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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럽(Timothy Rub)' 필라델피아미술관 관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티모시 럽(Timothy Rub)" 필라델피아미술관 관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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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M. Duchamps 1887~1968)'의 회고전이 사후 50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4월 7일까지 열린다. 그의 회화, 드로잉 등 150여 점이 소개된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로 기존 현대미술을 뒤엎은 장본인이다. 이번에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협업했다. 한국에서는 '이지회' 큐레이터와 미국에서는 '매슈 애프런(M. Affron)' 큐레이터가 참여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은 1950년 '루이즈·월터 아렌스버그(Louise and Walter Arensberg)' 부부로부터 다수의 뒤샹작품을 기증받았다. 그래서 세계에서 뒤샹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번에 내한한 '티모시 럽(T. Rub)' 필라델피아미술관 관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뒤샹 없이 현대미술을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유산은 세월이 갈수록 더 중요해졌다"고 했다.

뒤샹,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인물 
 
국립현대미술관 '제3 전시장'에 작가를 소개하는 다양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재구성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3 전시장"에 작가를 소개하는 다양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재구성한 것이다
ⓒ M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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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뒤샹의 전시는 '1부: 화가의 삶 2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3부: 에로즈 셀라비 4부: 우리 욕망의 여인' 등 연대별로 전시가 구성되었다. 뒤샹 전은 한국에서 처음이다. 당연히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1번, 2번)'도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이번 전시 때문에 그야말로 그 이름값을 하게 되었다.
 
현대미술에서 그만큼 영향을 준 작가는 없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필라델피아미술관 '매슈 애프런' 큐레이터는 뒤샹에 대해 "그는 여전히 수수께끼가 많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남아 있다"며 "현대미술의 관례를 깨고 충격을 준 개념미술의 선구자이자 혁명가"라고 말했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도 그는 "프랑스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창작활동은 아주 미미하지만 그 영향력은 컸다. 뒤샹은 초현실주의에 가까이 있지만 그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늘 기인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요셉 보이스'는 그가 너무 신화화되자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었다"라고 경계했다.
 
전율케 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마르셀 뒤샹 I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번)' 캔버스에 유채, 147×89.2cm 1912년 작품. 1번보다 2번이 더 유명하다
 마르셀 뒤샹 I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번)" 캔버스에 유채, 147×89.2cm 1912년 작품. 1번보다 2번이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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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도 잠시 화가였다. 그래서 혁신적인 입체파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어떤 유파에 끼는 것을 꺼렸다. 그럼에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경향을 보였다. 또한 옵아트, 팝아트, 키네틱아트, 아방가르드, 개념미술 그리고 실험적 예술영화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런 시기에 나온 작품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누드'는 신체의 역동적 움직임을 기계처럼 묘사해 생동감이 넘친다. 1895년에 발명된 '엑스레이' 촬영법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 신체기관의 기계적 움직임까지도 포착해 가시화했다. 1912년 파리 '앙데팡당 살롱'과, 다음 해 뉴욕 '아모리쇼'에 이를 출품했다. 뉴욕에서 이 작품이 논란이 되면서 오히려 유명세를 탔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가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뉴인상파, 입체파, 야수파, 추상파, 미래파 등 서양미술유파가 다 농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로 모든 걸 다 그렸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다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학창시절, 수학경시대회 1등
 
마르셀 뒤샹 I '초콜릿 분쇄기(No.1)' 캔버스에 유채 61.9×64.5cm 1913
 마르셀 뒤샹 I "초콜릿 분쇄기(No.1)" 캔버스에 유채 61.9×64.5cm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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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올바른 수를 찾는 것 말고는 나는 밤낮 체스만 둔다"고 말했듯 그 이후 실제로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체스'를 두는 것이 그에게는 그림이었다. 그는 이렇게 미술개념을 다양화시켜 기존의 가치를 뒤엎은 반예술가(anti-artist)였다. 그래서 뒤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그 이전이 신화적이고 계몽적이라면 그 이후는 전위적이고 개념적이다.
 
그는 중학교시절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하니 수학에 수재였나 보다. 그는 회화를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머리로 계산해서 그렸다. 그는 피카소의 회화세계를 능가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런 공학적 방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를 테크놀로지 미학에 감응하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라고 평했다.

다시 말해 그는 미술을 지적인 산물로 봤다. 위 '초콜릿 분쇄기'도 그런 수학적인 정밀함이 반영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 회전기계에 도취하는 경향을 보였단다. 그만큼 전통을 파괴하는 급격한 움직임을 좋아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기계를 무겁고 딱딱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가볍고 유쾌하게 봤다. 이런 발상이 그로 하여금 현대미술의 출구를 열어준 것 같다.
 
혁명적인 미술, '레디메이드' 창안 
 
마르셀 뒤샹 I '샘(1917)', '자전거 바퀴(1915)', '병걸이(1914)' 뒤샹의 대표적 레디메이드 작품들
 마르셀 뒤샹 I "샘(1917)", "자전거 바퀴(1915)", "병걸이(1914)" 뒤샹의 대표적 레디메이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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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미술이란 심미적인 것을 벗어나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내가 선택해서 전시장에 갖다놓는 것으로 봤다. 여기서는 '선택'이 바로 창조가 된다. 제3의 미술이라 할 만한 혁명적 개념이다. '레디메이드' 개념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는 오리지널에 대해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샹은 1950년 구입한 '샘'에 가상예술가 머트씨('R.Mutt')라고 사인했다.

뒤샹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신개념미술에 대해 글을 남겼다. 한번 읽어보자.
 
"미술은 어원상 만들기를 의미한다. 뭔가 만든다는 건, 물감의 색을 고르고 팔레트에 짜고, 물감을 칠할 지점을 정하고 미술을 결국 모든 게 선택이다. 하지만 원한다면 물감이 아니라 기계로도 제작할 수 있다. 또한 이미 남들이 만들어놓은 공산품 '레디메이드'를 활용할 수도 있다. 이럴 듯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고 선택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위 세 작품은 그런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벽걸이'는 요즘 싱크대에서 흔히 보는 가져다 거는 방식과 똑같다. '자전거바퀴'도 그렇다. 바퀴는 기계의 원류인 '베틀'과 함께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이게 없었다면 마차, 기관차, 자동차, 탱크 등이 나올 수 없다. 이동에서 대혁명이 온 것이다. 여기에 모터가 발명돼 산업혁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뒤샹의 독창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1917년에 나온 '샘'이다. 이 작품은 남성용 변기로 여성의 성기(자궁)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왜 '샘(Fontaine)'인가? 그건 아마도 쿠르베가 그린 잉태의 샘을 상징하는 '세상의 기원'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뒤샹은 이 작품을 자신의 레디메이드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서양미술사는 누드화의 발전사와 다름 아니다.

나의 이런 해석이 얼마나 객관성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서울관 간담회에 참석한 뒤상 전문가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이터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구체적인 대답을 피했지만 이 작품이 서양의 누드화전통의 뉴 버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을 했다.
 
전쟁 속 작품보전을 위한 '아트상자' 
 
마르셀 뒤샹 I '여행가방 속 상자(1994)' 1936-41, 1964-65(내용물) 120×160×43cm 1966년 에디션. 빨간색 가죽 여행가방 박스 속에는 망판화, 석판화 코팅사진, 비닐, 유리도자에 담겨 있다. 복제의 강박관념이 보인다
 마르셀 뒤샹 I "여행가방 속 상자(1994)" 1936-41, 1964-65(내용물) 120×160×43cm 1966년 에디션. 빨간색 가죽 여행가방 박스 속에는 망판화, 석판화 코팅사진, 비닐, 유리도자에 담겨 있다. 복제의 강박관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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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뒤샹에 의해 7차례 300여개의 버전으로 만들어진 '여행가방 속 상자'도 선보인다. 왜 이런 작품이 나왔을까? 뒤샹은 자신의 분신 같은 작품이 1941년부터 2차대전 사이에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만큼 작품에 애착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작품 중 중요한 것만을 미니어처로 만들고 이걸 이동식(portable) 가방에 넣어 미술관처럼 가지고 다녔다.

2008년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뒤샹의 이 버전 하나를 구입했다가 문체부로부터 해임 당했다. 그 이유가 예산과다지출과 관련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김 관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관장으로 외국에 나가 보니 우리 미술관 위상이 너무 낮아 뒤샹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2년 후 대법원은 그의 해임을 무효라고 판결했다.
 
'성적 함의' 담긴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
 
마르셀 뒤샹 I "에탕 도네(11번가 작업실)" 1968, 데니즈 브라운 헤어, 젤라틴 실버 프린트, Philadelphia Museum of Art ⓒ Association Marcel Duchamp/ADAGP, Paris-SACK, Seoul, 2018. 가스조명과 폭포가 보인다. 여기서 물(폭포수)은 에로스의 메타포다
 마르셀 뒤샹 I "에탕 도네(11번가 작업실)" 1968, 데니즈 브라운 헤어, 젤라틴 실버 프린트, Philadelphia Museum of Art ⓒ Association Marcel Duchamp/ADAGP, Paris-SACK, Seoul, 2018. 가스조명과 폭포가 보인다. 여기서 물(폭포수)은 에로스의 메타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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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이나 '피카소'도 그랬지만 뒤샹은 에로티시즘을 창조의 샘으로 봤다. 프랑스 인문학자 '조르주 바티이유'는 이를 두고 '죽음마저도 축제로 바꾸는 힘'이라고 해석했다. 이렇듯 서양미술에서 에로스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뒤샹은 선구자다. 성 에너지를 고급화·예술화하는 걸 예술로 봤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들이 아직도 현실에서는 하위개념으로 취급받는다.

하여간 이 연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위 '에탕 돈네(Étant donnés/Given)'이다. 뒤샹이 1946년부터 1966년까지 20년간 이 미스터리한 작품을 남몰래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왔다. 전시에서는 '19금'이다. 뒤샹작품은 거의 다 이런 성적 함의를 담고 있다. 이런 관음증을 유발시키는 작품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서양미술의 오래된 전통인지 모른다.
 
뒤샹, '제3의 성' 창시자 
 
마르셀 뒤샹 I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만 레이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17.8x13.3cm, 1921년 작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 MAN RAY TRUST/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마르셀 뒤샹 I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만 레이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17.8x13.3cm, 1921년 작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 MAN RAY TRUST/ADAGP, Paris & SACK, Seou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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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이런 생각을 상징하는 말이 바로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다. 뒤샹이 '에로스 세라비(Eros, c'est la vie)'라는 프랑스어의 유사 동음이의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종의 말장난이다. 앤디 워홀도 그랬듯 뒤샹은 자신을 보석과 반지, 털목도리로 두른 아주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장을 한 후 친구 '만 레이'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하고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여성적 페르소나로 변장시키는 것을 즐겼다. 동시에 그는 모나리자를 '남성적 페르소나'로 바꿔 그리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성 역할을 넘어서는 '제3의 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독일헌법재판소에서는 이런 제3의 성을 합법화했다.

뒤샹과 백남준, 같으면서 다른 길
 
끝으로 뒤샹을 백남준과 관련해서 알아보자. 사실 둘은 경쟁관계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백남준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래서 백남준은 피아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반면 뒤샹은 전자아트를 몰랐기에 지구 안에서만 활동했다. 반면 백남준은 위성아트로 지구 밖으로 나갔다. 게다가 백남준은 인터넷을 착안하는데 아이디어를 제공해 '인터미디어'시대를 열었다. 
 
1963년 미국 '패서디나(LA)' 미술관에서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는 뒤샹. 여기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1963년 미국 "패서디나(LA)" 미술관에서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는 뒤샹. 여기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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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의 누드 퍼포먼스만 비교해 봐도 흥미롭다. 백남준의 첫 전시가 열린 1963년에 뒤샹은 첫 회고전을 열었다. 그는 여기서 '바비츠(Eve Babitz)'와 함께 '체스' 누드퍼포먼스를 펼쳤다. 백남준은 1978년 뒤셀도르프미대 교수 취임 때 '거이(Janice Guy)'와 함께 '피아노' 누드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여기서 누구의 것이 더 우위인가를 가늠하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여간 뒤샹은 '서양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백남준의 등장으로 그 위상이 흔들렸다. 하긴 두 사람은 나이차만 45년이 난다. 백남준은 뒤샹을 우연히 세 번 만났단다. 1974년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뒤샹이 비디오만 빼고 모든 걸 다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전자붓'으로 모니터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라는 면에서 뒤샹과 확연히 다르다.
 
여성적인 것에 관심이 높다는 면에서는 둘은 같다. 뒤샹은 여장으로 여성적인 것을 동경했지만 그럼에도 '에탕돈네'를 보면 여전히 남성적 시선이다. 그러나 여성성의 상징인 달 작품을 많이 했던 백남준은 유작마저도 '엄마(2005)'이다. 백남준은 처음부터 '여성주의'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뒤샹이 '제3의 성'을 창안했다면 백남준은 '제4의 성'을 상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전시와 연계해 마련한 '레디메이드 워크숍' 코너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전시와 연계해 마련한 "레디메이드 워크숍" 코너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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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관객의 참여로 전시가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는 둘은 다르지 않다. 1955년 뒤샹은 자신을 이해해 주는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 100년이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백남준은 한술 더 떠 더 오래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두 거장은 지금 하늘에서 만나 순수미술이나 상업미술의 경계를 넘어 현대미술이 나갈 방향을 체스를 두면서 논하고 있는지 모른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관객도 참여할 수 있는 MMCA 교육·문화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기성품(오브제)을 활용해 자신들 이야기를 일궈보는 '레디메이드 워크숍' 코너도 있고, 뒤샹처럼 가발을 쓰고 액세서리를 활용해 여장을 시연해 볼 수 있는 '에로즈 셀라비' 코너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더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http://www.mmca.go.kr)나 국립현대미술관 모바일 앱이나 대표전화 02)3701-9500 등을 활용하면 된다. 작품해설시간은 낮 12시 1층 전시실에서 시작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교육문화과 02)3701-9615에 문의하면 된다. [이번 전시와 관련된 글과 사진을 더 보려면 아래 사이트(https://seulsong.tistory.com/194)로 들어가면 된다. 50여장의 사진도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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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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