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스틸 컷.

영화 <말모이>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문화의 으뜸은 말과 글이다

지난 주말(12일) 원주의 한 영화관에서 <말모이>를 봤다.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30여 년 국어를 가르쳐 왔다. 영화 <말모이>는 평생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도록 줄곧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작품 <마지막 수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멜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차례차례로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이 작품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 알자스의 어느 마을 학교를 무대로, 한 소년의 맑은 눈을 통해 알자스 지방의 불행한 역사와 자기네 모국어를 지키는 아멜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잘 그렸다. 나는 이 작품을 중학교 때에 읽었는데,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을 생전에 만나 뵐 때면 꼭 아멜 선생을 대한 듯했다. 이 선생님은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아주 고집스레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평생 동안 온몸을 바치셨다.
 
그 모습은 마치 일제강점기 때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투사처럼 거룩했다. 하긴 총칼을 들고 일제와 맞서 싸운 것만이 독립운동의 전부는 아니다. 붓을 들고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조선어 학자들도 그에 못지않은 독립투사다. 우리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면 해방이나 독립으로 알고 있는데, 그 영토뿐 아니라 문화도 되찾을 때라야만 진정한 독립이라 할 수 있다. 문화의 으뜸은 말과 글이다.

민주주의는 우리말로써 창조해야
 
 생전의 이오덕 선생님

생전의 이오덕 선생님 ⓒ 박도

   
내가 이오덕 선생의 글을 보고 참 대단한 어른으로 여긴 지는 오래였지만, 직접 만나 뵙고 속 깊은 말씀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1997년부터다. 그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선생님을 뵙고자 당시 사시던 곳으로 찾아갔다. 좁은 아파트 안은 온통 책으로 가득 찼다. 부엌 밥 짓는 곳과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통로를 뺀 나머지 공간은 모두 책이었다. 큰 밥상 위에도 신문과 책들이 수북이 쌓였다.
 
"이 신문들 좀 보세요. '뾰족탑' 하면 될 텐데, 하나 같이 '첨탑(尖塔)'이라고 하고 있네요. 한글만 쓴다는 <한겨레>조차도 그렇게 쓰고 있어요."
 
그 무렵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을 헐어내는 보도 기사에 대한 선생님의 불만이었다. 선생님은 모든 인쇄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꼼꼼히 보셨다. 그런 후, 잘못된 표기나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외국어로 적은 말은 일일이 찾아서, 글쓴이나 편집자에게 낱낱이 알리는 일도 서슴지 않으셨다.
 
이오덕 선생의 바탕 뜻은 다음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한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 말이 들어온 역사도 한자말 - 일본말 - 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한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한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오덕 선생 무덤 앞에서 기자.

이오덕 선생 무덤 앞에서 기자. ⓒ 박도

  
내가 산문집을 펴내면서 선생님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아주 꼼꼼히 읽으신 후, 여러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
 
식탁→ 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이따금씩→ 이따금, 교육이란 미명으로→ 교육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입장→처지, 주방→부엌, 야채→채소·남새, 획일적→ 판에 박은 듯이, 국민·민초→ 백성, 먹거리→ 먹을거리...
 
나는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글을 고쳐 놓고 보니 글이 훨씬 더 깨끔했다. 선생님은 이밖에도 '~적(的)', '그녀', '및', '등' '에 있어서' '에의' 따위도 일본말의 찌꺼기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말로 고쳐 쓰거나 아예 못 쓰게 하셨다. 또, 서양 말법을 따른 '-었(았)었다'라는 과거 완료형 시제는 우리 말법에 없는 잘못으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깨트린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자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해방 후 세대로 우리말과 글을 거의 평생 배우며 쓰고 가르치며 살아왔는데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한자말이나 외래어 일본말투, 서양 말법을 예사로 써 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에 대한 선생의 보탬 말씀을 듣고는 남녀평등에 대한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여자를 가리킬 때만 '그녀'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를 가리킬 때면 '그남'이라고 해야 되지요. 남녀 없이 '그'로 쓰면 됩니다."
 
이즈음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외국의 문화가 밀물처럼 덮쳐와 우리 고유문화를 크게 오염시키고 있다. 생각없는 백성들은 제 나랏말보다 외국말을 더 먼저 가르치겠다고 심지어 부부 별거도 서슴지 않고 있다. 한때 일부 사대사상에 빠진 학자나 관리들은 국제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영어의 공용까지 주장하며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 중 일부를 영어로 가르치자는 시안을 내 우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영화 <말모이> 스틸 컷.

영화 <말모이>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을 펴내고자 노력한 조선어학회 학자들의 눈물겨운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이 나라 백성들이라면 꼭 봐야 할, 오랜만에 보는 좋은 작품으로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와 함께 널리 추천하는 바이다.
말모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