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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만 들어도 몸을 떨었다.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설립된 후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지금은 인권교육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은 1985년 당시 김근태 민청련 의장 고문 사건으로 전 세계 언론에 그 실체가 알려졌다. 1987년에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경찰총수인 치안본부장(강민창)이 기자회견에서 박종철이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한 말은 그 당시 국민들 모두가 기억한다.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스러져간 509호실, 물고문하던 욕조도 보인다.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스러져간 509호실, 물고문하던 욕조도 보인다.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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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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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뒤편에 있는 연행자 전용 출입문
 건물 뒤편에 있는 연행자 전용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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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나선형 철계단,  연행자들은 이 철계단을 올라가며 방향감각을 잃고 철계단을 오르며 나는 소리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한다.
 뒤편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나선형 철계단, 연행자들은 이 철계단을 올라가며 방향감각을 잃고 철계단을 오르며 나는 소리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한다.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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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3시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1호선 전철 남영역에서 내려 남산쪽으로 50미터 정도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100미터 정도 걸으면 경찰청인권보호센터(남영동 대공분실)가 나온다.

정문 옆 안내실에 방문록을 기입하면 관람 안내를 해 준다. 1층을 둘러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와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전기 고문을 받았던 515호실을 볼 수 있다.

조사실마다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박종철 열사가 스러진 509호만 물고문하던 욕조가 남아 있고 다른 조사실은 2000년대 리모델링하여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4층에는 박종철 기념관과 인권 교육 학습장이 있다.
 
5층 조사실 모습
 5층 조사실 모습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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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당시 민청련 의장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515호. 지금은 리모델링하여 김근태 추모시를 듣고, 녹음할 수 있도록 하였다.
 85년 당시 민청련 의장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515호. 지금은 리모델링하여 김근태 추모시를 듣고, 녹음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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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장 관련 서적들
 김근태 의장 관련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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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박종철 기념관 내부 모습
 4층 박종철 기념관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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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시민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

남영동 대공분실 1층에 들어서니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인권선언 1조.

남영동 대공분실 변화 역사를 보고 있는데 한 여성을 안내하는 남성이 있다. 그분이 1층 뒷문으로 안내하더니 당시 이 뒷문으로 연행자들을 이끌고 나선형 철계단을 통해 5층으로 데리고 갔는데,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발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안내를 하던 남성도 1980년대 1개월 동안 이곳에 갇혀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비실에서 근무를 하신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박종철, 김근태 같은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안내를 하시는 분의 말이 생각난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

태그:#남영동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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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취미가 있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이야기나 산행기록 등을 기사화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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