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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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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이 바꿔놓은 서른다섯 소년의 삶을 말합니다. -기자말

집에 돌아오면 한달음에 뛰어와 반기는 삼십팔 개월 아이를 힘껏 안아주고,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외투를 벗고 하얀 옷걸이에 걸어 발돋움해서 옷장 한 편에 걸어 놓는다. 몸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셔츠를 벗고 이어 정장 바지를 벗으면, 바지 역시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잠깐 내가 뭐라고 했지. 바지를 개어 옷걸이에 걸어놓는다고 했다.

정장 바지라 앞뒤로 주름이 선명하게 난 것이 있어 앞뒤 주름을 맞춰 평평하게 만든 다음 구겨지지 않도록 그 모양 그대로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이렇게만 해 두어도 다음 날 이 바지를 다시 입을 때 비교적 주름이 덜 한 상태라 두어 번은 다시 입을 수 있는 걸 안다. 굉장히 오래전에 습득한 버릇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니 바지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어 보관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말 언제부터였을까. 옷과 멋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언제부터 저녁이면 하루의 흔적이 묻은 옷가지를 가지런히 벗어 던지게 된 걸까.

생각할수록 참 이상하기도 하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고 지금 회사에 입사해서 사회생활 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무렵이니까 이십 대 후반의 풋풋했던 시절이었는데, 분명 그때만 해도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렇게나 바지를 벗어 던지거나 벽에 걸린 자바라 옷걸이에 대충 걸어놓곤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집에 들어서면 현관 왼쪽에 방이 하나 있었다. 원래 그 방은 누나가 쓰던 방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내가 종종 잠을 자곤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침대가 있고 오른편 벽에 자바라 옷걸이가 있었다. 그때는 고단한 밤이 참 많았다. 방에 들어서며 옷을 벗어 벽에 걸어놓고는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던 밤이 매일 이어졌다.

정중하지도, 섬세하지도 못했던 날들

처음 사회생활 할 때 맡았던 일이 공무원, 기자, 시민단체, 교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술자리를 하던 업무라, 술을 먹는 날이 먹지 않는 날보다 많았다.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대개 내가 만나는 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들은 말이 많았다. 많은 나이와 많은 말 앞에 나는 긴장했다. 몸의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채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몇 시간 잠을 청하는 척하다가 다시 회사에 나가야 했다.

그때는 하루를 마감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았다. 하루를 마감한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함께 만족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여섯 시가 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에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는 집으로 향해야 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잠시 한숨을 돌린 뒤 잠자리에 들기까지 나를 위한 시간이 단 한 시간이라도 존재해야 했다.

집에 돌아와 잠들기까지의 그 한 시간. 무얼 해도 상관없다. 책을 읽어도 좋고, 혼자 술을 마셔도 좋고, 영화 한 편 보다가 잠들어도 좋았다. 내가 나를 위해 조금은 노력한다는 씁쓸한 만족감이 슬쩍 차오른 순간 잠이 들었고, 그 잠과 함께 나의 하루는 비로소 제대로 마감되었다. 그런 날에는 집에 돌아와 바지를 아무 데나 팽개치지 않았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다시 아침에 회사로 떠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은 여유롭고, 쫓길 것이 없으니 옷을 벗는 나의 동작은 정중하고 섬세했다.

그러나 그렇게 정중하고 섬세한 날이 몇 날이나 있었을까. 대부분 나의 하루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불분명했고, 끊임없이 연속하여 흘러갔다. 그럴 때면 바지는 늘 벗은 형태 그대로 벽에 걸려있곤 했다. 벽에 걸려 있던, 껍데기와 같은 모습의 바지가 술과 피곤에 취한 눈에 희미하게 담겼다. 그 껍데기란, 어떻게든 사회에 편입하려고 했던 욕망의 껍데기였다.

술에 취하고, 그날 밤늦게까지 함께 했던 외부인과의 대화에 취한 상태로 내 삶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따지기에 스물여섯 살의 시간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갔다. 술과 잠에 취한 상태로 침대에 쓰러지며, 벽에 아무렇게나 걸린 주름투성이 바지를 바라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이 이토록 나의 취향과 의지와는 무관한 방향과 속도로 달아나고 멀어지고 있는데 적어도 소리쳐 경고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을까.

별로 그랬던 것 같진 않다. 나는 회사에 출근하고,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나며 어떻게든 애써 살고 있는데 자꾸만 충동적으로 나에게서 달아나는 삶에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거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집에 돌아와 옷을 바로 개어 걸어 놓고, 단 몇 초 만이라도 오늘의 시간을 단절하고 잠에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은 매일 매일이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늘의 고단함이 내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삶이 달아나고 있다고 느꼈지만... 삶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멈춰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깐, 이제는 나도 숨 가쁘게 지치도록 달려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벽에 걸린 옷걸이 자바라도 없고, 하루 건너 타인과 의도하지 않은 술과 대화를 섞으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저녁도 없다. 나는 집에 돌아와 옷을 벗어 정갈하게 개고 옷장에 집어넣는다.

정확히 단절되는 하루, 달아나지 않는 삶

아직 부모의 품이 필요한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밤 열한 시다. 잠시 아내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재에서 밀린 일을 하고는 잠에 든다. 시집을 읽을 때도 있고 글을 쓸 때도 있고 밀린 뉴스를 읽으며 하루를 정리하곤 한다. 분명 나의 오늘은 내일과 단절되어 있고 하루를 마감한다는 것은 더없이 분명하기만 하다.

바지는. 바지는 주름 없이 옷장에서 잘 자고 있을 것이다. 삶이 자꾸만 나에게서 달아나고 있다는 기분은 전혀 없다. 나의 삶은 나와 함께 어깨를 함께 하며 걷는다. 당연히...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순간임을 안다. 서른 다섯을 통과하는 나는, 서른 여섯, 서른 일곱, 마흔, 쉰의 시간을 통과하며 사회에서 점점 경쟁에 내몰릴 것이고, 경쟁에 내몰릴수록 웃음보다는 고단함이 깃든 비극이 찾아올 것임을 안다. 지금의 이 평화는 영원하지 않음을 안다. 나는 그때에도 과연 삶이 나에게서 단단히 붙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에도 과연, 바지를 정갈하게 개어 걸고 이쯤에서 하루를 마감하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일 수 있을까. 나의 옷은 온종일 나의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으로 얼마나 가득할 것인가. 미래의 그때는 내 자신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바지와 같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과거의 내가 그렇게 느꼈듯이.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 나희덕 시인의 <벗어놓은 스타킹> 부분

 

태그:#시, #시집, #에세이, #나희덕, #벗어놓은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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