고 이윤을 가져가는 겁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싶다면 헨리 조지의 책을 읽으세요. (213쪽)

금융도 개혁이 가능하다

영국에서는 화폐의 97%를 상업은행이 창출한다. 다른 나라들도 대개 사정은 마찬가지다. 상업은행의 여신창출 기능은 경제학 개론 수준의 내용이다. 중앙은행이 화폐량을 조절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도구 중 하나가 지급준비율 조정 아니던가.

통화론자들이 아니어도 화폐의 적정한 공급이 중요하다고 열변을 토하는 경제학자들은 많다. 그들이 내세우는 우화는 이렇다. 한 마을에서 서로 베이비시팅을 해주는 티켓을 발행했다. 그런데 아무도 베이비시팅을 맡기지도, 맡지도 못했다. 딱 수요만큼만 발행된 티켓이 모자라서였다.

경제가 발목 잡히지 않도록 화폐를 넉넉히 발행해야 한다는 이 우화의 교훈은 사실 오도된 측면이 있다. 양적 완화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채권을 통한 현재의 양적 완화는 은행과 가진 자들만을 살찌운다. 그 대신, 돈을 찍어서 일반 가계에 직접 지급하면 부채에 의한 연쇄 도산을 막고 경제를 구할 수 있다. 채권 10을 구매해서 통화승수 10을 곱한 100의 통화량 증가를 '노리지' 말고, 그냥 100을 찍어서 나눠주란 말이다.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People's QE)'다.

베이비시팅의 우화는 맞는 이야기다. 단지 그 우화의 결론은 연준 방식의 양적 완화가 아니고,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가 되어야 한다.

통화승수에 대해 복습해 보자. 지급준비율이 10%라면, 은행은 100만 원 예금을 받고 10만 원만 가지고 있어도 되므로, 90만 원을 다시 대출해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무한급수의 합은 1,000만 원이 된다. 그런데 만약 지급준비율을 100%로 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은행은 아무런 신용창출을 하지 못한다.

통화승수는 마법이고 100% 지급준비율은 개그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100% 지급준비율은 화폐 공급과 신용 제공의 기능을 분리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1929년의 뱅크런은 일어나지 않는다.
낯설게 들릴 수 있겠으나 이는 새로운 제안이 아니며 주변적인 의견도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어빙 피셔와 밀턴 프리드만 같은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미 제안한 것으로, 2008년 당시에도 새삼스럽게 지지를 얻기도 했다. (217쪽)

기술 혁신 또한 금융 혁신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이제는 마치 투기 상품처럼 들리는 명사가 되었지만, 블록체인은 은행을 제외한 모든 경제주체를 이롭게 하는 기술이다. 회계장부를 은행의 손에서 거두어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앵거스 디튼이 <대탈주>에서 논증하고 있듯, 개발원조는 무력하다 못해 원조를 받는 국가의 일반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 케이트 레이워스는 모바일 뱅킹을 이용해 원조 금액을 직접 피원조 국가 국민들 개개인에게 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나는 모바일 뱅킹도 좋지만 블록체인이 더 좋다고 본다. 암호화폐는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베네수엘라에서 그 힘을 충분히 입증했다.

새로운 경제학

책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녀는 대단히 박식한 경제학자로서 경제학자들의 도구를 이용해서 기존 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알다시피 경제학은 수많은 가정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학문이다. 경제학 개론 시간에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말을 지겹게 듣지 않았던가? 진실은 간단하다. 다른 조건이 같지 않다.

쿠즈네츠 본인도 파기해버린 쿠즈네츠 곡선을 경제학자들은 신물이 나게 재탕해 왔다. 경제발전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불평등이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경제학자들은 통계자료를 모은다. 저자는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외친다.
이제 국민 총생산이 늘어나면 생태도 건강해진다고 증명해줄 경제 법칙 따위는 그만 찾을 때가 되었다. 경제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경제란 본질적으로 설계 문제다. (247쪽)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쓴 제러미 리프킨조차 미래에는 GDP가 감소할 것이라 예언한다. 공유경제가 활성화되고, 두레 방식으로 서비스가 교환되면서 금전 거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술 혁신이 아군이 된다면, 경제학 혁신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단지 학부를 졸업하고 학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경제학과 졸업생뿐이라고. 푸코가 말하는 지식 권력이 의사나 법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 기사가 뉴스의 핵심을 차지하는 오늘날, 경제학자의 권위는 절대로 가볍지 않다. 일기예보와 마찬가지로 매번 틀리기만 하면서도, 경제학은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공존, 공유, 민주화가 인류의 미래라면, 경제학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한다. <도넛 경제학>은 아직 투박하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큰 그림을 제시한다.

도넛 경제학 - 폴 새뮤얼슨의 20세기 경제학을 박물관으로 보내버린 21세기 경제학 교과서

케이트 레이워스 지음, 홍기빈 옮김, 학고재(2018)


태그:#잡식성 책사냥꾼, #케이트 레이워스, #<도넛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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