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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모이>의 한 장면
 <말모이>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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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에서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곳인 문당책방이 나온다. 문당책방 1층에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을 만들고, 이 잡지를 판매한다.

진짜 중요한 비밀 장소는 지하 1층에 있다. 이곳은 책장마다 조선말 어휘를 수집하여 분류하여 놓은 어휘 카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사전 편찬에 필요한 수많은 서적이 꽂혀 있다. 여기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은 사전편찬원들과 함께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하는 일을 진행한다. 동시에 전국의 사투리(방언, 토박이말)를 수집하여, 표준말 선정 작업도 한다.

문당책방 지하 1층 장소는 우리말을 모아 지키는 비밀 아지트로서 그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1940년대 누가 영화 <말모이>에 나오는 문당책방과 같은 사전편찬실을 제공하였는지 궁금할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도, 앞으로 보실 분들에게도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지금 시가로 땅값만 계산해도 12억... 통큰 결단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절에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말모이(우리말사전)를 편찬하도록 회관을 지어 기증한 분이 있었다. 바로 정세권(1888~1965) 선생이다. 정세권은 1935년 2층 양옥의 건물을 완성하고 이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 당시 건물의 시가가 4천여 원에 달하였다. 참고로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임금이 21원이었다.
 
 정세권 선생
 정세권 선생
ⓒ 정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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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정세권과 이극로(1893∼1978)는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관련 기사 : '말모이' 실제 주인공, 이극로 선생의 눈물겨운 삶). 조선어학회 대표인 이극로로부터 조선어학회가 회관이 없다는 말을 듣고, 정세권이 회관 부지를 매입했다.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1호 소재의 대지 32평을 샀다. 지금 시가로 땅값만 계산해도 12억 8천만 원에 달한다.

1935년 7월 11일에 조선어학회는 이곳에 입주했다. 1층은 조선어학회 대표(간사장) 이극로가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2층은 조선어학회 사무실 겸 사전편찬실이었다.

정세권은 1935년 이전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하고,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에도 참가했다. 1년 동안 준비한 뒤에 1920년부터 집을 건축했다. 고향 경남 고성 하이면의 전체 초가집을 없애고 기와집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는데, 서울에서 개량 한옥을 지어 꿈을 이루어냈다.

1920년에 개량 한옥을 짓는 건설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기 시작하여, 1943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한옥 수천 채를 건축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건축왕'으로 알려졌다.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 마을 모습 북촌 한옥
▲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 마을 모습 북촌 한옥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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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권은 건축업에서 얻은 이익을 민족운동에 쏟아부었다. 민족운동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기업 경영을 통해 번 돈을 민족국가 회복에 투여한 자본가를 '민족자본가'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정세권이 여기에 해당했다.

정세권은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 활동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이었다.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상무이사를 맡아 진두지휘했다. 대표적인 물산장려운동가였다.

정세권이 조선어학회의 언어 독립투쟁을 후원하게 된 계기는 이극로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회의 석상에서 만났다.
 
 이극로 선생(1893∼1978)
 이극로 선생(1893∼1978)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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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9년 1월에 귀국했다. 그는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같은 해 4월에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했다. 이어 10월 31일에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연구회의 회원들과 협의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 위원장에 선임됐다. 서울 수표정 42번지에 주소를 둔 조선교육협회회관 건물의 사무실 한 칸을 빌렸다. 셋방에서 사전편찬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1929년 12월 3일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조선 물산 선전 대강연회에서 이극로가 '주의선전-자작자급의 본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베 짜서 옷 지어 입기', '외국상품 쓰지 않기'를 실천해야 조선인이 궁핍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을 마치고, 회의 석상에서 이극로는 조선말과 한글을 통일해 조선어사전을 완성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내가 널리 들은즉 한 민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통일된 말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말이 있어도 통일된 글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글까지 있어도 사전이 없으면 문화 민족으로 행세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이 오래전부터 있지마는 통일되지 못하였고 사전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깊이 느끼어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완성함으로써 일생의 사업으로 하겠소."

그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이 이극로의 이 말을 들었다. 바로 이 자리에 정세권도 있었다. 정세권은 거의 30여 년이 지나 조선말 큰사전이 완성된 1957년에 이 말을 한 주인공을 익명으로 기술했다(정세권, 「큰사전 완성을 축하함」, <한글>122, 1957, 10). 익명의 주인공은 바로 이극로였다. 분단 현실 때문에 정세권이 이극로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이극로의 이 말을 들은 지 몇 달 뒤에, 정세권은 수표정 조선교육협회의 방 한 칸에서 사전편찬원들이 계속해서 모여 작업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들의 모임이 거의 10여 년 지속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런 과정에서, 정세권은 조선어학회의 언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3년에 조선어학회가 확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지지했다.

조선어학회는 표준어 확정을 위한 독회(讀會)를 온양에서 열었다. 1935년 1월 온양온천에서 제1독회(1. 2∼1. 6)를 진행했다. 1월 6일에 표준어 사정위원들은 이순신의 사당이 있는 현충사를 참배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정세권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제1독회의 비용은 정세권이 전담했다.

우리말 지키는 터이자 민족 수난의 장소였던 그곳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참배하고서.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정세권 선생.(1935년 1월 6일 촬영.) 둘째 줄 왼쪽에 이극로 선생도 있다.
▲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참배하고서.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정세권 선생.(1935년 1월 6일 촬영.) 둘째 줄 왼쪽에 이극로 선생도 있다.
ⓒ 신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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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세권은 1935년 3월 이극로가 조직한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아울러 정세권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이극로가 추진한 학술연구기관인 양사원(養士院)의 건립에 참여했다. 이극로는 가난한 조선 학자를 구제하는 사업으로 학술연구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양사원은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이었다. 정세권은 1941년경에 양사원 건립에 도움을 주고자, 서울 가회동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내놓았다. 실로 대단한 결단이었다.

1935년 정세권으로부터 회관을 기증받은 조선어학회는 2층 사무실에서 이극로, 이중화, 한징, 정인승, 권덕규, 정태진, 권승욱, 이석린 등 8명의 사전편찬 정리위원들을 주축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사전을 편찬했다.

조선어학회의 2층 사무실 입구에는 한글로 "일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오"라는 문구를 붙여 두었다. 이는 회원들이 시간을 아끼며 사무에 정진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극로와 이중화, 한징은 언제나 한복 옷차림으로 일을 보았다. 이렇게 이들은 조선어학회 사무실의 침침한 방의 한구석에서 서적과 어휘를 적은 카드 사이에 끼어 일생을 보냈다. 추운 겨울날에 난로도 넉넉히 때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 호떡으로 연명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정세권이 희사한 회관에서 조선어 표준말 사정 작업을 완수하여 1936년 한글날에 발표했다. 동시에 조선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지속하여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를 완료, 대동출판사에 넘겨 1942년 조판까지 진척했다.

그러자 일제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탄압한 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1942년 10월 1일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일제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에 관여하고 있던 33인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이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1942년 10월 1일 대표 이극로가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끌려갔다. 이극로는 함흥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에 풀려났다. 아울러 이곳에 있던 사전 편찬 원고도 일제의 재판 증거물이 되어 함흥으로 이송됐다.

이처럼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의 조선어학회 회관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을 맞이한 장소였고,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가 체포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곳은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사전 원고를 일제에게 강탈당하기도 한 민족 수난의 장소였다.
 
 조선어학회 회관(서울 종로구 화동 129-1)의 위치 지적도
 조선어학회 회관(서울 종로구 화동 129-1)의 위치 지적도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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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 회관(화동 129-1)의 현재 모습
 조선어학회 회관(화동 129-1)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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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정세권이 기증한 조선어학회 회관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 애국지사들이 영웅적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킨 항일투쟁의 장소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정세권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기증한 점,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이사로 활동한 점, 양사원 건립에 참여한 점, 그리고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에 후원을 한 점 때문에 홍원경찰서에 끌려가 일제 경찰에게 곤욕을 당했다.

정세권은 1942년 11월에 홍원경찰서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일제 형사들은 "왜 하필이면 화동에 조선어학회 가옥을 지었소?"라고 정세권에게 계속 심문했다. 이후에도 정세권은 지속적으로 경찰에 불려 다녔다. 일제말기 정세권이 일본 집을 짓지 않자, 일제는 "왜 한옥만 짓느냐? 일본 집을 지어라"라고 강요했다. 정세권이 따르지 않았다. 끝까지 한옥만 지었다.

<말모이>와 함께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일제는 정세권을 탄압하고자 그를 경제사범으로 몰아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1943년(56세) 6월 18일부터 7월 6일까지 19일 동안 아들 정균식과 함께 구속했다. 구속 기간에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 사건, 특히 정세권의 양사원 관련 경위를 문제 삼아 이를 묵인하는 조건으로 서울 성동구 자양동(뚝섬) 일대의 토지 3만 5279평을 친일단체인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에 바치라고 강요했다.

즉, 조선총독부 산하 보호관찰소가 강제로 조작하여, 정세권의 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과 그 부대농지 3만 5천여 평을 6월 23일부로 강제로 빼앗았다. 그리고 경성 대화숙으로 소유권을 강제로 이전했다. 정세권은 막대한 재산을 일제에게 강탈당했다. 그 후 일제는 정세권의 건축면허증까지 박탈했다. 이처럼 독립운동 참여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정세권의 사업은 기울었고 재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권은 이극로가 함흥형무소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을 뒷바라지했다. 아울러 1943년에 집에 찾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의 수하에게 군자금(독립 자금)으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제공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세권의 독립운동 참여, 특히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기증하여 우리말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세권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제5-112)에 있다.

영화 <말모이>에는 조선어학회의 직원들이 대단히 넓은 평수의 집에서 말모이 편찬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회관이 생긴 이후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 전까지는 안정적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추진했다.

조선어학회가 셋방살이를 계속 전전했다면, 과연 1942년에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조선어학자들에게 물적 토대인 회관을 지어 기증해준 정세권 선생의 공로에 대해서도, 영화 <말모이>를 보면서 기억하여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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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