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모이> 포스터

<밀모이>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과거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9일 개봉한 <말모이>는 일제 강점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일본이 자행한 역사적 죄과를 비판하면서 말글살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다.
 
<말모이>의 특징은 일제 강점기 민중들의 저항을 색다르게 그려낸 항일영화라는 데 있다. 최근 개봉한 <암살>이나 <밀정> 등이 일제하 독립운동을 다루면서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을 그렸다면 <말모이>는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는 우리말에 대한 가치를 높이면서 이를 지켜낸 사람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항일영화들과 비교하면 표현방식이 한발 더 나아갔다.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의 후반부로 민족말살통치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본은 초반 무력통치에서, 조선민중이 강력한 저항으로 맞선 3.1 만세혁명 이후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이후 1930년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국내의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사상통제도 강화한다.
 
1930년대 중반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을 내세운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앞둔 1940년에는 1938년 발족한 '국민총력 조선연맹'을 앞세워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시켰다. 한글 사용과 교육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해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한 것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것으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다. 조선의 민중들이 평범하게 쓰는 말과 글을 빼앗기 위한 만행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글을 사용하고 우리식 이름을 지키는 것 자체가 저항이던 시절이었다.
 
까막눈의 자각
 
 <말모이>의 한 장면

<말모이>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 판수라는 인물을 통해 말글살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극장 일을 하다 잘 안 되면 소매치기도 하는 판수는 감옥을 들락날락했던 인물이다. 당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문맹이 적지 않았던 시대, 가난한 민중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 판수가 감옥소 동기인 조선어학회 어른을 통해 조선어학회 사환으로 일하면서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는 것 아니냐며 일제 치하의 학정을 체념한 듯 순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민중들에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에 눈을 뜨기 시작해 읽고 쓰기가 가능해지는 순간 우리말과 글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되고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삶에 뒤섞이는 과정에서 동지로서 자부심을 갖게 만든다. 까막눈 소시민이 글을 깨우치며 시나브로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것이다.
 
판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조선어학회의 사건은 일제강점기 말글살이를 지켜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보였던 한글학자들의 모습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그리고 1929년부터 시작된 '우리말 큰사전' 편찬 작업이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이겨내고 완성되는 것 역시 극적으로 묘사하면서 긴장감을 더한다.
 
식민 지배를 겪으며 끝까지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한글학자들에 대한 헌사가 담겨 있는 <말모이>의 영화적 언어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이 강요했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강압적인 일본말 사용을 강요를 이겨내면서 끝끝내 우리말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던 민중들의 작은 노력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부인하려는 일본에 대해 영화적인 비판도 섞여 있다는 점에서 <말모이>가 주는 무게감은 묵직하다. 조선을 강점한 후 일본이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말과 글까지 없애려고 했던 과거사에 경각심을 일으키게 한다.
 
최근 한일 간의 갈등역시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궤변으로 일관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과 맞닿아 있어서다. 일본의 망각과 함께 친일파들의 논리 역시 영화를 통해 날 서게 비판하고 비꼰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바꾸는 세상
 
 말모이의 한 장면

말모이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는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을 1940년대로 몰아서 묘사했다는 점에서 '팩션' 영화다. 실제적 사건을 그렸지만 큰 줄기만 빼고는 상상력을 발휘해 창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항일 역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이 치밀하지는 않다.
 
영화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에서 시작돼, 법정투쟁이 일제말기 경성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배경이 경성으로 한정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실제 벌어진 일에 상상력이 풍부하게 발휘된 결과다.
 
한편으로 민주화를 다룬 현대사 영화들과 맥을 같이 한다. 영화 < 1987 >이 평범한 시민들의 노력이 민주화를 이루는 데 역할을 한 것을 강조했고, <택시운전사>가 택시운전사의 시선으로 5월 광주의 실상을 전달했다면, <말모이> 역시 이름 없는 민중들이 독립을 위해 애쓴 작은 노력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초들의 작은 노력이 말을 모으듯 마음을 모으듯 뜻을 모으듯 하나로 모아질 때 세상을 바꾸고 시대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영화가 남겨주는 깊은 여운이다.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는 열사람의 한 걸음'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모이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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