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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수급자, 쉽게 말해 가난하다는 말이다. 난 여지껏 가난하게 살았다. 내가 네 살 때 아버지가 IMF를 술로 버티려다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 엄마는 언젠가 노숙을 했던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비 오는 날 나를 부여안고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잠들었다고.

우유를 마시며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서 우유를 먹고 싶다고 조르는 내게 엄마는 버려진 우유갑을 주워 깨끗이 씻고 그 안에 수돗물을 채워 "이게 우유야"하고 건넸다고도 한다.

이것 말고도 깊고 시린 사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인데 나는 이 짧은 이야기만으로 더 이상 엄마에게 과거의 기억을 들출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순간 엄마와 나는 함께였지만 엄마가 가지고 있는 상처는 나의 기억과 상상으로도 다가서지 못할 만큼 훨씬 더 클 테니까. - 54~55쪽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북레시피 펴냄) 한 부분이다. 거리를 떠돌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잠들기도 했던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 모자는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와중에 관심을 가져준 낯선 누군가의 도움으로 짧지만 영원할 것 같은 절망적인 노숙생활을 끝내고 내발산동에 있는 모자보호소로 가게 된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자립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젊은 엄마는 다시 절망한다. 그곳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1년. 머잖아 나가야만 하는데 취직은커녕 갈 곳조차 없어 아들과 다시 노숙을 해야 할 상황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취직이 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청각장애인이라서였다. 그래서 더욱 절망스러웠던 것. 그 젊은 엄마는 아들과 영영 이별을 염두에 둔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다행히 그 여행을 다녀온 직후 기적처럼 취직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영양실조에 의한 각막혼탁으로 시각을 잃고 만다. 이런 모자에게 희망을 준 것은 한 방송사였다.

2005년 MBC <느낌표> '눈을 떠요'를 통해 모자의 사연과, '각막수술 프로젝트' 과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방송과, 방송을 본 사람들의 격려와 도움 덕분에 모자는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게 된다.

왜 하필 '벙어리'일까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 책표지.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 책표지.
ⓒ 북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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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종건이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새 삶을 꾸리게 된 어머니와 함께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삶', '보다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꿈이 된 소년은 자라는 동안 봉사활동에 늘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십 대 중반인 2018년 현재, 종건씨는 사회 공헌 관련 일을 하며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과 긍정의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종건씨가 유독 싫어하고 아파하는 말이 있다. '벙어리'이다. 겨울이면 사람들 손에 끼어 있고, 노점 좌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그런 벙어리장갑조차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복잡하게 와 닿는 말이라고 한다. 

벙어리가 말을 못 하는 사람, 즉 언어장애인을 뜻하는 말이지만, 종건씨에게는 어머니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되는 말임은 물론이다.
 
귀여운 고래과자 모양의 장갑이 어째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단어를 품었나? 궁금하여 지식의 창에 물어보았다. 명확한 정설은 없고 온갖 추정만 쏟아져 나온다. (…) 그 어느 것도 나의 불편한 고통을 긁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두 단어를 떨어뜨려 보았다. '벙어리'와 '장갑'. 장갑, '손을 보호하거나 추위를 막거나 장식하기 위하여 손에 끼는 물건. 천, 가죽, 털실 따위로 만든다.'라고 나와 있다. (…)벙어리, '언어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친절히 단어장에 나온다. 그 친절한 설명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러움 뒤에는 궁금증이 따랐다. 그럼 '벙어리장갑'이라고 검색하면 어떻게 나올까.

벙어리장갑, '엄지손가락만 따로 가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함께 끼게 되어 있는 장갑.' 나를 두 번 당황시켰다. 뜻이 있지만 뜻이 아니다. 벙어리는 한자도 아니어서 2차 풀이로도 접근할 수 없으며, '벙어리장갑'은 벙어리와 장갑이 꼭 붙어 뜻에서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두 단어가 왜 붙었는지, 그리고 그 단어들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숨 쉬게 되었는지 이유를 나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83~85쪽

종건씨가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한 이유는 장애인인 어머니와 힘들게 살던 지난날 '잊지 못할 도움'으로 희망을 열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엄지장갑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보다 많이 알리고 싶어서였다.

'엄지장갑'이 익숙해지는 세상

'엄지장갑 프로젝트'의 취지는 '벙어리장갑을 엄지장갑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모양은 물론 어떤 이유로든 굳이 벙어리장갑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예전부터 그렇게 불리었으니, 아마도 다들 무심코 부르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종건씨가 대학생일 때 시작됐다. 뜻있는 친구들이 자신들의 재능과 뜻을 더했다. 프로젝트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6년 11월 30일 카카오스토리 펀딩을 통해. 이후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과 여러 케이블 방송을 통해 알려지는 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종건씨를 인터뷰한 <오마이뉴스> 기사도 있다. 

그럼에도 아쉽게도 (아마도) 여전히 엄지장갑보다는 벙어리장갑이 낯익고, 그래서 그처럼 부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쓰다가 궁금해져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봤다. 벙어리장갑으로 판매되는 상품들이 훨씬 다양하고 많은 데다가 벙어리장갑을 추억하는 등, 벙어리장갑 관련 기사나 개인들의 글들이 훨씬 많았다.

어떤 설문 결과, 실제로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 중에는 벙어리장갑처럼 장애인을 뜻하는 표현이 들어간 말을 싫어하고, 그로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 빨리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말하기는 다분히 습관적이다. 아직 벙어리장갑이 입에 낯익다면 엄지장갑으로 부르려는 노력을 해보길 권한다.  

2005년, 종건씨의 어머니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각막이식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한 후 어린 종건 씨에게 했던 첫말이 있다. 

"종건아, 우리도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덕분에 종건 씨는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꿈을 가지게 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MBC <느낌표> '눈을 떠요'의 주인공이 되기까지의 힘든 삶과 방송 숨은 이야기, '엄지장갑 프로젝트' 진행과정과 숨은 이야기, 다양한 봉사활동과 현장 이야기, 장애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 사연과 인터뷰 등이 담겨있다.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많고, 힘든 순간을 이겨낸 희망의 메시지까지 느껴져 뭉클하게, 그리고 의미 남다르게 읽은 책이다.
 
봉사를 통해 깨달았다. 나에게 평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겐 소중한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 주변에 베푼 작은 마음이 누군가에겐 큰 도움의 열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75쪽

종건씨는 현재 청각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이어 프로젝트'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엄지장갑 프로젝트에 동참하길 바라며, 아울러 이어 프로젝트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공감과 응원의 마음을 더한다.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 - 아직도 벙어리장갑이라 부르세요?

원종건 지음, 북레시피(2018)


태그:#엄지장갑 프로젝트, #벙어리장갑, #MBC 느낌표-눈을 떠요, #원종건, #엄지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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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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