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의 포스터

영화 <말모이>의 포스터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초입인데 <말모이>의 문법이 보인다. 어떻게 진행될지 감이 잡힌다. 그러다보니 전개가 더디다 느껴지고, 마주한 장면을 건너뛰고프다. 벌써 지루하다니! 물론 과정을 보이려는 연출 의도가 짚이기는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눈이 유해진(김판수 역)의 표정들을 줌인한다. 매 맞아 곤죽이 되어서도 막내딸 앞에서는 웃음 짓는 감성적 캐릭터다. 김판수가 공동체성에 물들 즈음 나는 <말모이> 흐름에 절로 합류해 있다.
 
우리나라 최초 국어사전 이름이 될 뻔했으니, '말모이'의 뜻은 말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은 말꾸러미쯤 되겠다. 영화 속 대사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를 대입하면, '말모이'는 일제강점기를 버티는 우리 민족의 필수 먹거리다. 그 먹거리 마련 첫 시도가 1910년 무렵인데, 목숨 걸고 그 맥을 잇는 투쟁들을 1933년 북만주부터 1945년 해방 직후까지 엮은 게 <말모이>다.
 
나는 앱을 통해 웹에서 국어사전을 수시로 검색한다. 그 데이터 구축에 당시 무명 인물들의 죽음이 거름으로 쓰였음을 <말모이>는 일깨운다. 외계어가 신조어로 정리되기도 하는 웹 사전의 판올림을 문득 걱정할 만큼 감동적인 연출을 통해서다. 그 감동을 일군 건 둘이다. 하나는 유해진이 펼치는 폭넓은 감성 연기다. 다른 하나는 '말모이'를 꾸리는 공동체성 일구기다. 둘의 어우러짐이 <말모이>의 흥행 관건이다.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김판수는 극장 입구에서 표 받는 양아치다. 까막눈에다 '먹고사니즘'에 급급한 3인조 소매치기단 맏형이다. 그렇게만 보면 무식하고 막된 인간 같은데, 조선어학회 어른 조갑윤(김홍파 분)이 됨됨이를 보증한다. 거기에다 낯선 이들과 쉽게 어울리는 재미난 너스레가 더해져 악연 류정환(윤계상 분)의 고용살이꾼이 된다. 배만 부르면 벤또라는 말이 하등 문제될 게 없는 김판수의 입체적 변화 탓에 유해진의 표정밭이 풍성하다.
 
김판수는 가방끈이 아예 없지만 감성은 살아있는 뚝심 센 캐릭터다. 느끼함과 거리 먼 투박한 언행 사이로 야박하지 못한 무른 성품이 들어찬다. 또한 매서운 눈초리를 짐짓 속없는 너털웃음으로 가리는 식의 갈등 조율을 다반사로 한다. 그렇듯 티 나지 않게 극과 극의 이미지 사이를 오가려면, 속 깊은 털털함이 무르익어야 한다. 아들과 말모이 사이의 줄타기 연출에 더할 나위 없는 묘약이 유해진 캐스팅이다.
 
김판수 캐릭터는 <말모이>의 젖줄이다. 엄유나 감독은 김판수를 창조해 '말'과 '우리'를 엮는 <말모이>의 공동체성을 질박하게 부각시킨다. 너나없이 살맛나는 세상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찌르는 셈이다. 대개 가방 끈 긴 먹물들이 역사의 주류가 되는 현실에서 류정환류만으로는 모든 계층이 함께하는 '우리'가 될 수 없다. <말모이>는 각 지방의 방언들을 수집하고 표준어를 정하는 장면들에서 '우리'됨을 띄운다.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지금 여기서도 흔히 쓰이는 말 '우리'는 공동체성이다.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공동체성을 언급한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온 국민이 함께 누리는 경제"를 통해 "국민의 삶이 고르게 나아지고 불평등을 넘어 함께 잘 사는 사회로 가"자고 '함께'를 역설한다. 그걸 위한 불쏘시개가 "혁신"이다. 혁신은 벽을 허무는 관용을 전제한다. 류정환이 삶의 결이 다른 김판수를 동등한 인격체로 마주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간의 말모이가 통째로 압수되어 '문당책방'이 결딴났을 때, 류정환과 김판수의 케미가 빛을 발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내딛는 큰 걸음에 다름 아니다. 영화 < 1987 > 스페셜 포스터에도 명시된 그 걸음이다. 사장된 줄 알았던 '말모이'가 훗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그것이다.
 
함께하는 공동체성은 휴머니즘에 닿아 있다. <말모이>에서 내게 인상적인 휴머니즘은 조갑윤이 빚어낸 어른다운 여유와 따스함이다. 상대의 겉모습 너머를 통찰해 양아치 김판수를 조선어학회 일에 끌어들이고,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밀고자 민우철(민진웅 분)의 쓰라림을 다독인다. 아버지 김판수가 괴발개발 쓴 편지를 사전 갈피에서 발견하는 잘 자란 남매를 후일담으로 비추는 <말모이>의 결말도, 뻔한 감을 안기지만, 관객의 휴머니즘적 궁금증을 풀어 준다.
 
결국 <말모이>는 마음을 모아 이루는 마음모이에 다름 아니다. 우리말의 소중함을 새삼 환기시킨 <말모이>가 우리네 국어순화운동의 마음모이로 이어지면 좋겠다.
말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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