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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시절, 함석헌의 차남 우용씨, 며느리 양영호씨, 외손자 정현필씨(오른쪽부터).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시절, 함석헌의 차남 우용씨, 며느리 양영호씨, 외손자 정현필씨(오른쪽부터).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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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함석헌저작집> 30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 저작집은 지난 1980년대 발간된 <함석헌전집> 20권을 증보해 30권으로 발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작집에 오류가 상당수 발견돼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한길사에 판매금지를 요청했다. 그 후 한길사와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수차례 회의 끝에 저작집 30권 판매를 중지하고 책방에서 모든 책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함석헌(1901~1989) 사상에 목말라 있는 독자들 중엔 기존 전집과 저작집이 절판, 판금돼서 시중에서 아예 구할 수 없다는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18년 12월 30일 <함석헌문집> 전자책 42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 문집을 펴낸이는 함석헌 선생의 외손자이자 주캐나다 동포 정현필씨다.

정씨는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질문을 받았다. "함 선생님을 공부하려 해도 책을 구할 수 없다, 언제 전집이 나오느냐?" 그래서 그는 지난 2013년부터 자신이 캐나다에서 운영하는 'ssialsori.net'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함석헌의 글을 접하기 원하는 독자는 누구든지 방문해 볼 수 있다. 특히 함석헌을 연구하는 학자나 공부하는 학생에게 정씨는 제한적으로 이번에 그가 만든 <함석헌문집> 전자책을 공개하고 있다.

기자가 이런 정씨에게 물었다. "함석헌 할아버지의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아서 지난 6년간 무보수로 이런 엄청난 일을 했나?"

"지난 1985년 나는 위급한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함석헌 할아버지는 수술 중인 나를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시면서 수술이 잘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저 애는 부활했다'고 말씀했다.

지난 1986년 캐나다로 이민왔다. 2년 후인 1988년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했을 때 한국의 병원에서 뵈었다. 당시에는 정신이 분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나를 보고 알아보셨다. 첫마디가 '현필이 너 뭘 할래?'라고 하셨다. 그 두 말씀은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다. 할아버지를 통해 내게 주시는 하늘의 소리라 믿는다. 그 두 말씀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결국 그는 할아버지 함석헌이 손자인 그에게 한 말, '저 애는 부활했다'와 '현필이 너 뭘 할래?'에 사로잡혀 지난 6년간 혼자 힘으로 <함석헌문집>을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씨름한 것이다.

함석헌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교수, 박사, 변호사 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감히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하지 못했던 <함석헌문집> 42권을 아이러니 하게도 자영업자 생활인인 그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가 보내 준 자료를 읽어 봤다. 각고의 정성을 곳곳에 느낄수 있었다.  그는 지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 잠시 돌아와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정 선생과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 정현필 선생이 펴낸 <함석헌문집> 전자책 중 일부
 최근 정현필 선생이 펴낸 <함석헌문집> 전자책 중 일부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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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을 만드는 데 무려 6년이 걸렸다. 처음에 이 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동기가 무엇인가.
"지난 1986년 캐나다로 이민와 자영업을 하다 1999년부터 캐나다에서 함 선생님에 대한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이일이 인연이 돼 지난 2007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문영(1927~2014) 이사장의 부름으로 그해 서울로 나가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게 됐다. 그때 서울을 나갈 때는 기념관 (건립)을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한길사에서 <함석헌저작집> 30권을 출판했다. 그러나 출판 과정에서 함 선생님의 글이 원문과 다른 오류가 있음을 알게 돼 판매를 중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함 선생님의 전집을 새로 출판해야 한다는 뜻이 모아졌다.

그동안 자료실을 만들어 관련 자료들을 다양하게 모아 놓은 것과 각 도서관과 중고책방을 뒤져 함 선생님의 글을 찾았다. 또 자료 중에 있는 녹음테이프를 녹취해 출판을 위한 기본 자료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무국장으로 일을 시작할 때는 함 선생님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자료를 모으던 중, 한길사에서 출판된 저작집이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그때 생각을 고쳤다.

유품이나 전시하는 기념관보다는 함 선생님의 정신이 지켜지고 살아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생전에 남기신 글이 온전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이사장이 다른 분으로 바뀌면서 사무국장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자료실에 모아진 함 선생님의 글과 녹음자료 등을 컴퓨터 파일로 준비하여 지난 2012년 캐나다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전집 작업을 계속했다. 지난 2016년에 전집출판을 위해 작업된 것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해 함석헌기념사업회에 전집출판을 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 사정으로 이 일이 진행 못됐고 나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서 계속해 전집 출판을 위해 편집을 했고, 지난해 12월 전자책 42권을 완성했다. 책을 한 권씩 만들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바보새함석헌(ssialsori.net) 웹사이트에 공개해 함석헌 선생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부분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생활로 가르치신 분"
 
 80년 대 함석헌
 80년 대 함석헌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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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부터 보아온 외할아버지 함석헌은 어떤 분이었나? 특별히 생각나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손주들에게는 남들과 같은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었다. 항상 주위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우리 손주들은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화를 내거나 손주들에게 혼을 내는 일은 없었다. 화를 낸다는 것은, 글 쓰실 때 아이들이 떠들면 조용히 하라는 정도였다. 언젠가 미국에 사는 누님과 대화 중에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없으나 할아버지는 그분의 삶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는 말을 하면서 한 예를 들었다.

교회의 여러 어른들과 어떤 자리에서 지난 50~60년대 옛날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남녀평등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할아버지네 집에서는 찾아온 손님이나, 아이들이나, 여자나, 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나 모두 한 밥상에 할아버지와 함께 둘러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고 했는데, 그 말에 놀라는 분들이 있었다고.

그때까지도 어른과 아이들은 구별되고, 남자와 여자, 주인과 일하는 분들은 같은 밥상을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놀랍다고 했다 한다. 그때 누님 말은, 우리는 그런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는데 그런 것이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큰 선물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나 또한 같은 마음이다. 그때는 멋모르고 자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자유와 평등을 생활로 가르치신 것 같다."

- 이 책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다만 아쉬운 것은 평소 함 선생님이 우리말 쓰기 운동을 많이 하셨으니 제목을 우리말로 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한문을 잘 모른다. 굳이 한문을 쓸 경우 우리말 뒤에 괄호로 표기하면 젊은이들이 더욱 쉽게 함 선생님 글에 접근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집의 제목을 만들 때 고민을 했다. 우선 1980년대 <함석헌전집>과 2009년 <함석헌저작집>과는 구별돼야 했기 때문이다. '信天翁咸錫憲文集'이라 했는데 특별이 한자를 쓴 것은 별 뜻이 없다. 전집, 저작집이란 말을 다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집(文集)이라 했다. 함 선생님의 호가 신천(信天)이어서 신천을 넣자고 하다 보니 한자표기가 됐다.

그러나 책 내용은 한자를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한글로 표기를 했고 한자를 표기해야 하는 경우는 괄호를 사용했다. 함 선생님의 글은 1930~1950년대에는 한자 표기가 많은데, 그 이후는 동양고전이 아닌 경우는 모두 한글을 쓰셨다."

"다양한 할아버지의 글을 발로 뛰면서 새로 찾아냈다"
 
 정현필 선생이 운영하는 ssialsori.net 웹페이지. 이곳에서 <함석헌문집>을 볼 수 있다.
 정현필 선생이 운영하는 ssialsori.net 웹페이지. 이곳에서 <함석헌문집>을 볼 수 있다.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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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의 <함석헌문집>과 기존의 <함석헌전집>, <함석헌저작집>과의 가장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전집과 저작집에도 포함되지 않은, 미처 수록되지 못한 글이 이번 문집에 상당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글은 주로 어떠한 글인지? 또 왜 그런 함석헌의 글이 기존의 전집과 저작집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인가.
"<함석헌문집>은 평균 350쪽 분량의 책 42권으로 되어 있다. 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존 전집이나 저작집에 수록이 되지 않은 글이 상당량이 있다. 기존의 전집이나 저작집엔 초기 함 선생님이 <성서조선>에 발표하신 글 중에 몇 개가 빠져 있고, 김교신 선생님의 글을 함 선생님 글이라 해서 전집과 저작집에 수록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

또한 옛글자인 깉다('남다'라는 뜻)를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여러 곳에 나온다. 논리(論理)를 윤리(倫理)로 잘못 표기하는 편집에 실수가 여러 곳에 있고, 1970년대 <씨알의 소리>에 발표한 글은 당시 정권에 의해 삭제된 부분을 살리지 않고 그대로 낸 경우도 있다. 새로 찾은 시, 새로 찾은 좌담, 특히 1963년 7월 <사상계> 주최 귀국강연회 원문은 어디에서도 없었는데 녹음강연을 구해 녹취 후 이번 문집에 수록했다.

그 외에 외국 방문 중 현지에서 강연하신 녹음을 구해 녹취 후 수록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셨던 글도 새로 찾아 수록했고, 중앙신학에서 요한복음 강의하신 내용도 녹취해 3권 분량으로 수록했다. 또 출판사가 자의로 고쳐 편집한 내용을 가능하면 발표하셨던 초고대로 복원해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편집했다.

함 선생님과 서신을 나누신 분들이 편지를 기증해 많은 양의 편지가 이번 문집에 수록돼 기존의 한 권에서 두 권으로 편집했다. 또한 한국에 있을 당시 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대학도서관등 주요 도서관을 검색해 다양한 함 선생님의 글을 발로 뛰면서 새로 찾아냈다. 아직도 미처 찾아내지 못한 함 선생님의 글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함석헌은 어느 한 단체의 함석헌이 아니다"
 
 정현필 선생, 부인과 함께
 정현필 선생, 부인과 함께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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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자책을 종이책으로도 출판하면 독자들을 위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전자책을 종이책으로도 출판할 계획은 없는지?
"이 전자책을 만든 이유는 최종적으로 종이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함석헌 선생님은 어느 한 단체의 함선생님이 아니다. 이제는 흩어져 있는 단체들이 뜻을 모아 총력을 들여서 이 전집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일을 몇 년간 해온 목적은 이 자료가 기초가 돼 전집 출판에 밑거름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편집 작업을 해오면서 느낀 점은 지난 2009년 한길사에서 출판된 저작집의 오류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함 선생님의 글이 지켜지고 후세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출판될 모든 함석헌 선생의 글에 '표준 기준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책을 출판할 때에 따라야 하는 여러 기준을 세우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세우고 변질되지 않게 잘 지켜내는 기준서를 준비하여 이에 따라 전집이 출판돼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내가 만든 '전자책'과 '연대별 목록', '전집-저작집-문집 비교목록' '함 선생님 고유 어휘사전'등이 이 기준서를 만드는 기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해 2019년 2월에 전집 출판을 목적으로 한국 방문을 계획 중이다. 지금 현재는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아무 계획도 없고 이에 따르는 재정도 전혀 없다. 함께 일을 할 동지도 없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부딪쳐 보고자 한다."

-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함석헌전집을 다시 출판해야 한다는 뜻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전혀 진행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참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나를 포함 그 누구도 함석헌 선생님의 모든 것을, 전체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선생님을 따르는 모든 분들이 그런 점을 인정하고 자기만이 진정한 제자라는 오류에서 벗어나 힘과 뜻을 합쳐서 그분이 말씀하신 씨알을 말로만 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내기를 희망한다. 사심(私心)을 버리시기를 바란다."

- 지난 6년간 타향에서 혼자 힘으로 이 문집 만들기 작업을 하면서 심한 어려움과 고초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힘든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애로사항과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몇 가지 소개하면?
"왜 이 전집 출판을 해야 하는지, 왜 중요한지를 이해 못하는 것, 함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자칭 말하는 분들이 자료를 소중하다고 꼭 지키고만 있지 그것을 통해 다른 무엇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하는 것, 장자 노자 테이프를 녹취해 글로 출판해야 하는데 '형산에 박옥'이라 하며 쳐다만 보고 있는 것 등이 마음 아팠다."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갈 길을 밝혀 보여준 함석헌의 사상"
 
 생전의 함석헌
 생전의 함석헌
ⓒ 정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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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는 지금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연구소, 씨알사상연구원, 씨알재단 등이 있고 미국에는 함석헌사상연구회 등이 있다. 이런 단체들이 향후 <함석헌문집> 종이책 발간을 위해 지원할 길이 있다면?
"이 일을 하면서 캐나다에 있기 때문에 직접 자료를 찾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다. 지금이라도 함 선생님과 관련 단체에서 이 점을 고려해서 글을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시간과 재정을 투자한다면 더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서신과 녹음테이프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기증 받으면 더 많은 자료가 나올 것이다.

함석헌기념사업회에 조의영, 조형균 두 분이 기증해 보관하고 있는 노자 장자 테이프는 하루빨리 녹취작업을 해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 함 선생님의 후기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돼야 한다. 함 선생님 관련 여러 단체에서 행하는 어느 행사보다도 이 전집을-노자 장자를 포함-출판해 그분 사상이 온전히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 선생님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 하셨을 때 그 '뜻'을 제대로만 이해하고 실천 한다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 '뜻'만 모아지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룰 수 있다. '뜻'을 팔 생각은 그만하고 이제는 '뜻'을 세울 때다."

- 21세기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가 왜 20세기를 살다간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삼사십 년 많게는 오십 년 전에 쓰신 글을 읽다보면 현세대를 놓고 하시는 말씀이란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남긴 고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갈 길을 밝혀 보여주시는 함석헌의 사상이 가깝게는 남북의 갈등문제, 평화통일, 더 나아서는 인류의 평화에 대해 분명 우리 젊은이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함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로 돌아 앞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글을 통해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우로 돌아 앞으로!'는 함석헌의 표현으로 "떨어졌던 자가, 행렬에 '우로 돌아 앞으로'의 명령이 내릴 때는 앞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 성경에 나오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와 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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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