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뮤지컬 <명동로망스> 포스터

뮤지컬 <명동로망스> 포스터 ⓒ 장인엔터테인먼트

 
가슴이 뜨거워지는 작품
 
올해 첫 뮤지컬로 선택한 작품은 <명동로망스>였다. 열심히 살아갈 희망을 주는 극이다. 이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극을 보는 동안이라도 뜨겁게 꿈꿀 수 있는 작품이다.
 
2019년에 살고 있는 9급 공무원 장선호는 명동 주민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민원 사항들을 처리하며 하루하루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한 상사가 부탁한 명동 재개발 사업에 연루된다. 선호의 업무는 간단하다. 명동에 있는 한 낡은 다방에 가서 주인 할머니한테 사인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선호가 찾아간 다방은 상상 이상으로 낡아있었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 마담은 오랜만에 다방을 찾아온 손님 선호를 반긴다. 그런데 자꾸만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할머니와 선호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벽장으로 향한다. 이후 정신을 차린 선호는 그곳이 1956년 명동 로망스 다방 벽장 안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과거로 온 선호는 그곳에서 신기한 예술가들을 만난다. 바로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수필가 전혜린이었다.
 
1956년 명동 로망스 다방에서 만난 예술가들
 
선호가 찾아간 1956년 당시는 이중섭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며 그림 대신 노동을 하겠다고 방황하던 시기였고, 박인환은 시인 이상을 동경하며 매일 같이 시를 쓰고 있었다. 전혜린은 글을 쓰겠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던 문학소녀였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 같이 찾는 다방에는 화끈하면서도 따뜻한 마담 성여인이 있었다.
 
박인환은 참 멋있는 시인이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용감한 시민이면서 술을 좋아하는 낭만적인 면도 있었다. 다방에는 줄줄이 외상값을 달아놓고 있었지만 생명수인 술은 절대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 시절에 미국을 다녀왔으니 자연스레 신문물에 익숙하고 개방적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도 새로웠다. 당시는 오로지 순수 국어만 고집하던 시절이었다. 외래어를 쓰면 "겉멋만 들었다" "속물이다"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지만 박인환은 '프롬 나드' '패시미즘' 등 외래어를 그대로 글에 쓰면서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독보적인 글 색깔을 만들어갔다.
 
<명동 로망스>에는 이런 매력적인 박인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아주 사랑해서 자주 읊었는데,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려 경찰서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앞에서 "내게 금지된 길을 가지 말라는 자 누구인가. 내 발길을 붙잡는 저 통행금지 사이렌은 내가 가야할 길을 막아서는 적인가가지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막아서는 벗인가"라고 '젠틀'하게 이야기는 모습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2019년 미래에서 왔다는 선호에게 자신의 시를 낭독하며 아느냐고 물을 때면 그의 눈이 순수하게 빛났다.
 
그림 밖에 모르는 순정남 이중섭
 
본래 이중섭은 애처가로 유명하다. 일본인 아내와 떨어져 살게 되면서 그 그리움은 더욱 더 깊어져갔다. 그의 삶에서 가족과 그림을 빼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이중섭은 그림을 팔아도 제 값을 못 받았고 점점 생활이 힘들어졌다. 처자식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그림이라며 구두통을 들고 노동을 하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선호가 커피 위에 그린 라떼아트의 흰 우유 거품을 보고는 당장 구두통을 던지고 그림을 그리러 달려갔다. 정신 차려 보니 커다란 황소 그림이 어느새 눈앞에 완성돼 있었다. 그걸 본 이중섭은 "내가 또 그림을 그렸다"며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중섭은 다방을 찾는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어두운 인물이다. 즐겁게 어울리기 보다는 항상 어깨가 축 처져 있고 가족들 생각밖에 없다. 다방이 조용할 때면 찾아와 은박지 위에 아내와 아이들 그림을 그리고 마담으로부터 아내의 편지를 전해 받고는 했다.
 
그런데 작품 속 이중섭의 첫 인상은 어두운 사람이었는데 그의 따뜻한 마음을 알고 나니 가장 여린 사람이자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울린 사람도 이중섭이었다. 당시 예술가들을 검열하던 경찰관이 이중섭을 향해 "북에서 태어나고 아내는 일본이네"라며 "반일 반공 나라에 반하는 인물이잖아"라고 말했을 때 이중섭은 "태어나 보니 거기였고 사랑하고 보니 그이였다"며 울부짖었다. 극 내내 큰소리 한번 안 내던 이중섭이었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다음이라는 시간이 있기는 해요?"
 
전혜린은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딱딱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제일 순수하다. 혜린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맨발로 거리를 걷기도 하고 통행금지 사이렌 따위 무시하고 박인환과 술을 마시러 다니기도 한다. 비록 가끔씩 글도 안 쓰면서 남자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말을 듣지만 자신의 삶에 확신이 있다.
 
전혜린은 참 현실성 없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저렇게 항상 열정이 넘치고 솔직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현실성 없는 인물이라서 더 끌리고 멋있어보였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뚜렷한 신념을 가진 전혜린과 꿈이 없다는 장선호가 대조되니까 그녀의 순수한 열정이 더 숭고해보였다.
 
예술가들의 아지트, 그 곳의 마담
 
명동 로망스 다방은 예술가들을 지켜주던 곳이다. 그 시절 돈 없고 쓸쓸했던 예술가들이 갈 곳이 있었을까. 그렇게 하나 둘씩 다방에 모이기 시작했다. 비록 외상값을 달아 놓는 예술가들이 더 많았지만 마담은 싫은 내색 없이 오히려 더 챙겨준다. 가족의 편지를 대신 받아주기도 하고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다방에서 재워주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힘들어할 때면 보듬어주고 때로는 같이 욕도 해주는 인간미가 넘치는 마담이다. 그리고 사실 마담도 예술을 사랑한다. 비록 혜린에게 "법대생이 문인이 되기는 아깝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글도 음악도 미술도 좋아한다.
 
작품을 보고나서 내 소원이 로망스 다방에 가는 것이었는데 이 이유가 바로 마담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들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모습에도 반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유쾌한 매력도 넘친다. 커피를 내리는 무거운 맷돌을 한 손으로 번쩍 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일부러 무거운 척을 하기도 하고 애교도 부린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던 선호는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자기만의 꿈꾸는 세상'을 가슴 속에 품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예술가들은 어찌 보면 좀 비현실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기도 한다. 선호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됐든 저들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들이니까. 그렇지만 이 작품을 천천히 따라 가다보면 선호도 관객들도 꿈을 꾸고 싶어질 것이다. 그만큼 열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귀엽고 유쾌한데 눈물까지 나는 작품
 
<명동 로망스>는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귀엽다. 인물들의 삶은 고되고 아프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 함께 꿈꾸고 위로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간다. 작품 초반은 계속 웃음이 터질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와 애드리브 대사, 앙증맞은 안무들이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물이 난다.
 
선호와 마찬가지로 나도 현대를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걸까. 꿈이 없고 미래로 돌아가도 할 일이 없다는 선호에게 "그러니까 제대로 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이중섭의 말이 아직도 가슴 속에 꽂혀있다. 그리고 그 이후 이유 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단지 열심히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 때문이 아니다. 어찌 보면 꿈을 찾으라는 뻔한 이야기지만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가 바탕이다 보니 더 생생하고 아팠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도 된다는 용기'와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나만의 세상을 그릴 수는 있다'는 <명동 로망스> 인물들의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명동 로망스>가 어서 다음 시즌으로 돌아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뮤지컬명동로망스 명동로망스 최호중 손유동 홍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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