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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오른쪽)과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
 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오른쪽)과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
ⓒ 더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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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1월 9일 개봉)에 나오는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은 1940년대 전국의 사투리(토박이말)를 모아, 그 가운데 표준말을 골라 확정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동시에 16만 어휘를 뜻풀이하는 '말모이'(우리말사전) 편찬 작업도 진행했다.
  
영화 <말모이>를 보신 분들은 1940년대 조선어학회 대표가 누구인지 궁금할 법하다. 앞으로 영화를 감상할 분들에게도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1940년대 조선어학회 대표는 이극로(1893∼1978) 선생이었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어학회 사건'(1942)에 대한 재판 판결문 두 개, 즉 예심종결 결정문(1943)과 최종판결문(1945)에는 "조선어학회 책임자 이극로"라고 표기돼 있다.

그는 1대(1931∼1932)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을, 2대(1932~1933)에서 6대(1936∼1937)까지 전부 간사를, 7대(1937∼1938)엔 간사장을, 8대(1938)에서 12대(1942)까지 조선어학회를 운영했다.

<말모이> 류정환의 실제 모델, 이극로 선생
 
이극로 선생의 모습 이극로
▲ 이극로 선생의 모습 이극로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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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선생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 위원장이 됐다.

1931년 우리의 말과 글을 정리하고 통일하고자 조선어학회를 출범시킨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서도 상무간사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깨알만한 작은 글씨로 수첩에 적어두고서 학회의 일을 추진했다. 이처럼 그는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모두 핵심 역할을 하며, 두 기관을 주도했다.

그는 다른 회원과 달리 언어 독립운동을 전담하고자 따로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언어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식민지가 된 조선 사회에 이극로가 공헌하고자 하였던 핵심 내용은 우리 말글의 규범을 수립해 조선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운동을 완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언어 독립운동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김성수가 제안한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지금의 고려대 총장)도 사양했다. 당시 전문학교 교장직은 명예와 경제적 보수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이를 사양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언어 독립운동을 중시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팍팍했던 '언어 독립운동가'의 삶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출범은 했으나 사전 편찬을 위한 재정은 확보하지 못했다. 당시 사전편찬회의 재정은 너무도 열악해 사전 편찬실 직원 월급도 제때에 지불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책임자인 이극로 선생 자신의 생활비가 있을 턱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인이 보통학교의 교사로 있었기에, 가계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식비도 줄일 겸 이극로 선생은 식사도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다.

김선기·한징·이윤재 등 사전편찬을 전담할 집필위원에게 최소한의 생활비조차 지급할 수 없었다. 이극로 선생은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고심했다. 그의 자서전(1978)을 살펴보자.

"이리 뛰고 저리 뛰나 단돈 몇 푼 주는 이 없다. 나의 집에도 재산이라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하던 끝에 모스크바에서 리동휘가 기념으로 준 망원경과 사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벌의 양복과 함께 안국동 환정 왜놈 전당포에 가져다 잡히고 10원의 돈을 구하여 그 달은 기근을 면하게 되었다.

또 새날이 온다.

몇 벌 안 되는 옷들이 전당포에 들어갔다왔다 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더니 나중에는 옷 찾을 돈마저 없어 전당포에 아주 들어가고 말았다.

또 그 밖의 재산으로는 내가 결혼 당시에 형님들이 해주신 금반지, 비녀, 금귀이개가 있었다. 나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

하루는 안해(아내)에게 '사업에서 대단히 재정 곤란을 가져와 회원들이 굶고 있으니 그 물건을 팔면 1백∼2백 원은 될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이 위국을 면케 해주어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하는 사업이 성공만 하면 당신 열손가락에 금반지, 보석반지를 다 끼워주겠다'고 우스운 말을 하면서 면구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안해는 서슴없이 그의 언니에게 부탁하여 팔게 되니 돈 250원이 되었다. 그럭저럭 그 해도 지나갔다. (중략) 극도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만무하다."


이극로 선생의 사진기와 망원경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선배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으로부터 사진기와 망원경을 선물로 받았기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1921년 6월에 이극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모스크바 동행 요청을 받아들였다. 중국어와 서양어의 통역이 이극로 선생의 임무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통역하는 일을 마치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1922년 초에 이동휘 선생과 헤어지면서 이극로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별 기념으로 이동휘 선생은 사진기와 망원경을 선물로 그에게 줬다. 이극로 선생은 이 사진기를 가지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위스의 알프스산과 미국의 그랜드 캐년(지하금강)과 하와이의 화산구들을 가까이 보며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기와 망원경은 수백 원의 가격을 가진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을 제값의 10분의 1도 못 되게 전당포에 저당 잡혔다가 결국 되돌려 받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에 있는 재산인 금비녀와 금반지와 금귀이개도 전당포에 저당을 잡혔다. 250원 정도가 됐단다. 이 돈을 굶고 있는 사전 편찬위원들에게 나눠줘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다가 되찾을 돈이 없어 이것마저 전당포에 들어가 버렸다. 그는 아내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내가 지금 하는 사업이 성공만 하면 당신 열 손가락에 금반지, 보석반지를 다 끼워주겠다"라며 아내를 위로했다고 한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 1939년 12월 24일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촬영
▲ 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 1939년 12월 24일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촬영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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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6월부터 사전 편찬 사업은 재정문제 때문에 난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사전편찬 작업은 일단 접고, 사전 편찬의 기초공작인 조선어 철자법 통일과 조선어 표준어 확정에만 주력했다.

1936년 3월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온 사전 편찬 업무를 인계했다. 이극로 선생은 같은 해 사전편찬 후원회도 조직하여 재정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1938년 서울 안국동 공안과에서 그는 "한글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면서 "서슬이 시퍼런 일본 제국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대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일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언어는 민족의 기본이며 중심핵이었다. 언어를 유지시키면 민족은 유지되고 끝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은 표준말 제정을 돕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동포들에게 "말은 곧 정신입니다"라는 연설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엄유나 감독이 이 영화의 극본까지 쓴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고 주장한 이극로 선생의 자료를 최초로 발굴했고,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2005),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 <조선어학회 33인>(2014),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공저, 2010) 등의 저서를 통해 이 말을 알려왔다. 그 와중에 엄유나 감독은 영화 <말모이>를 통해 이극로 선생의 핵심 정신을 꼭 짚어줬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모진 고문까지 당하다

1942년 봄,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대사전의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사전 편찬을 중단시켰다. 일제는 사전 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의 대표인 이극로 선생은 가정 경제를 아내에게만 맡기고 오직 민족어 규범을 수립하고,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합법적 공간을 이용해 한글운동이라는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한글운동은 우리 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해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항일 투쟁이요, 민족 해방 운동이요, 언어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의 대표였던 이극로 선생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겸하던 자택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그를 포함하여 조선어학회 관련자 33명이 체포됐다.

이극로는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뒤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제1일에는 2차례, 제2일에 3차례, 제3일에는 2차례, 도합 7차례나 기절했다. 악형으로 말미암아 손톱과 발톱도 빠졌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의 재판부(니시다 판사)는 예심종결에 의거, 개정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해 이극로 선생에 징역 6년형을 언도했다. 이극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에 따라 8월 17일에 석방됐다.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이극로 선생은 남한에서 동지들과 조선어학회를 재건한 뒤, 학회의 대표(간사장·상무이사)로써 학회를 운영해 나갔다. <조선말 큰사전>(1947) 1권이 나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4월 건민회 대표와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평양에 가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이후 북에 잔류했다.

조선 민중을 조명한 영화 <말모이>
 
<조선말 큰사전>6권(1947∼1957)의 모습 조선말 큰사전
▲ <조선말 큰사전>6권(1947∼1957)의 모습 조선말 큰사전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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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류정환은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하여, 말모이 편찬을 함께하다가 일제의 총을 맞고 산화한 '김판수 동지'의 자식들에게 친필로 "김판수 동지께"라고 쓴 <조선말 큰사전>을 준다.

이 영화는 또 다른 주인공인 '김판수'(유해진 분)를 내세워, '말모이' 편찬에 도움을 준 조선 민중을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로 어휘 수집, 특히 사투리(방언, 토박이말) 수집을 위하여 5000여 명의 중등학생과 소학교 교원이 동원됐다. 말모이 편찬에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 점을 영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냈다. 

<조선말 큰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와 그 대표 이극로 선생이 조선 민족에게 준 선물이었다. 영화 <말모이>는 말모이 편찬을 통해 우리 말과 한글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독립의 준비물이고, 독립운동이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마지막으로 꿀팁 하나. 영화 <말모이>에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아버지 류완택은 친일을 일삼고 있는 경성제일중학교 이사장으로 나오고 있다. 극적인 역할 설정이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대표였던 이극로 선생의 부친은 이근주(1849∼1923) 선생으로, 경남 의령의 평범한 농민이었다. 마을에서 의원 일을 했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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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