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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되었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책 읽는 아이들로 꽉 찬 서점을 상상해보라. 너무 근사했다.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책 읽는 아이들로 꽉 찬 서점을 상상해보라. 너무 근사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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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는 남편이 아이디어를 준 기획이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오랫동안 책 읽는 어린이를 뽑는 대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독서하는 아이들로 꽉 찬 서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까 너무 근사했다. 얼마나 오래 읽을 것인지, 상품을 무엇으로 줄 것인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읽을 책은 한길문고에서 준비해 주나요?"

어떤 독자가 던진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서관처럼, 서점도 책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을 곳곳에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러나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다. 책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상주작가가 벌인 일로 한길문고에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는 없던 일로 했다.

해보지도 않고 접어버린 일 속에서는 미련이라는 싹이 튼다. 어디 안 보이는 데에 파묻어 버려도 뚫고 나온다. 스스로 틔운 싹에게는 물이라도 주어야 한다. 그러라고 옛이야기에서는 귀인이 나타난다. 물론 나한테도 홀연히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한길문고 문지영 대표(학교 선배이기도 함)였다. 

"걱정 말고 해. 책은 각자 준비하되 우승자에게는 도서·문구 상품권(딱 7530원, 최저시급만큼만)을 주면 되잖아. 내가 협찬할게."

긴 턱수염은 아예 없고, 날개옷도 안 입은 귀인에게 나는 말했다.

"그럼 기분 나게 크리스마스에 할까요?"
"딱이네. 진짜 재밌겠다야."


햐! 막힌 가슴이 뻥 뚫렸다. 책 읽는 시간은 1시간으로 정하면 되겠다. 최후의 승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어린이가 이길 수 있는 대회를 만들자. '5초 이하는 엉덩이를 떼도 눈감아 줘야지'라는 원칙을 세웠다. 어차피 심사위원은 나 혼자니까.
 
1시간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안 떼고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을 드립니다.
 1시간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안 떼고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을 드립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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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읽을 책은 준비해 오세요'라는 문장을 행사 포스터에 넣었다. 한길문고 페이스북과 내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서너 시간 만에 선착순 스무 명이 꽉 찼다.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어린이들이 생기니까 예비번호 5번까지 받았다. 문지영 대표의 딸 초원이는 엉덩이 안 움직이고 앉아있는 연습을 틈날 때마다 하고 있단다.

"엄마, 엉덩이 안 떼고 1시간 동안은 책 못 읽어. 나한테는 5분도 길다고!"

우리 아들 꽃차남이 출전 포기 선언을 했다. 대회 열리기 2시간 전이었다. 꽃차남의 말대로라면,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는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우리 집 같은 일이 다른 집에서도 벌어지면 어쩌지?'라는 고민은 안 했다. 안 망할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재밌을 거니까.

대회 열리는 시간은 오후 2시. 어린이들은 1시 45분부터 자리잡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같이 온 젊은 엄마들이 "지금부터 읽으면 눈 아퍼. 쉬고 있어"라면서 독서에 흠뻑 빠져있는 아이들을 말렸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대회 시간은 오후 2시. 아이들은 15분 전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 그러면 눈 아파서 안 되는데... ^^
 대회 시간은 오후 2시. 아이들은 15분 전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 그러면 눈 아파서 안 되는데... ^^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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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나 어른이나 뭔가 좀 하려고 하면 꼭 오줌이 마렵고 목이 마렵다. 그래서 철저하게 기다려줘야 한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화장실에 다녀오세요", "물 많이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어지니까 목만 축이세요"라고 말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은 질문을 했다.

"엉덩이는 절대 안 떼어야 해요?"
"네. 하지만 5초까지는 봐줄 거예요."
"무조건 탈락이에요? 몇 번까지 기회를 줄 거예요?"
"안 줄 거예요."
 

2시 11분. 마침내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를 열었다. 타이머는 재깍 재깍 돌아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대회장소(한길문고 카페)에는 어떤 힘이 감돌았다. 서점에 온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고는 숨소리와 발소리의 볼륨부터 줄였다. "우리 아이 지금 참가시켜도 되나요?" 소곤거리며 묻는 어른들도 있었다.

2시 24분. 테이블에 엎드려서 팔을 쭉 뻗은 어린이 두 명의 엉덩이는 10센티미터쯤 떴다. 5초 이상 그 자세로 있었다. '엄격한 심사위원을 할 것인가? 선물을 주는 심사위원을 할 것인가?' 나는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크리스마스니까 괜찮겠지, 뭐.

2시 31분. 한 어린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서 말을 했다. 나 들으라는 소리였다. "지금 몇 분 남았어요? 알려주세요. 제발요." 그 질문이 나온 건 내 잘못이다. 엉덩이의 자세에만 신경을 썼다. 입은 다물고 있어야 하나, 이야기를 해도 되나를 안 정해 놓은 거다. 그래서 "30분 지났어요"라고 말해주었다.
  
1시간 동안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읽는 아이들. 냉정(?)하게 지켜봤다.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
 1시간 동안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읽는 아이들. 냉정(?)하게 지켜봤다.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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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년 아이들은 확실히 티가 나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붙인 채로 몸을 비틀었다. 하품을 하고, 옆 자리에 앉은 친구 얼굴을 보고, 잠깐씩은 서가에서 책 읽는 사람까지 구경했다. 역시 내 잘못이었다. 눈으로 책만 읽어야 하는지, 그 밖의 것들을 봐도 되는지 안 정한 거다.

2시 56분. 젊은 아빠가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장으로 성큼 들어왔다. "아휴, 몰랐어요. 내년에는 꼭 알려주세요"라면서 연락처를 남기고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어린이 책 코너에 다녀왔다.

3시 1분. 고학년 아이들도 조금씩 자세가 흐트러졌다. 저학년 아이들은 대놓고 내 눈만 바라봤다. 공정한 심사를 추구한다지만, 그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배포가 없었다. 타이머를 보여주었다. "10분밖에 안 남았어." 아이들의 눈은 산골짜기의 별빛처럼 반짝였다.

3시 8분. 대회장의 분위기는 밀물 때의 파도처럼 힘차게 술렁였다. 시계를 가진 아이들은 손목을 드러냈다. 먼 자리에 앉은 친구들도 시간을 보기 위해서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나하고 마주치면 "이 정도는 괜찮지요?" 하는 눈으로 봤다. "암요. 괜찮지요"라는 내 속마음은 아이들에게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3시 10분 53초. 독서에 전념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에 참가한 거의 모든 아이들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7,6,5,4,3,2,1. 땡!"
 

엉덩이 파워를 확인한 순간,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열기 같은 게 나왔다. 그 성취감 뒤에 오는 허탈함을 느끼기 전에, 한길문고 문지영 대표가 나섰다. 최저시급 7530원이 인쇄되어 있는 '한길문고 도서·문구 상품권'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책과 문구와 장난감을 찾아서 서점 곳곳으로 흩어졌다. 대회장 근처에서 퍼즐을 고르던 초등학교 4학년 옥예은 학생만이 내게 물었다.

"이거 원래 탈락자 없죠?"
 

말려들면 안 된다. 아가들에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러 오실 거야"라고 할 때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엉덩이 떼면 탈락 시켰을 거야!"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에 맞는 상품권을 드립니다.^^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에 맞는 상품권을 드립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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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엉덩이로책읽기 대회, #작가와함께하는작은서점지원사업, #군산한길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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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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