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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불꽃페미액션 회원, 녹생당 당원 등이 지난 2018년 8월 28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 성범죄 산업 특별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불꽃페미액션 회원, 녹생당 당원 등이 지난 2018년 8월 28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 성범죄 산업 특별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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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분투를 벌이는 로비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스 슬로운>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국회의원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국민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국회에서 버티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거에서 이기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생각보다 큰 힘이 없다. 다수의 국민들이 어떤 정책을 요구하건 의원들은 자신을 계속 국회로 보내줄 핵심 지지층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인 슬로운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타겟을 움직일 열쇠를 쥐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단순히 의원실에 들어가서 설득하려고 하지마라. 먼저 의원들이 누구를 믿으며, 누구를 화나게 하면 안 되는지를 알아내서 그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라.'

너무 차갑고 단순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만큼 슬로운의 말은 현실적이며 핵심을 파고든다. 그녀의 말은 단순히 바다 건너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당장 내가 저 장면을 떠올린 것도 국회가 2019년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을 보면서다.

올해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해 책정됐던 26억 4500만 원의 예산이 통째로 삭감됐다. 이 예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산하 디지털 성범죄 대응팀의 전담 인력을 30명으로 확충하고 불법 영상물을 신속하게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의 피해를 빠르게 구제하고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할 돈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도 아니다. 작년 한 해 디지털 성범죄는 뜨겁게 이어져 왔고, 국회도 정부도 입을 모아 그 심각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근거 규정도 없이 예산을 결정하는 '소소위'
 
지난 2018년 12월 8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2019년 예산안이 상정된 후 민주평화당장병완 원내대표가 반대토론을 하고 있다. 본회의장 시계가 새벽 4시를 알리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8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2019년 예산안이 상정된 후 민주평화당장병완 원내대표가 반대토론을 하고 있다. 본회의장 시계가 새벽 4시를 알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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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예결위 소소위'에 관한 것이다. 국회는 정부의 예산안과 결산안을 심사하기 위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를 별도로 두고 있다. 예결위의 홈페이지에도 설명되어 있듯, 보통 이 위원회를 거친 예산안은 그대로 본회의에 상정되고 통과가 되기 때문에 예결위는 사실상 예산안 확정에 있어 실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국회법에 따라 예결위는 15명 정도의 예결위원들이 예결산안을 심사하는 예산조정소위원회(예산소위)를 내부에 두고 있다. 그런데 만약 예결위로 넘어간 예산안들이 예산소위에서조차 진통을 겪다 표류하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해당 예산은 다시 '소소위'로 넘어가게 된다.

아마 누군가에겐 낯선 명칭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산소위 속의 소위원회'를 뜻하는 이 소소위'는 존재의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예산안을 심사하는 위원회가 법적 근거도 없이 임의로 만들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큰 문제다. 하지만 더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근거 규정이 없다는 건 곧 소속 의원들이 위원회를 자기 마음대로 운영해도 제동을 걸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소소위는 비공개로 진행되며, 회의록조차 남기지 않는다. 즉 누가 어떤 이유로 예산을 삭감하거나 증액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디지털 성범죄 예산이 삭감된 이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찾아다니던 나도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항의를 해야 할 의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실제 디지털 성범죄 관련 예산 삭감 문제를 보도한 이승윤 YTN 기자는 지난 3일 <뉴스Q>에 출연해 "소소위에서는 여야가 예산 자체의 의미를 하나하나 따지기보다는 정치적인 타협을 통한 절충을 벌이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액수가 작았던 디지털 성범죄 대응팀 예산이 결국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예산의) 당사자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예산 삭감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며 "당혹스러움 속에 다음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누구를 위한 예산이 위협 받는가

소소위는 한 국가의 예산안 심사과정을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불어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 속에서 과연 손쉽게 사라질 예산은 어떤 것인가. 이는 거꾸로 '쪽지 예산'이나 여야 협상 과정 등을 통해 오히려 늘어난 예산을 보면 알 수 있다.

언론이 '실세 예산'이라고 지적한 사안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역구인 세종시 관련 예산을 살펴보자. 정부의 예산안에 따르면 국립세종수목원에는 303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국회를 거치자 이 돈에 253억 원이 추가되었다. 정부안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예산 10억 원이 편성되기도 했다.

김성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서울 강서을 쪽은 어떨까. 지하철 9호선 증차비 500억 원을 서울시 예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우회 증액했고, 항공박물관 건립비 48억 원과 운영비 12억 원도 협상을 거치며 추가됐다. 이외에도 흔히 말하는 '실세 의원'들과 예결위원들의 지역구 관련 예산들도 신규 편성되거나 증액된 사실이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로 증액과 신규 편성이 불가피했던 꼭 필요한 예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추가된 예산들을 살펴보면 의원들이 지역구에 잘 보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내용도 상당하다. '내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선심 쓰는 돈 말이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국회의원들이 재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산들은 손쉽게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 예산은 어떤 예산일까. 의원들이 자리를 유지하는 데 별다른 영향력도 위협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산, 즉 정치적 약자들을 위한 예산이다. 나는 디지털 성범죄 예산을 삭감한 의원들이 특별한 악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기를 계속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예산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평등한 예산, 평등한 정치를 위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회원들이 지난 2018년 12월 10일 오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에서 ‘장애등급제폐지 예산반영을 위한 농성 투쟁보고 및 세계인권선언 70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회원들이 지난 2018년 12월 10일 오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에서 ‘장애등급제폐지 예산반영을 위한 농성 투쟁보고 및 세계인권선언 70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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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들 중 하나라 할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정말 좋아져서 제도가 달라지고 법이 바뀔 수도 있다. 사람들이 '성소수자 인권은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끌어올 수 있을까. 답은 회의적이다.

이번에 사라진 예산은 디지털 성범죄 예산뿐만이 아니었다. 청년 일자리 관련 예산은 대폭 감액되었고, 기초생활수급 노인 42만 명에게 매달 1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한 예산도 증발했다. 그 결과 복지 예산은 1조 2000억 원 가까이 줄었다. 반대는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성에 공감한 예산들이 그런 결말을 맞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일단 소소위를 통한 예산 밀실심사가 중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소위가 꼭 필요하다면 근거 규정을 만들고 회의록을 남기며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운영하든가, 아니면 소소위 자체를 없애야 한다. 이건 무엇보다 원칙의 문제다. 나라의 돈은 국민의 돈이며 공공의 것이다. 그런 돈으로 만들고 집행하는 예산을 몇몇 개인이 비공개로 사용처를 정한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별 의원들이 자리보전을 위해 선심성 예산을 만들고 이 과정에서 정작 필요한 예산은 삭감하는 일을 막을 근원적인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원회를 아무리 정비한다고 한들 소소위와 같은 이상한 관행이 이름만 바꾼 채 또 다시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선거제 개편을 비롯해 현재 요구되고 있는 다양한 정치개혁 과제들이다.

슬로운의 이야기처럼 정치인들은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유지시켜줄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들을 위해서만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쓰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요한 일은 국회의원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을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의원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을까. 정치적 약자라는 이유로 당사자들을 위한 예산이 허망하게 날아가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태그:#예결위, #소소위, #국회, #예산, #미스 슬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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