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동 살동 왔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다며('아무것도 없잖어') 한탄하던 20대 장기하는 10년이 지나 그냥 니 갈 길 가라는('그건 니 생각이고') 30대 중반이 됐다. 지난 10월 '가장 멋질 때 마무리'하겠다며 장기하와 얼굴들의 종언을 고한 그는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해 보인다. 해보고 싶었던 작법과 다루고 싶었던 악기를 마음껏 활용했고, 영화감독 윤종빈이 선사한 뮤직비디오도 얻었다. '빠지기는 빠지더라' 탈취제 광고는 덤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빠지기는 빠지더라’ 탈취제 광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빠지기는 빠지더라’ 탈취제 광고 ⓒ Febreeze love 유튜브 캡쳐

 
장기하의 패배 담론은 <별일없이 산다>가 성공하자마자 막을 내렸다고 본다. 토킹 헤즈의 댄스, 산울림의 메시지를 그대로 가져온 '싸구려 커피'와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청승은 88만 원 세대의 적극적 온라인 호응에 힘입어 '한국 대중음악의 오래된 미래'라는 거창한 칭호를 수여받았다.

전 세대만큼 정교하지 않고 전 세대만큼 재치 있지 않던 가창이 새로운 것으로 여겨진 건 장기하가 패배를 의도했고 패배한 세대의 의식을 노래한 덕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별일 없이 산다>는 1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1집 성공, 성공한 인디 록스타의 커리어, 그리고...

때문에 그는 조속히 기존 담론을 폐기했다. 차기작 <장기하와 얼굴들>의 1번 트랙에서 '이렇게나 멋지게 해낼 줄은 몰랐었어 / 더 이상 예전에 니가 알던 내가 아니야'('뭘 그렇게 놀래')라 선언한 것이다. 이후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일상 속 소소한 재미를 찾아다니며 사운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토킹 헤즈와 텔레비전은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로 대체됐고, 싸구려 커피의 허탈함은 텔레비전과 전화번호부, 외투와 이모티콘의 소소한 외로움이 채웠다. 오케이 고(OK Go)의 뮤직비디오를 활용하며 '참신'의 형용사도 유지했다. '엘리트 밴드' 같은 행보였다.

이런 흐름은 <사람의 마음>,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를 거쳐 < Mono >까지 이어져왔다. 성공한 인디 록스타의 커리어다. 그러나 내겐 애매한 딜레마처럼 느껴졌다. 록의 역사를 모조리 재현해 보겠다는 사운드는 새로울 데 없는 재현에 그쳤고, 독특한 메시지 역시 일상 포착 이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전자는 아무리 도전한들 레트로라는 한계가 발목을 잡았다면 후자의 경우는 거대한 데뷔 작품의 담론을 자꾸만 돌아보게 만들었다. '싸구려 커피' 이후 장기하와 얼굴들의 최고 히트곡은 함중아와 양키스의 '풍문으로 들었소'다. 그것도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장기하와 얼굴들' 아름다운 마무리 '장기하와 얼굴들'이 1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마지막 앨범 < mono > 발매 기념 음악감상회에서 앨범을 소개하고 있다.  장기하, 정중엽, 이종민, 전일준, 이민기, 하세가와 요헤이로 구성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 mono >는 10년동안의 내공을 담은 마지막 앨범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12월 29일부터 31일까지 마지막 공연인 <마무리:별일 없이 산다>를 펼칠 예정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지난 11월 1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마지막 앨범 < mono > 발매 기념 음악감상회에서 앨범을 소개하고 있다. ⓒ 이정민

 
장기하는 1집의 성공 이후 메시지를 해체함과 동시에 1인 밴드에 가까웠던 체제를 유기적인 팀플레이로 재구축했다. 때문에 밴드의 음악은 데뷔작처럼 널리 입에 오르진 못했어도 '웰메이드'라는 호칭은 어렵지 않게 확보했다. 밴드의 마지막 작품 < Mono >도 마찬가지다. 앨범에는 오묘한 네오 사이키델릭의 향취부터 미니멀한 팝 록, 댄스 록과 재치 있는 노랫말, 서정적인 멜로디가 고루 갖춰져 있다. 이번 앨범을 본인들의 최고작이라 자부한 이유가 이해 간다.

 '청년실업' 장기하와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의 결정적 차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 < Mono >의 앨범 커버

장기하와 얼굴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 < Mono >의 앨범 커버 ⓒ Stone Music Entertainment

 
< Mono >를 훌륭한 마침표라 할 순 있겠지만 좋은 앨범이라 평하긴 어렵다. 전곡을 모노로 녹음하고 앨범 타이틀에까지 '모노'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스테레오와 비교하여 유의미한 차이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노'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탐구해온 과거에 대한 찬사로 들린다.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뒤를 돌아보며 그들이 참고하는 과거 로큰롤의 영웅들을 흠모하는 작법이다.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사운드에 대한 고민은 지난해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 <홀로 있는 사람들>과 닮았다. 인디 록의 전설적인 밴드가 그들의 마지막 앨범을 일말의 새로움과 가능성 대신 그들의 커리어 속 어느 지점으로 설정한 것은 곡의 세련된 만듦새와 소리의 즐거움을 깎아내는 단점이었다.

공교롭게도 <홀로 있는 사람들>과 < Mono >는 모두 '홀로'의 정서를 짙게 풍긴다. 숱하게 듣는 고나리질을 '그건 니 생각이고'라 무시하고, 내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하며 나와의 채팅을 보며 언제나 혼자라 노래한다. '아무도 필요 없다'와 '나 혼자', '별 거 아니라고'도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의도지만, 굳이 최후의 작품·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상태에서 보다 용기 낼 수도 있었을 테다.

< Mono >의 장얼은 '뭘 그렇게 놀래'만큼 도발적이지도 않고 '내 사람'처럼 무언가를 은밀히 열망하지도 않는다. 그냥 갈 길 가고, 할 일 하고, 사람은 어차피 혼자이므로 알아서 잘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청년실업' 장기하와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의 결정적 차이다. 아쉽게도 데뷔작의 성공 이후 그는 급격히 노쇠한 듯하다. 

'장얼의 마지막'이 개운치 못하게 느껴지는 이유
 
 장기하와 얼굴들이 삼성물산의 패션 멀티숍 비이커(Beaker)와 함께한 ‘그건 니 생각이고’ 라이브 장면

장기하와 얼굴들이 삼성물산의 패션 멀티숍 비이커(Beaker)와 함께한 ‘그건 니 생각이고’ 라이브 장면 ⓒ BEAKER 유튜브 캡쳐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들의 노래 제목처럼 '그렇고 그런' 밴드였다면 이런 담론을 제시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장기하는 '짧게나마 한 세대를 대표한 인물'이었고 그의 메시지는 88만 원 세대를 바라보며 미래를 두려워하던 내 또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장얼이 성공하면서 인디 씬에 모처럼의 생기가 돌았고 재치 있는 신인 밴드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씬을 주도하지 않았고 예외적인 존재로 머무르는 데 그쳤다. '그를 인디의 정체성과 미래로 결부시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임진모 음악평론가의 <별일없이 산다> 리뷰는 불행히도 정확한 예언과 같았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앞둔 장기하는 이 이상의 좋은 앨범을 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밴드를 해체하게 된 셈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초심'에서 '나는 옛날이랑은 다른 사람 / 어떻게 맨날 똑같은 생각 / 똑같은 말투 똑같은 표정으로 /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가 있겠어'라 그들을 변호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초심 따위 개나 줘버려'라고까지 단언할 필요 또한 없었다. 분명 나 같은 누군가는 정해져 있는 기상시간을 두려워하며 뜬눈으로 싸구려 커피나 마시던 청년실업 시기의 장기하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 같이 '달이 차오른다, 가자'라 노래하던 수염 난 청년은 결국 말쑥하게 각자도생을 노래하는 것으로 커리어의 한 장을 마무리했다. 다소 개운치 못한 장얼의 마지막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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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 (2013-2021)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편집장 (2019-2021) 메일 : zener1218@gmail.com 더 많은 글 : brunch.co.kr/@zenerkre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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