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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코다 호텔 객실 창밖 너도밤나무 숲 핫코다 산은 자연의 보고로 신록부터 단풍 그리고 설경을 즐길 수 있다 ⓒ 정명조
 
'현(県)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설국> 
 
지난해 여름, 10여 년 만에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여행사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설국 여행을 예약했다. 아키타의 설국, 속세를 거부하는 환상의 료칸을 기대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겨울 추위는 매섭지 않았다. 12월 중반이 지나고 송년 모임을 몇 번 하고 나니 출발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오래된 '한효주 디카'를 챙겼다. 인생 최고 장면을 찍어야 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부부 여행인가! 힐링 여행이니 설렁설렁 출국 전날 밤에 여행 가방을 챙겼다.

"눈의 숲속에서 온천에 잠기는 유토피아"   

출국하는 날 대전발 오전 5시 5분 버스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니 공항이었다. 가이드 미팅과 체크인 후 KAL 라운지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비행기는 정시 출발했다. 네 번째 일본행이다. 두 시간여 만에 아오모리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은 여전히 친절하고 추웠다.
 
첫 방문지는 일본 예술 성지 아오모리(靑森) 현립미술관이었다. 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와 팝 아트 작가 '나라 요시모토', 일본 애니메이션 전설 '나리타 토오루' 등 개성 넘치는 아오모리현 출신 아티스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미는 미술관 중심부 네 벽면을 꽉 채운 샤갈 작품이었다. 발레 '알레코' 무대 배경화이다. 2006년 개관 당시에는 제3막을 제외하고 1·2·4막만 전시하였으나, 지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제3막을 대여하여 전 4막을 전시하고 있었다. 2020년까지 장기대여라고 한다. 제3막이 다시 반환되고 서로 불완전체로 전시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가로 15m, 세로 9m 커다란 화폭에 샤갈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었다.  
샤갈의 발레 ‘알레코’ 배경화 제3막 ‘어느 여름날 오후 밀밭’(오른쪽)과 제4막 ‘상트페테르부르크 환상’(왼쪽)이다 ⓒ 정명조
 
대형버스로 이동한 후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5km 달려 료칸 미야코와쓰레에 도착했다. 2018년 판 <감동의 온천 숙소 100>에서 저자는 이 료칸을 '설경이 아름다운 숙소 7선'의 하나로 선정하며, "눈의 숲속에서 온천에 잠기는 유토피아"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겨울 낙원이다. 겨울 숲은 조용히 호흡한다. (중략) 객실은 겨우 10개지만 객실마다 전용 노천탕이 있다. 객실에서 몇 걸음에 혼자 눈 속에서 온천에 몸을 담근다. 꿈의 세계가 여기이다. (중략) 이곳이 낙원인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비경 온천 개념을 확 바꾼 맛있는 음식이다. (중략) 이곳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릉도원이다." 
 
료칸 미야코와쓰레 전경 사방 5km 이내에 어떤 시설도 없는 조용한 곳에 있다 ⓒ 정명조
 
이런 곳이라면 눈에 며칠 갇혀도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노천 온천욕, 환상적인 가이세키 만찬, 티타임을 즐긴 후 설레는 첫날 밤을 보냈다.
 
"사방의 눈 얼어붙은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별 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먼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설국>
    
객실 전용 노천 온천 노천탕의 온도는 온천물의 유입 속도를 조절하여 40~42도를 유지한다 ⓒ 정명조

여행 이틀째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로 유명한 다자와 호수에 갔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다. 수심이 423.4m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소망하다 호수 수호신인 용이 되었다는 전설 속 공주 다츠코(辰子) 히메! 그녀 동상이 호수 가장자리에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이병헌과 김태희가 애틋하게 포옹하는 장면이 방영된 후, 이곳을 찾는 사람이 급증했다고 한다. 드라마 <아이리스>는 아키타현 20여 곳에서 촬영하였는데, 지금도 뉴토(乳頭) 온천 마을 가는 길목에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료칸이 있었다.
  
다츠코 동상 드라마 아이리스가 방영된 후 일본인들도 찾는 명소이다 ⓒ 정명조

뉴토 온천 마을 가는 길 또한 환상의 설국 드라이브 길이였다. 가장 오래된 츠루노유 온천은 아키타 영주 치료소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경호 무사 숙소와 치료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상처 입은 학이 온천수로 치유하는 모습을 본 사냥꾼이 츠루(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유명 온천 유래와 비슷하다.

눈을 맞으며 하얀 수건을 머리에 얹고 노천 혼탕에 몸을 담갔다. 다른 관광객들이 유백색 온천수 위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츠루노유 온천 별관에서 점심 식사 후 즉석에서 케냐 커피를 내려 줬다. 오후 내내 진한 커피 향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츠루노유 온천 뉴토 온천 마을의 여덟 온천 중 가장 오래되었다 ⓒ 정명조

여전히 눈 내리는 길을 달려 '도호쿠 지방 작은 교토'라는 카쿠노다테(角館)로 이동했다. 일본에 남아있는 사무라이 마을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고 한다. 특히 마을 입구 벚꽃 터널은 도호쿠 지방에서 최대 규모라고 했다. 봄에 다시 벚꽃 여행을 와야 할 것 같았다. 관람한 아오야기케(靑柳家)에도 수백 년 넘은 수양벚나무가 있었다. 정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한다고 한다.

사무라이 컬렉션을 구경했다. 사무라이 정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요즘 패거리 정치를 생각했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보여주는 지도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의아했다. 이곳의 반골 기질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설국에 도착하다

버스를 타고 칠흑 같은 어둠을 달려 료칸에 도착했다. 눈은 여전히 오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온천에 몸을 담갔다.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르르 풀렸다. 쥰마이다이긴죠(純米大吟醸) 사케와 함께 만찬을 즐겼고, 호텔 로비에서 늦은 밤까지 송년 파티를 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잠자리 들기 전에 노천 온천에 또 몸을 담갔다. 피부가 놀라 보들보들해졌다.

다음 날 새벽에도 한 시간가량 산책했다. 눈이 전날보다 더 많이 와서 장화를 신었다.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을 보고 가이드가 웃었다. 핫코다 호텔에 가면 여기서 찍은 사진은 다 지울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침 식사 중 유리창 너머 파란 하늘과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모두 사진 찍으러 창가로 몰렸다. 잠깐이지만 그날 유일하게 파란 하늘이 보인 순간이었다. 체크아웃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료칸 미야코와쓰레는 언제라도 휴식이 필요하면 생각날 무릉도원이었다.
 
히로사키(弘前)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 폭탄이 쏟아졌다. 어쩌면 눈에 갇히는 행운이 찾아올 것 같았다. 가이드는 우리나라 조종사 실력이 세계 최고라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히로사키 공원에 갔다. 공원 중앙에 쓰가루 지방 세력가인 쓰가루 노브히라가 1611년에 쌓은 성이 있었다. 2600여 그루 벚나무에 쌓인 하얀 눈이 벚꽃 축제를 연상시켰다. 일본 최고 수령인 120년 된 왕벚나무도 고고히 자태를 자랑했다. 최고 출사지였다. 모두 사진 찍느라 바빴다. 히로사키 공원 설경을 사진으로만 담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히로사키 공원 설경 봄에는 벚꽃 축제, 가을에는 단풍 축제, 겨울에는 눈 등롱 축제가 열린다 ⓒ 정명조
 
히로사키 성 일본 7대 성 중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높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정명조

해발 약 900m에 위치한 핫코다 호텔은 이미 설국이었다. 호텔 정문 앞에 천연 이글루가 있었다. 가로등 기둥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호텔 방 유리창은 눈으로 장식되었다. 베란다로 통하는 문은 눈에 막혀 열리지 않았다. 창문을 통하여 보이는 너도밤나무 숲은 온통 흑백이었다. 호텔은 눈에 파묻힌 채 흑백 세상 한가운데에 있었다.
 
핫코다 호텔 전경 핫코다 호텔 전경 ⓒ 정명조
 
핫코다 호텔 정문 이글루 핫코다 산은 겨울 스포츠로 유명하며 스키 시즌은 12월부터 5월까지이다 ⓒ 정명조
      
여행 마지막 날에도 끝없이 눈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스카유 온천에 갔다.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서 차를 이용했다. 스카유 온천은 핫코다 구역에서 가장 오래된 약 350년 된 온천이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핫코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후 40여 분 동안 진정한 설국 드라이브를 즐겼다. 3m 설벽(雪壁)을 따라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노련한 운전기사 때문에 편안하게 창밖을 감상했다. 12월 말에 이처럼 눈이 많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환상적인 드라이브였다.
 
간단한 쇼핑 후 초밥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전히 눈 오는 길을 뚫고 공항에 도착했다. 제설차가 활주로에서 나란히 줄지어 작업 중이었다. 스케줄보다 두 시간 늦게 귀국 비행기는 출발했다.
 
결국 눈에 갇히는 행운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함께 여행도 끝났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설국>
 
태그:#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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